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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안산]영의정 김류 묘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2. 4. 13. 10:00

    영의정 김류 묘

    김여물장군 묘 윗쪽으로 영의정을 역임한 아들 김류 묘가 있다. 이것도 정보여서 김여물 장군 묘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쉽게

    찾을 수 있지만 아들 김류선생 묘는 지식이 없으면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서 찾아갈 수가 없다. 먼저 다녀오신 분들이 소개

    하여 그 위치를 가늠하고 이번 답사에서 함께 찾을 수 있었다.

    내가 한 1년여 묘지 답사기를 올리면서 느낀 거지만 사람들이 남의 정보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것 같다. 

    인터넷에 있는 지식을 그냥 무료로 쓰다보니 개인의 작품이나 심혈을 기울인 정보까지도 그냥 공짜로 쓸려고 하는것 같다.

    지적 소유권은 인정하면서 정당하게 대가를 지불하고 써야하는 시대가 되었다. 물론 내 글은 무료로 개방해놓은 거니까

    그냥 읽는 것은 아무 부담이 없다. 그러나 사진을 올리고 글을 올리고 어떤 정보를 올리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주관을 갖고서

    시간과 돈을 들여서 정보를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무료로 이용하지만 이용하시는 분들은 그 뜻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나도 능원묘답사에 대해 선배님들의 글을 많이 참조하고 있다. 그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전한다.

    김류(金瑬)
    1571년(선조 4)∼1648년(인조 2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관옥(冠玉), 호는 북저(北渚). 아버지는 증영의정 김여물(金汝岉)이다.
    1. 관력
    음사(蔭仕)로 참봉에 제수되었다가, 1596년(선조 29)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에 임명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복수소모사(復讐召募使) 김시헌(金時獻)의 종사관으로 호서‧영남 지방에서 활약했으나, 그의 아버지가 전사한 탄금대 아래에서 기생을 끼고 풍악을 벌여 놀아났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1598년에 파면되었다.
    1601년 모함이 풀려 예문관검열로 복직되고 대교(待敎)‧주서(注書)‧봉교(奉敎) 등을 역임하였으나, 1602년 정인홍(鄭仁弘)이 사헌부를 담당하자 다시 전의 일로 파직되었다. 그해 봉교로 복직되어 형조좌랑에 승진되었다.
    그러나 이후 외직으로 밀려나 충청도도사‧전주판관 등을 역임하였다.
    1610년(광해군 2)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부교리를 지내고 외직으로 나가 강계부사를 역임하였다.
    1614년 대북정권 아래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되어 동지사(冬至使)‧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2. 인조반정 후의 행적 및 관력
    1617년 북인들로부터 임금도 잊고, 역적을 비호한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아 쫓겨났다.
    1620년 이귀(李貴) 등과 반정을 꾀하였으나 미수에 그치자 다시 1623년 거의대장(擧義大將)에 추대되어 이귀‧신경진(愼景禛)‧이괄(李适) 등과 인조반정을 일으켰다. 이 반정의 공로로 병조참판에 제수되고 곧 병조판서로 승진되어 대제학을 겸하는 동시에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반정의 주류들간의 갈등으로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병조판서로서 남행(南幸)하는 인조를 호가하였다. 난이 평정된 뒤 우찬성을 거쳐 1624년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가도에 있던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을 찾아가 그의 횡포를 막고 명나라 사신의 반송사(伴送使)가 되어 그들의 불만을 시문으로써 회유하여 존경을 받는 등 외교에도 일가견을 보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도체찰사(都體察使)인 장만(張晩) 밑에서 부체찰사로서 먼저 강도(江都)로 인조를 호종하였다. 환도 후 장만‧김자점(金自點) 등과 청천강 남쪽의 안주(安州)를 중심으로 하는 도체찰사 중심의 적극적인 방어체제 구축을 주장하였다. 그해 우의정에 승진되고 이듬해에는 유효립사건(柳孝立事件)을 처리했으며 진휼상사(賑恤上使)로서 기민구제에 노력하였다.
    한편,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군령권을 장악하는 동시에 총융사 이서(李曙), 찬획사(贊劃使) 이경직(李景稷)을 대동하여 여러 산성을 순시하고 그 도형(圖形)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1629년 좌의정이 되었으며 그 이듬해 정원군(定遠君)의 추숭문제에서 반대의 주장을 펴, 일시 관직에서 물러났다.
    3. 병자호란 시의 활동
    1633년 다시 좌의정으로 올라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령권까지 겸하였으며, 뒤에 우의정으로 옮겼다.
    그러나 다시 정원군 추숭문제가 제기되자 역시 예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강력하게 반대하여 인조의 노여움을 사 1634년 다시 면직되었다.
    1635년 전국에 교서를 내려 ‘화친을 끊고 방어를 갖출 것’을 선언하였다. 이해 다시 4도 도체찰사로 임명되어 청나라와의 관계악화 방지에 대비하였다.
    그뒤 영의정이 되어 국정권도 아울러 장악하였다.
    한편, 도체찰사로서 전국 각도의 속오군(束伍軍) 2만을 정선하여 사전에 대비할 것을 청하고 종래 구상해왔던 안주 중심의 방어체제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안주가 무너지는 경우를 대비하여 평양‧황주‧평산의 방어선을 구축하고 그곳의 산성에 주된 병력을 배치하였다.
    1636년 청나라가 병자호란을 일으켜 아군의 편제된 산성 중심의 방어체제를 미리 알고 도성을 직접 공격해오자 강도로 인조를 피하게 하려 하였다.
    그러나 의론이 엇갈린 가운데 적은 이미 서울 교외에까지 진출하여 인조를 비롯한 군신은 남한산성으로 피하게 되었다.
    이듬해 강화도마저 함락되자 주화파의 뜻에 좇아 삼전도에서 성하의 맹약을 맺는 데 주도적 구실을 하였다.
    1644년 심기원(沈器遠)의 모역을 신속하게 평정한 공으로 다시 영의정이 되어 영국공신(寧國功臣) 1등에 녹훈되고 순천부원군(順天府院君)에 책봉되었다. 청나라에 볼모로 가 있던 왕세자의 환국을 주장하는 한편, 영춘추관사로서 실록의 수정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대사헌 홍무적(洪茂績) 등에 의하여 탄핵을 받자 병을 칭하고 사직하였으나 이듬해 다시 영의정으로 복위되었다. 이해 청나라에서 돌아온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죽자 세제인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왕세자로 책봉할 것을 주장하고 스스로 세자사(世子師)가 되었다.
    1646년 소현세자의 빈인 강씨(姜氏)의 옥사가 일어나자 이에 반대하다가 사직한 뒤 다시는 벼슬을 하지 않았다.
    4. 학문
    학문은 서인계열이 대개 그러하듯이 이이(李珥)‧성혼(成渾)의 계열을 이었으며, 특히 송익필(宋翼弼)을 사사했다. 반정에 성공한 뒤 노서(老西)‧소서(少西)로 갈리자 신흠(申欽)‧오윤겸(吳允謙) 등과 더불어 노서를 주도하였으나 될 수 있는 한 서인과 남인을 같이 쓰려고 노력하였다. 문장은 기력(氣力)을 숭상하고 법도가 엄격하였으며 시‧율도 역시 정련청건(精鍊淸健)하고 글이 또한 기묘하여, 공경(公卿)의 비문도 많이 썼다.
    저서로는 《북저집》이 전한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관리자(연락처) 

