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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광주]김자수선생묘(金自粹先生墓)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1. 10. 7. 10:00

    김자수선생 묘 

     

    인터넷상에 제대로 표기가 안되어 있는 묘 중에서 대략적으로 이 근방에 있을거라하고 찾아나섰다가

    낭패를 본 경우가 많이 있을 것이다. 김자수선생 묘가 그런경우에 해당된다. 선생의 묘소는 비슷한

    묘가 옆에 있어서 잘못 짚으면 엉뚱한 묘소에서 해메게 되어있다. 인근에 비슷한 묘소가 있어서

    그렇다는 얘기다. 재실도 비슷하다..ㅎ사실은 선생의 아드님 묘소였지만..

    저는 제가 다녀온 묘소는 정확한 주소와 인터넷상 항공사진에 정확히 표기할 생각이다. 다음 사람이

    전혀 고민하지 않도록 안내할 생각이다. 다만 풍수적인 해설은 생략한다. 아직 설익은 실력이 나를

    나서지 못하게 함이 그 첫째요, 좋은 면만 쓰지못하고 안좋은 것을 지적할 때의 문제에 대해 생각

    할게 너무 많아서다.. 

      김자수(金自粹) 

     생몰년 미상. 고려의 문신. 본관은 경주. 자는 순중(純仲), 호는 상촌(桑村). 아버지는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 지제고(知制誥)를 지낸 오(珸)이다.
    1374년(공민왕 23) 문과에 급제하여 덕녕부주부(德寧府注簿)를 제수받았다. 우왕초에 정언이 되었는데, 왜구 토벌의 공으로 포상받은 경상도도순문사 조민수(曺敏修)의 사은편지에 대하여 회답하는 교서를 지으라는 왕명을 받았으나, 그가 전날 김해·대구에서 있었던 왜구와의 전투에서 비겁하게 도망하여 많은 사졸을 죽게 한 사실을 들어 거절한 죄로 전라도 돌산(突山)에 유배되었다.
    뒤에 전교부령(典校部令)을 거쳐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가 되고, 공양왕 때에 이르러 대사성·세자좌보덕(世子左輔德)이 되었다.
    이때에 왕대비에 대하여 효성을 다할 것, 왕세자의 봉숭례(封崇禮)를 서두르지 말 것, 사전(祀典)에 기재된 바를 제외하고는 일체의 음사(淫祀)는 금지하고 모든 무당의 궁중 출입을 엄단할 것, 천변이 자주 일어나는 것은 숭불로 인한 것이니 연복사탑(演福寺塔)의 중수공사를 중지할 것, 언관의 신분을 보장할 것 등의 상소를 올렸다.
    1392년에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어 좌상시에 전보되고 충청도관찰사·형조판서에 이르렀다. 고려말 정세가 어지러워지자 일체의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에 은거하였다.
    조선이 개국된 뒤 태종이 형조판서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자손에게 결코 무덤을 만들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이숭인(李崇仁)·정몽주(鄭夢周) 등과 친분이 두터웠으며, 문장이 뛰어나 그의 시문이 《동문선》에 실려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경기도기념물 제98호

     문화재명칭 

    김자수선생묘(金自粹先生墓)

    소재지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신현리 산120-1

     네비게이션주소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신현리 1095(재실)

    관리자(연락처)

    경주김씨

     

    김자수선생묘(金自粹先生墓)


