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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용인]홍계희 묘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1. 11. 15. 10:00
홍계희 묘
홍계희 묘는 용인, 광주답사 때 가려고 했으나 다른 묘들과 떨어진 외진 곳에 위치해있어 매번 지나쳤는데 이곳도 자투리
시간을 내서 용인에 가는 길에 다녀왓다. 입구까지 가서도 한참을 헤매다가 겨우 찾았다. 누구한테 물어봐도 잘 모르
거나 시원스럽게 답이 나오지 않아 그냥 찾는 편인데 묘역이 보이면 쉽지만 언덕에 가려있거나 산에 가려있으면 찾기
가 쉽지않다. 이곳도 횽계희 묘역은 안쪽 깊숙한 곳에 있어서 사전 지식이 없으면 찾기 힘들다.
그래서 내가 다녀온 곳은 꼭 찾기 쉬운 지점까지 네비게이션 번지를 입력해 드리니 잘 참고하시길...
홍계희(洪啓禧)
1703년(숙종 29)∼1771년(영조 4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순보(純甫), 호는 담와(淡窩). 아버지는 참판 우전(禹傳)이며, 어머니는 대사헌 이상(李翔)의 딸이다. 이재(李縡)의 문인이다.
1. 행적과 관력
1737년(영조 13)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정언이 되고,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의 천거로 교리로 특진되었다. 이어 수찬을 거쳐 1742년 북도감진어사(北道監賑御史)로 파견되어 함경도의 진정(賑政)을 살폈고, 이듬해 다시 북도별견어사로 파견되었다.
이때 그 지방의 지형과 물정을 상세히 수록한 지도를 작성 복명함으로써 영조의 칭찬을 받았고, 또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의 추천으로 공조참의가 되었다.
그러나 1743년 부사과로 있으면서 함경감사 박문수(朴文秀)의 부정혐의를 탄핵하였다가 당색으로 공격하였다는 의심을 받아 삭직되었다.
이듬해 승지로 특채되고, 이어 1748년 일본 막부의 9대장군 도쿠가와(德川家重)의 승습을 축하하기 위한 통신상사(通信上使)로 차정되어 부사 남태기(南泰耆), 서장관 조명채(曺命采) 등 일행 500여명을 이끌고 일본에 다녀왔다.
그뒤 형조참판이 되고,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의 청으로 비변사당상을 겸하였다.
1749년 충청도관찰사 때 시무의 능력을 인정받아 다음해 병조판서로 발탁되어 영의정 조현명과 함께 균역법 제정을 주관하여 균역사목(均役事目)을 작성, 시행하게 하였다.
그러나 균역법이 시행상 문제가 많다는 중신들의 비난을 받고 지중추부사로 물러났다가 광주유수(廣州留守)로 출보되었으며, 1754년 이조판서로 재기용되었다. 이후 형조·병조·호조의 판서 및 예문관대제학을 역임하였다.
1762년 경기도관찰사로 있으면서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잘못을 고변하게 함으로써 세자가 죽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뒤 이조·예조의 판서를 거쳐 판중추부사로서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2. 정치관
그는 유학자로 자처하였으나 그보다는 시무에 밝고 경세치용(經世致用)에 많은 관심을 보인 개혁실천주의자였다. 이는 그가 젊어서 《반계수록(磻溪隨錄)》을 읽고 유형원(柳馨遠)의 개혁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1749년 충청도관찰사로 있으면서 올린 시폐개혁안에는 과거제를 철폐하고 명나라의 관리임용제도의 도입을 주장한 과제조(科制條), 한천소시(翰薦召試)의 철폐와 대간제도의 개선책을 제시한 관제조(官制條), 5군영을 철폐하고 훈련도감과 어영청만을 두되 정병(正兵)의 수를 늘리자는 군제조(軍制條), 양역(良役)의 모순을 시정하려 한 균역조(均役條) 등 네 가지가 담겨 있다.
