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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성남]금릉 남공철묘역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2. 3. 22. 10:00

    금릉 남공철묘역


    청계산 등산 시 정일당 강씨 묘와 남공철선생 묘를 가지 못하고 내려와서 바로 다음 주에 답사계획을 하여 

    다녀왔다.  다른 곳과 다르게 이곳은 산 깊숙히 묘역이 있어 한번 다녀오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고 체력이 

    많이 소모되어 그 뒤의 다른 답사에 지장을 줄 정도였다. 다음번 답사하시는 분들은 참고하시길... 

    그래서 추천하고 싶은 것은 금토동에 있는 묘만 별도로 청계산 등산과 연계하여 다녀오시고 나머지 묘들은 

    별도로 답사하시길... 같이 묶어서 하다보니 다리가 풀려서 더이상 답사하기 힘들더라구요...ㅎㅎ

    이곳은 알고서도 찾기 힘든 곳입니다. 지도상에서는 명확히 보이지만 현장에서는 묘까지 올라가기도 

    힘듭니다. 그래서 자세히 설명을 해놓았으니 참고하시길...

    남공철(南公轍)
    1760년(영조 36)∼1840년(헌종 6). 조선 후기 문장가‧정치가.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원평(元平), 호는 사영(思穎)‧금릉(金陵). 서울 출신. 아버지는 대제학 남유용(南有容)이다.
    1780년(정조 4) 초시에 합격하고, 1784년에 아버지가 정조의 사부였던 관계로 음보로 세마를 제수받았고, 이어 산청과 임실의 현감을 지냈다.
    1792년에 친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곧 이어 홍문관부교리‧규장각직각에 임명되어 《규장전운(奎章全韻)》의 편찬에 참여하면서 정조의 지극한 우대를 받았다.
    초계문신에 선임되었으며, 친우이자 후일의 정치적 동지인 김조순(金祖淳)‧심상규(沈象奎)와 함께 패관문체를 일신하려는 정조의 문체반정운동에 지목되어 그뒤 순정한 육경고문(六經古文)을 깊이 연찬함으로써 정조치세에 나온 인재라는 평을 받았다.
    정조 때에는 주로 대사성으로서 후진교육문제에 전념하였다. 순조 즉위 뒤 《정종실록》 편찬에 참가하였으며, 아홉번씩 이조판서를 제수받고,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1807년(순조 7)에는 동지정사로서 연경에 다녀왔고, 1817년에 우의정에 임명된 뒤 14년간이나 재상을 역임하였으며, 1833년에 영의정으로 치사하여 봉조하가 되었다.
    평소에 김상임(金相任)‧성대중(成大中)‧이덕무(李德懋) 등과 친하게 지내면서 독서를 좋아하였고, 경전의 뜻에 통달하였다. 구양수(歐陽修)의 문장을 순정(淳正)한 법도라 하여 가장 존중하였고, 많은 금석문‧비갈을 남긴 당대 제일의 문장가였다.
    순조‧익종의 《열성어제(列聖御製)》를 편수하였고, 저서로는 《고려명신전(高麗名臣傳)》, 자편의 시문집으로 《귀은당집(歸恩堂集)》‧《금릉집》‧《영옹속고(穎翁續藁)》‧《영옹재속고(穎翁再續藁)》‧《영은문집(瀛隱文集)》 등이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네비게이션주소 
     관리자(연락처) 

       성남시 향토유적 제4호
       금릉 남공철묘역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 산66
      묘역입구의 벌통있는 곳에서 길따라 가면 폐사지가 나오고 그곳에서 왼편
       의령남씨


     

     

     

     

     

    금릉 남공철(1760∼1840)선생은 조선후기 정치가·문장가이며, 본관은 의령, 자는 원평, 호는 사영·금릉이며 시호는 문헌이다. 아버지는 대제학을 지낸 유용이다. 1817년 우의정에 임명된 뒤 1833년에 영의정을 그만 둘 때까지 14년간 재상을 역임하였다.
    그는 평소 독서를 좋아하여 경전에 통달하였고, 구양수의 문장을 올바른 법도라하여 가장 존중하였다.
    순조 · 익종의「열성어제」를 편수하였고, 저서에「고려명신전」, 시문집으로「귀은당집」·「금릉집」·「영옹속고」· 「영옹재속고」·「영은문집」등 많은 신도비와 비갈을 남긴 당대 제일의 문장가였다.
    묘역은 수정구 금토동 산 66번지에 있으며 원형의 봉분은 용미와 활개가 없으며,영의정의 지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인석과 신도비를 갖추지 채 검소하다.봉분과 석물은 옛 형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고, 특히 비석은 당나라 '안진경체'를 집자하여 제작한 것이며, 서예사의 '전사자체' 창안자로서 금석학에 귀중한 자료가 될 정도로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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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남시 문화관광사이트에서 인용>

     

     

     

     

     

     

     

     

     

     

     

     

     












    ▼ 약3km 전방에 정일당 강씨 묘역과 같이 안내판이 있다. 남공철선생 묘역은 찾기가 어렵다.

    ▼ 위 번지를 검색하면 금릉 남공철묘역이 나옵니다. 길을 따라 끝까지 가면 입구가 보입니다. 

    왼편 청계산 산행안내판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 금릉 남공철묘 가는 길을 표시하였습니다. 최근에 건물이 들어선 모양인데 이 지도를 참고하여 찾으면 

    쉽게 갈 수 있을거라 생각됩니다.

    ▼ 금릉 남공철 선생 묘 전경..

    ▼ 금릉 남공철 선생 묘 안내판.. 빛이 반사되어 촬영이 잘 안된다.

    ▼ 금릉 남공철 선생 묘 입구에서 바라다본 묘역

    ▼ 금릉 남공철 선생 묘... 문인석도 없이 아주 단촐하다.. 무려 14년간이나 재상에 있으면서도 문인석 조차 

    없다니... 그런데 묘 봉분이 허물어지는 걸 보니 이는 시급히 보수를 해야할듯...

    ▼ 금릉 남공철 선생 묘비..

    ▼ 금릉 남공철 선생 묘 망주석..

     

    ▼ 금릉 남공철 선생 묘 후경.. 금릉선생 묘 뒤에 있는 묘는 묘비가 없어서 알 수는 없으나 인근에 계신 분의 

    말씀을 들어보니 금릉선생의 어머니 묘라고 한다.

    ▼ 금릉 남공철 선생 묘를 가려면 이곳 벌통을 지나야 한다. 걸어서 가야한다.

    ▼ 길따라 가다보면 폐사지처럼 축대만 남은 평지를 만나는데 이곳 중앙에 있는 계단을 들어서자마자 

    바로 왼편으로 꺾어 소로길  따라 가야한다. 그곳에서 바라보면 왼편에 사진처럼 소나무 몇 그루가 보이는 

    곳이 금릉선생 묘역이다..

    ▼ 소로길 따라가다보면 이와같이 배수로가 보이는데 이곳으로 진입한다. 제대로 된 길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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