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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남양주]청풍김씨문의공파 김식선생 묘 및 신도비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1. 10. 29. 10:00
청풍김씨문의공파 김식선생 묘 및 신도비
남양주 덕소지역은 묘가 많은 곳이다. 오며가며 수없이 묘들을 답사하고 공부하고 또 찾아가고 하는데도 다 못본 묘지가 또
나타나곤하여 이래저래 여러번 찾게 되는 곳이다. 청풍김씨 묘역도 입구의 김육,김좌명 신도비는 몇번 보고 돌아오곤 했지
그 안쪽의 다른 묘소까지 답사할 엄두가 안나서 그냥 지나치곤 했는데 이번에 청풍김씨 문의공파 묘역 일원을 한번 돌아
볼 심산으로 혼자서 길을 나섰다. 특히나 그곳에 최근에 옮겨온 김석주선생의 묘가 있다고 해서 그 묘를 찾기위해 찾아갔
는데 아예 묘역 전체를 천천히 맘먹고 돌아봤다. 다 소개할 수는 없고 그 중 몇 분 묘만 소개하기로 한다.
김식(金湜)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1482년(성종 13)∼1520년(중종 15). 조선 중종 때의 문신·학자.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노천(老泉), 호는 사서(沙西)·동천(東泉) 또는 정우당(淨友堂).
생원 숙필(叔弼)의 아들로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서울에서 자랐으며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학문에 열중하여 1501년(연산군 7)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는 관심이 없었고 성리학연구에만 몰두하였다.
그뒤, 정치적 분위기를 일신하려는 시대적 추이에 따라, 조광조(趙光祖)·박훈(朴薰) 등과 함께 성균관과 이조판서 안당(安瑭)의 천거로 종6품직인 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에 서용되었으며, 이어 형조좌랑·호조좌랑·지평·장령 등을 역임하였다.
1519년 4월 조광조·김정(金淨) 등 사림파의 건의로 실시된 현량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당시 현량과의 천거명목에는 성품·기국·재능·학식·행실·행적·생활태도 또는 현실대응의식 등의 일곱가지가 있었는데, 급제자 28명 가운데 유일하게 이 7개 항목 모두를 완벽하게 평가받았다. 이는 당시 사림들로부터의 두터운 신뢰를 얻고 있었고, 또 중앙에 이미 진출해 있던 사림파 중에서도 조광조에 버금갈만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었음을 뜻한다.
그리하여 그는 급제자 발표 닷새 만에 성균관사성이 되었고, 며칠 후에는 홍문관직제학에 올랐는데, 그것은 현량과 실시일로부터 겨우 보름 사이의 일이었다.
그런데도 이조판서 신상(申鏛)과 우의정 안당은 이에 만족하지 못하여 대사성에 추천하였으나 중종은 이들의 주청을 물리치고 홍문관부제학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신상과 안당의 재차 상계(上啓)에 의해 마침내 대사성에 임명되었다. 그해 11월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절도안치(絶島安置)의 처벌이 내려졌으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등의 비호로 선산(善山)에 유배되었다.
뒤따라 일어난 신사무옥에 연좌되어 다시 절도로 이배된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거창에 숨었다가 〈군신천재의 君臣千載義〉라는 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기묘사화 후에 현량과가 폐지되면서 그의 직첩과 홍패도 환수되었으나 명종 때 복관되었으며, 그뒤 선조 때에 이조참판을 거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는 당시 사림의 영수로 숭앙받던 조광조와 학문적·인간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러한 연결을 바탕으로 하여 그는 훈구세력 제거에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조광조와 함께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해 개혁정치를 폈는데, 그 내용으로는 미신타파, 향약 실시, 정국공신(靖國功臣)의 위훈삭제(僞勳削除) 등을 들 수 있다.