    고려의 문신인 상촌(桑村) 김자수 선생의 묘소이다.고려 공민왕 23년(1374)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우왕 초에 사간원의 정언이 되었다. 이때 왜구 토벌의 공로로 포상받은 조민수의 사은편지에 회답하는 교서를 지으라는 왕명을 받았으나, 조민수가 왜구와의 전투에서 도망쳐 많은 병사를 죽게 하였다고 이를 거절하여 전라도 돌산에 유배되었다.
    공양왕 4년(1392) 충청도 관찰사·형조판서에 이르렀으나, 고려말 정세가 어려워지자 모든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에 은거하다가, 무덤에 비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묘 앞에는 혼유석·상석·향로석이 있고, 그 앞에 장명등(長明燈: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이 있으며 좌우로 석양(石羊)과 망주석이 각 1쌍, 문인석이 2쌍 배열되어 있다. 상석 좌우에 세워진 문인석은 양식으로 보아 조선 초기의 것으로 생각되며, 묘역 앞쪽의 문인석은 조선 후기의 양식이고, 그 밖의 상석·장명등·석양 등은 근래에 세운 것이다. 묘비는 그의 유언으로 세우지 않았다.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는 땅에 묻혀 있던 것을 1926년에 후손들이 발굴하였으나, 비문이 닳아 없어져 새로 채유후가 지어서 세웠다.
    고려의 충신으로 고려가 멸망한 것을 비관하고 자결한 김자수(생몰년 미상)를 모신 유택이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상석·향로석이 있고, 그 앞에 장명등이 위치하고 있으며 묘역 좌우로 석양(石羊)과 망주석이 1쌍, 문인석이 2쌍 배열되어 있다. 상석 좌우에 세워진 문인석은 높이 80㎝로 작은 크기이며 고졸(古拙)한 느낌이다. 양식으로 보아 조선 초기의 것으로 생각되며, 묘역 앞쪽의 문인석은 금관조복(金冠朝服)의 형태로 조선 후기의 양식이고, 그 밖의 석양·장명등·상석 등의 석물은 근래에 세운 것이다. 묘비는 그의 유언으로 세우지 않았다. 신도비(神道碑)는 땅에 묻혀 있던 것을 1926년에 후손들이 발굴하였으나 비문의 마모가 심하여 새로 채유후(蔡裕後)가 찬(撰)하여 건립하였다. 김자수는 고려 공민왕(恭愍王) 23년(1374) 문과에 급제하였다. 우왕(禑王) 초에 사간원(司諫院)의 정 6품 벼슬인 정언(正言)이 되었는데, 왜구 토벌의 공으로 포상받은 조민수(曺敏修)의 사은 편지에 회답하는 교서를 지으라는 왕명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조민수가 전날 왜구와의 전투에서 도망쳐서 많은 사졸(士卒)을 죽게 하였다고, 교서를 거절하여 전라도 돌산에 유배되었다. 공양왕(恭讓王) 때에는 왕에게 직언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공양왕 4년(1392) 충청도관찰사(觀察使)·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으나 고려 말 정세가 어지러워지자 모든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에 은거하였다. 조선이 개국된 뒤 태종(太宗)이 형조판서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무덤에 비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하여 고려에 대한 충성을 지켰다..

    <광주시 문화관광 사이트에서 인용>

     

    ▼ 김자수선생 시비

    ▼ 김자수선생 재실.. 네비게이션은 다리까지만 나온다. 다리앞에 주차하고 담넘어 들어가야한다.

    재실에 사람이 살지않아서 다른 방법이 없다.

     

      조선 건국이 완료되고, 이성계는 그와의 친분을 고려하여 그를 대사헌(大司憲)으로 불렀으나, 그는 이성계의 부름을 받고도 방안에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그후 太宗이 다시 병조판서로 부르면서, 나오지 않으면 가족들을 모두 죽이겠다고 위협하였다.  벼슬을 받지 않으면 집안이 풍비박산될 進退兩難의 처지가 된 것이다.
    그는 조상의 사당에 엎드려 절을 올리고, 아들 김근(金根)에게 장례물품을 챙겨 자기를 따르라고 이야기한다.  안동을 떠나 추령(秋嶺..분당에서 광주 넘어가는 지금의 태재고개)에 이르렀을 때, 과거 스승이었던 정몽주의 묘를 참배한다. 그리고 고개마루에 서서 山川을 둘러 본 후, 아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긴다.
    生의 마지막 순간을 태재에서 맞이한 것은...눈 앞으로는 한양 땅이 펼쳐지고,  뒤로는 스승인 정몽주의 묘가 있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선택의 시간에 그는 스승 정몽주의 길을 택한다.
    그는 아들에게 遺言한다. " 나는 이 곳에서 죽겠다. 이 곳에 매장하고 비석을 세우지 말 것이며, 행적을 금석(金石)에 새기지 말라.. 나무 뿌리 썩듯이 내버려 두어 널리 알리지 않도록 하라..."


