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경기 남양주]김육선생 묘 및 신도비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1. 10. 31. 10:00

    김육선생 묘 및 신도비

     

    청풍김씨 문의공파 묘역은 엄청 넓다. 입구에서 우측에는 문의공파 파조인 김식선생 묘 및 신도비가 있고 

    좌측편에는 김육, 김좌명 신도비가 입구에 있고 묘소도 바로 인근에 있다. 이곳을 알고 돌면 별문제가 없지만 

    모르고서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묘소를 찾기란 무척 힘들다. 마을 안쪽에 문의공파 종중사무실이 있는데 그곳 

    종손께 부탁하면 자세히 알려주신다. 그분은 무척 친절하시고 찾아오는 손님을 반갑게 맞아주시니 꼭 한번 

    찾아가서 뵙고 선조에 대해서도 궁금한 것을 여쭤보고 오시길 추천한다. 이날 김석주선생 묘소를 알려고 

    종손댁을 찾았는데 정말 자세히 알려주셔서 한번에 찾아갈 수 있었다.  

    김육(金堉)
    1580년(선조 13)∼1658년(효종 9).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적 성향을 지니고 제도개혁을 추진한 정치가.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백후(伯厚), 호는 잠곡(潛谷)·회정당(晦靜堂). 기묘팔현(己卯八賢)의 한 사람인 식(湜)의 3대손이며, 참봉 흥우(興宇)의 아들이다.
    1. 성균관에 들어가다
    1605년(선조 38)에 사마회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으로 들어갔다.
    1609년(광해군 1)에 동료 태학생들과 함께 청종사오현소(請從祀五賢疏: 金宏弼·鄭汝昌·趙光祖·李彦迪·李滉 등 5인을 문묘에 향사할 것을 건의하는 상소)를 올린 것이 화근이 되어 문과에 응시할 자격을 박탈당하게 되자, 성균관을 떠나 경기도 가평 잠곡 청덕동에 은거하였다.
    청덕동에 머물며 회정당을 짓고 홀로 학문을 닦으니, 스스로 호를 잠곡이라 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2. 인조대의 관력과 활동
    1623년에 서인의 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2월에는 음성현감이 되어 목민(牧民)의 직분을 다하는 한편,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해 10월에 정언에 임명되었으며, 1633년 9월에 안변도호부사(安邊都護府使)로 나가 청나라의 침입에 대비하는 중요한 직임을 맡기도 하였다. 이어 동지성절천추진하사(冬至聖節千秋進賀使)로 명나라에 갔다온 후 예조참의·우부승지·장례원판결사를 거쳐 1638년 6월에 충청도관찰사에 올랐다.
    도정(道政)에 임하여 대동법의 시행을 건의하는 한편, 수차(水車: 무자위·물레방아)를 만들어 보급하였으며, 《구황촬요 救荒撮要》와 《벽온방 辟瘟方》 등을 편찬, 간행하다가 승정원좌부승지가 되었으며, 이후 형조참의 겸 성균관대사성·홍문관부제학·대사간·병조참의·한성부우윤·도승지 겸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병조참판·이조참판 겸 비변사유사제조(備邊司有司提調)·형조판서 겸 선혜청제조·우참찬·대사헌·예조판서·도총부도총관·개성부유수 등의 현직(顯職)을 지내면서 중국에 두 차례(1643년과 1645년)나 더 다녀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화폐의 주조·유통, 수레의 제조·보급 및 시헌력(時憲曆)의 제정·시행 등에 착안하고 노력하는 한편, 《유원총보 類苑叢寶》·《황명기략 皇明紀略》·《종덕신편 種德新編》·《송도지(松都誌)》 등을 저술, 간행하기도 하였다.