그의 문인으로는 신명인(申命仁)·오희안(吳希顔)·목세칭(睦世秤)·김윤종(金胤宗)·조경(趙瓊)·홍순복(洪舜福)·윤광일(尹光溢)·이세명(李世銘)·신영(申瑛)·김덕수(金德秀) 등이 있다.
시호는 문의(文毅)이다. 양근(楊根)의 미원서원(迷原書院), 청풍의 황강서원(凰岡書院), 거창의 완계서원(浣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네비게이션주소 관리자(연락처) 경기도기념물 제177호 청풍김씨문의공파묘역(김식 묘역과 신도비) 경기도 남양주시 삼패동 산 29-1번지 경기도 남양주시 삼패동 산 29-1번지 청풍김씨문의공파
김식(金湜: 1482~1520)묘역과 신도비
김식(金湜: 1482~1520)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성리학자이다. 호는 사서(沙西)·정우당(淨友堂)·동천(東泉), 생원 숙필(叔弼)의 아들이며 시호는 문의(文毅)이다. 1501년(연산군 7)에 진사가 되고 이조좌랑, 장령 등을 역임하고 1509년(중종 14) 현량과에 장원급제하였으며 부제학 대사성에 올랐다. 조광조, 김안국 등과 교우하면서 도학 소장파를 이루어 유교로써 왕도정치 구현을 주장하며 제도개혁과 민중교화에 힘썼다. 그러나 개혁 의도가 급진적이었으며 과격한 정치로 기묘사화로 큰 화를 입어 선산으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후에 신사무옥에 연좌되어 다시 오지의 섬으로 유배된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거창으로 피신하다가「군신천재의(君臣千載義)」라는 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조광조, 김정 등과 함께 기묘팔현(己卯八賢)의 한사람으로 일컬어지며 후에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양근(陽根)의 미원서원(迷原書院), 청풍(淸風)의 황강서원(凰岡書院) 그리고 거창의 완계서원(浣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묘는 삼패동 소쿠리마을 산기슭에 정경부인 전주 이씨와 쌍분으로 남서향하고 있으며 봉분 앞 묘표는 1659년(효종 10)9월에 세워졌으며 김좌명이 지었다. 신도비는 묘역 아래 동남향하고 있는데 1662년(현종 3)에 세워진 것으로, 비문은 대제학 조경(趙絅)이 짓고, 김좌명(金佐明)이 쓰고 전을 하였다. 또한 묘정비(廟庭碑)가 세워져 있는데 이 비는 본래 선생이 선산으로 유배되어 갔을 때 후학들이 따라가 학문을 수련하면서 세웠던 것으로 기묘사화로 화를 당하자 땅속에 묻혔다가 근래 후손들이 발굴해 이곳에 옮겨 세웠다. 비문은 황경원(黃景源)이 짓고, 이운영(李運永)이 쓰고, 9대손 김시묵(金時)이 전을 하였다.
<남양주시 문화관광 사이트에서 인용>▼ 김식선생 신도비.. 지금은 사람의 발길이 잘 닫지 않은 곳에 있으나 그 옛날에는 이곳으로 사람의
왕래가 많은 곳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강변도로로 사람이 차단되고 차들만 생생 소리내며 달린다.
▼ 김식선생 신도비 전면
▼ 김식선생 신도비.. 신도비가 대리석으로 되어있는 것은 글자판독이 매우 어렵다..
▼ 신도비 내용 중에 김식선생 이름이 나오는 곳 확대.. 혼자서 답사를 할 때는 이런 것을 일일이
확인해야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사전지식을 갖고가면 이런데서 시간을 벌 수 있다.
▼ 김식선생 묘소 전경
▼ 김식선생 묘비
▼ 김식선생 묘비 뒷면
▼ 김식선생 묘 후경... 좌측 청룡쪽에 있는 묘가 모친 묘다..
▼ 김식선생 묘 입수..
▼ 김식선생 묘 현무봉...
▼ 속기처에서 바라본 현무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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