이 중 세 가지는 조신(朝臣)들에 의해 모두 거절되고 군역조만이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 내용은 양역의 폐단이 양반의 불취역(不就役)에 있다고 보고, 민생의 구제와 국가재정의 확보를 위하여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양반에게 군포(軍布)를 내게 하여 양역에 충당한다는 유포론(遊布論)이었다. 이는 사림의 맹렬한 비난으로 취소되고, 대신 경제력을 나타내는 전결(田結)에 부과되는 결포론(結布論)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러나 이 결포제도 대부분이 지주인 관료층의 반대로 실현되기는 어려워, 결국 토지 1결에 2두(斗)의 결미(結米)내지 결전(結錢)의 형태로 균역법에 부분적으로 반영되었다.
3. 정치성향과 저서
그 스스로는 노론 이재의 문인이라 하였으나, 대다수의 이재 문인으로부터 배척당하였다. 한때는 조현명·송인명·김재로 등 탕평파에 접근, 출세하였으나 후일 조현명과 불화하고, 영의정 김상로(金尙魯), 형조판서 윤급(尹汲), 참판 이기경(李基敬) 등과 한무리가 되어 영조 계비의 아버지 김한구(金漢耉)와 내통하는 등 권력을 좇아 반복무상한 관계로 사림들로부터 소인 내지 간신으로 지목되었다.
죽은 뒤 문간(文簡)이라 시호되었으나, 정조 즉위 후 두 손자의 정조시해미수사건으로 그의 두 아들(趾海·述海) 및 일가가 처형당하게 되자, 그도 관작이 추탈되고 역안(逆案)에 이름이 올랐다. 이재의 뇌암서재(雷巖書齋)에 배향하자는 충청도 유생의 논의가 있었으나, 이재 문인의 반대로 유산되었다.
글씨에도 능하였으며, 저서로는 《삼운성휘 三韻聲彙》가 있고, 편저로는 《균역사실 均役事實》·《준천사실 濬川事實》·《균역사목변통사의 均役事目變通事宜》·《국조상례보편 國朝喪禮補編》·《해동악장 海東樂章》·《명사강목 明史綱目》·《경세지장 經世指掌》·《문산선생상전 文山先生詳傳》·《주문공선생행궁편전주차 朱文公先生行宮便殿奏箚》·《사곡록 寺谷錄》·《창상록(滄桑錄)》 등이 있다.<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네비게이션주소 관리자(연락처) 용인시 향토유적 제37호 홍계희 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일산리 산2-1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일산리 409-2(입구) 반남박씨
홍계희(洪啓禧)의 묘소는 모현면 일산리 개일마을에 있다. 묘역은 약 80평으로, 묘앞에는 상석, 묘비(墓碑), 석등(石燈)이 있다. 그리고 좌우에는 양석(羊石), 망주석, 문인석 등의 석물이 배치되어 있다. 묘비는 영조 48년(1772)에 건립된 것이다. 묘비는 팔작지붕의 개석이 있으며, 크기는 비신(碑身)의 높이 150㎝, 폭 57㎝, 두께 27㎝이고, 대석은 높이 52㎝, 폭 110㎝, 두께 80㎝이다. 홍계희(1703-1771)는 조선 영조 때의 문신으로 자는 순보(純甫), 호는 담와(淡窩),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영조 13년(137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한 후 정언(正言), 수찬(修撰)을 거쳐 1742년 북도(北道) 감진어사(監賑御使)로 나가 공을 세웠고, 이듬해 북도 별견어사(別遣御使)를 역임했다. 이후 통신사(通信使)로 일본에 다녀와 충청도 관찰사, 병조판서에 올라 균역법(均役法)을 실시 하는데 힘썼다. 그 후 이조판서, 한성부 판윤(漢城府 判尹)을 거쳐 편집 당상(編輯堂上)으로『열성지(列聖誌)』를 증보하는 한편, 왕명으로『해동악(海東樂)』을 지었다. 관직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봉조하(奉朝賀)에 이르렀다. 글씨를 잘 썼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저서로『삼운성휘(三韻聲彙)』『준천사실(濬川事實)』『균역사실(均役事實)』『경세지장(經世指掌)』『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사곡록(寺谷錄)』등이 있다..
<용인시 문화관광 사이트에서 인용>▼ 홍계희 묘 안내도...
▼ 홍계희 묘역.. 역광이라 사진이 흐리다..
▼ 홍계희 묘비...
▼ 오후에 답사를 했는데.. 뒷쪽 언덕이 높고 묘는 와혈에 가깝게 되어있어서 그늘이 많이진다.
▼ 홍계희 묘는 민가에 근접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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