    3. 효종대의 관력과 활동
    1649년 5월 효종의 즉위와 더불어 대사헌이 되고 이어서 9월에 우의정이 되자, 대동법의 확장시행에 적극 노력하였다.
    그러나 대동법의 실시를 반대하는 김집(金集)과의 불화로 인하여 이듬해 1월에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로 물러앉아 다시 진향사(進香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71세의 늙은 몸을 무릅쓰고 중국에 다녀온 뒤, 잠시 향리에 머무르다가 이듬해 1월에 영의정에 임명되고, 겸하여 실록청총재관(實錄廳摠裁官)을 맡았다. 대동법의 확장 실시에 또다시 힘을 기울여 충청도에 시행하는 데 성공하였고, 아울러 민간에 주전(鑄錢)을 허용하는 데도 성공하였다.
    그리고 12월에는 원임(原任) 정태화(鄭太和)가 영의정에 복귀함에 따라 좌의정으로 물러앉아 지내면서도 대동법 시행에 따른 몇 가지 문제점을 개선하는 한편, 《해동명신록 海東名臣錄》을 저술하고 《인조실록》을 완성하기도 하였다.
    1654년 6월에 다시 영의정에 오르자 대동법의 실시를 한층 확대하고자 〈호남대동사목 湖南大同事目〉을 구상하고, 이를 1657년 7월에 효종에게 바치면서 전라도에도 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 건의에 대한 찬반의 논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그가 죽어 이 사업은 그의 유언에 따라서 서필원(徐必遠)에 의하여 뒷날 성취되었다.
    4. 저술·업적
    저술로는 그의 시·문을 모은 《잠곡유고 潛谷遺稿》(11권 10책)·《잠곡별고 潛谷別稿》·《잠곡유고보유 潛谷遺稿補遺》·《잠곡속고 潛谷續稿》가 전하고, 앞에서 소개한 것 이외에 《천성일록 天聖日錄》·《청풍세고 淸風世稿》·《조천일기 朝天日記》·《기묘록 己卯錄》·《잠곡필담 潛谷筆談》·《당삼대가시집(唐三大家詩集)》 등이 전하며, 〈자네집에 술닉거든〉이라는 시조 1수도 전한다.
    이 중에서도 특히 《유원총보》는 우리나라의 학문적 역량을 키우기 위하여 편찬된 최초의 백과사전으로 주목되는 것이며, 《구황촬요》·《벽온방》·《종덕신편》 등은 목민자(牧民者)의 각성을 촉구하는 안민(安民)의 한 방책으로서, 그의 위민적(爲民的)생애의 편모를 보이는 저술이라고 하겠다.
    그는 이와같은 저술을 널리 보급하기 위하여 몸소 활자를 제작하고 인쇄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니, 이러한 사업은 그의 자손들대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가업(家業)으로 계승되어 우리나라 주자(鑄字)와 인쇄사업에 크게 기여하는 바 되었다.
    무덤은 경기도 양주 금촌리에 있다. 양근(楊根) 미원서원(迷源書院)과 청풍 봉강서원(鳳岡書院), 강동(江東) 계몽서원(啓蒙書院), 개성 숭양서원(崧陽書院) 등에 배향되고, 1704년(숙종 30)에는 가평의 선비들이 건립한 잠곡서원(潛谷書院)에 독향(獨享)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네비게이션주소 
     관리자(연락처) 

       경기도기념물 제177호
       청풍김씨문의공파묘역
       경기도 남양주시 삼패동 산 29-1번지 일원
       경기도 남양주시 삼패동 산 29-1번지 일원
       청풍김씨문의공파

     

     

     

     

     

     

     

     

     

     