    그리고 그는 절명시(絶命詩) 한 首를 남기고 독약을 삼켜 자결하였다.

                    평생충효의   (平生忠孝意)    평생토록 지킨 충효
                    금일유수지   (今日有誰知)    오늘날 그 누가 알아 주겠는가
                    일사오휴한   (一死吾休恨)    한 번의 죽음 무엇을 한탄하랴마는
                    구원응유지   (九原應有知)    하늘은 마땅히 알아 줄 것이리라...

    때는 太宗 13년 (1413) 11월 14일이었으며, 김자수 향년 63세 이었다.

    <블로그 김규봉의 사는이야기에서 발췌>

     

    ▼ 김자수선생 묘 안내판...  

     

      김자수의 무덤에 차마 비석을 세우지 못하고, 비석을 눞혀 묻어둔 후손은 8대손인 김홍욱(金弘郁)이었다.  김홍욱은 황해도 관찰사로 있을 때, 소현세자 강빈(姜嬪)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 달라는 응지상소(應旨上訴... 임금의 요청에 응하여 올린 상소)를 올렸다가, 孝宗이 직접 친국한 심문을 받던 중 매 맞아 죽은 인물이다.
    김홍욱은 죽음에 이르러... " 언론(言論)을 가지고 殺人하여 망하지 않는 나라가 있었는가? "라고

    말하며 죽은 올 곧은 인물이었다. 김홍욱의 자손중, 정승이 8명, 왕비가 1명 나왔으며, 추사 김정희도 그 자손이다.
    땅 속에 묻혀있던 이 비(碑)는 1928년 후손들에 의하여 발견되어 이렇게 누워 있어, 김자수의

    遺言을 지키고 있다. 발견된 후, 비문(碑文)의 글씨가 마모되어 읽을 수 없으므로  새로 만들어

    신도비각(神道碑閣)을 무덤 아래에 세웠다.

    <블로그 김규봉의 사는이야기에서 발췌>

     

    ▼ 김자수선생 신도비

    ▼ 김자수선생 순절비각...

    ▼ 김자수선생 순절비...

    ▼ 김자수선생 묘 오르는 길...

    ▼ 김자수선생 묘... 추석이 얼마남지 않은 때라 벌초가 안된 상태다..

    ▼ 김자수선생 묘... 묘비가 없다보니 밑에서 내용을 자세히 읽지않고 오면 헷갈린다.

    유언으로 묘에 묘비를 세우지말라고 하여 후손들이 묘비를 세우지 않은것 같다.

    ▼ 김자수선생 묘... 뒷쪽에 보이는 묘가 부인 권씨 묘

    ▼ 김자수선생 묘 전경

    ▼ 김자수선생 묘

    ▼ 김자수선생 묘 석물...

    ▼ 김자수선생 묘 석물

    ▼ 김자수선생 묘 백호쪽 문인석

    ▼ 김자수선생 묘 청룡쪽 문인석...

    ▼ 김자수선생 묘 측경..

    ▼ 김자수선생 묘 후경..

    ▼ 김자수선생 묘 후경

     

    ▼ 김자수선생 묘역 맨 윗쪽에 있는 우봉이씨 묘... 

    ▼ 우봉이씨 묘비... 아마도 김자수선생 아들 김근의 부인 묘로 보인다.

    ▼ 우봉이씨 묘 석물...

     

    ▼ 김자수선생 아들 김근 묘...

    김근 묘는 김자수선생 묘 안산쪽에 있는데 다리 앞에서 윗쪽으로 270미터 올라가면 산이 끝나고

    밭이 나타나는데 그 사이로 작은 길이 보인다. 그길로 올라가면 아들 김근 묘가 보인다.

    ▼ 김자수선생 아들 김근 묘 전경... 정부인 밀양박씨와 합장되어 있다.

    ▼ 김근 묘 후경.. 아버지 묘의 주산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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