    김육(1580~1658)묘역과 신도비

    김육(1580~1658)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실학적 성향의 학자이며 제도개혁을 추진한 정치가이기도 하다. 호는 잠곡(潛谷)·회정당, 본관은 청풍(淸風), 참봉 흥우의 아들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1605년(선조 38) 사마회시(司馬回試)에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1609년(광해군 1) 동료 태학생들과 함께 김굉필, 정여립, 조광조, 이언적, 이광 등 5현(賢)을 분묘 배향하자는 상소를 올렸다가 문과 응시 자격이 박탈당하여 가평군 잠곡(청덕동)으로 은거하기도 하였다.
      1623년 인조가 즉위하자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음성 현감으로 있을 때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정언에 임명되었다. 이후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후 예조참의 등을 거친 후 1638년 충청도 관찰사를 행할 때 충청도에 대동법을 적극 건의하였다.
      대사간, 형조판서, 이조판서, 개성부유수 등을 거쳐 1649년 5월 효종(孝宗) 즉위와 함께 대사헌이 되었고 곧 우의정에 되어 경기·충청지방에 대동법을 시행하였다. 71세에 영의정이 되고 실록청총재관을 겸해「인조실록」(仁祖實錄)을 완성했다. 중국에 수차례 다녀오면서 조선에 시헌력(時憲歷)의 제정, 수차(水車)의 제조 및 보급, 화폐(상평통보)주조와 유통에 노력 하였으며 서적 편찬 등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평생을 대동법 실시를 주창하였으며 그 시행으로 민폐를 덜고 국가 재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저서로『잠곡유고(潛谷遺稿)』,『잠곡별고(潛谷別稿)』,『잠곡유고보유(潛谷遺稿補遺)』,『잠곡속고(潛谷續稿)』가 전한다. 묘는 정경부인(貞敬夫人) 파평 윤씨와 합장하였는데, 주위에는 곡장을 둘렀고 묘 앞에는 묘비, 상석, 향로석, 장명등 그 좌우에는 망주석, 문인석, 등이 각각 배치 되어있다. 묘비는 1659년(효종 10)에 건립되었다. 신도비는 장방형의 비좌와 이수를 갖추었는데 그 규모가 매우 크고 조각이 정교하고 우수하다. 비문은 영의정 이경석(李景奭)이 글을 짓고 아들 김좌명(金佐明)이 글씨를 썼다. 1664년(현종 10)에 건립한 것으로 비문은 마모되어 전체적으로 판독하기가 어렵다.

    <남양주시 문화관광 사이트에서 인용>

     

     

     

     

     

     

     

     

     

     

     

     

     

     

     

     

     

     

     

     

     

     

     ▼ 김육선생과 김좌명선생의 신도비..

    ▼ 김육선생 신도비

     

     

     

    ▼ 김육선생 묘소

     

    ▼ 김육선생 묘 전경

    ▼ 김육선생 묘비

    ▼ 김육선생 묘 석물...

     

     

    ▼ 김육선생 묘 후경

    ▼ 김육선생 묘역과 김좌명선생 묘역을 잇는 터널 윗쪽  야생동물통행로..

    ▼ 마을 쪽에서 바라본 김육선생 묘

    ▼ 마을쪽에서 바라본 김좌명선생 묘

     




    ◐야초 실용풍수지리학회 강의 일정 안내

    강의 개설 장소

    강좌명

    강의 시간

    강의 기간

     수강신청 기간

    수강신청 연락처

    수강신청바로가기

    동방문화대학원

    대학교

    실용풍수지리

    (초급,중급)

    매주 목요일

    10시~13시(중급)

    14시~17시(초급)

    16주

    (1년과정)

     매년 학기 전

    (2월,8월)

    02- 3668-9890, 

    9871 ~ 2

    수강신청 바로가기

    성북문화원

    웰빙실용풍수

    매주 목요일 

    저녁 7시~8시30분

    12주

     분기(2월,

    5월,8월,11월)

    02- 765-1611

    수강신청 바로가기

    월곡1동 주민센타

    웰빙생활풍수

    기초과정

    매주 수요일 

    10시~12시

    12주

     매분기(3월,

    6월,9월,12월)

    02- 2241-5564

    수강신청 바로가기

    성북평생학습

    복을 부르는

    생활풍수

    매주 수요일 

    14시~16시

    12주

     매년 반기 전

    (2월,8월)

    02-2241-2420

    수강신청 바로가기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