       미지정(김류선생 영정-안산시 향토유적 제7호)
       영의정 김류 묘(김여물 子)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와동 141번지(김여물 묘 우상측 100미터)
       순천김씨

     

     

     

     

     

     

     

     

     

     

    김류선생 영정

    김류는 조선중기의 공신으로 자는 관옥(冠玉)이며 호는 북저(北渚)이고 시호는 문충(文忠), 여물(汝 )의 아들이다. 그의 초상은 정사공신(靖社功臣)에 책록될 당시 그려진 것을 모본으로 하여 영의정에 올랐을 때 모사한 화첩본으로 보인다. 좌측에 "仁祖大王反正一等功臣領議政昇平府院君金 大臣撮形象" 이란 명문이 있다. 촬형상(撮形象)이라고 한 것은 전신 중에서 일정 부위만을 묘사하는 화법을 지칭하는 것으로 풀이되는데 특히 목 위로 치켜 올려진 단령의 형태 등이 당시의 공신도상(功信圖像)의 특징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이 초상화는 좌안칠분면(左顔七分面)으로 안면 윤곽은 진한 갈색선으로 잡고 주조색은 밝고 엷은 살빛으로 강약으로 주어 명암을 나타내고 있다. 지본설채인 이 초상화는 부분적이기는 하나 어깨의 선처리 등에서도 17세기 초상화의 양식적인 특성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안산시 문화관광사이트에서 인용>

     

     

     

     

     

     

     

     

     

     

     

     

     

    ▼ 김여물장군, 아들 김류 신도비

    ▼ 김여물장군 신도비가 있는 공원에서 바라본 광덕산

    ▼ 김류선생 신도비(오른쪽)

    ▼ 김류선생 신도비

    ▼ 김류선생 신도비

     

    ▼ 영의정 김류 묘 전경

    ▼ 광덕산 아래 공원묘지.. 처음에 길을 잘못들어 이곳으로 갔었다.. 이곳에서 오른쪽 언덕에 있다.

    ▼ 김여물장군 묘 청룡쪽 망주석에서 보면 이 묘가 보이는데 이 묘의 상석 앞을 지나서 올라간다.

    ▼ 영의정 김류 묘가 있는 능선.. 잎이 나기 전에는 이렇게 묘역이 보여서 찾을 수 있다.

    ▼ 영의정 김류 묘 ... 뒤에 광덕산이 보인다..

     

    ▼ 영의정 김류 묘표... 처음에 이 묘역이 맞는지 의심쩍었으나 이 묘표를 보고 무척 반가웠다..ㅎ

    ▼ 영의정 김류 묘표 뒷면

    ▼ 영의정 김류 묘 석물

     

    ▼ 영의정 김류 묘 후경... 주산, 안산이 모두 금성체로 武, 富의 기운을 많이 받는다.

     

    김경징(金慶徵)
    1589년(선조 22)∼1637년(인조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선응(善應). 아버지는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 김유(金瑬)이다.
    1623년 인조반정 때 세운 공으로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이 되고, 순흥군(順興君)에 봉해졌다.
    같은해 개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후에 도승지를 거쳐 한성부판윤이 되었는데, 이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도검찰사에 임명되어 강화도 수어의 임무를 띠고 부제학 이민구(李敏求)를 부장으로 삼고, 수찬 홍명일(洪命一)을 종사관으로 삼아 함께 부임하였다.
    이 섬에는 빈궁과 원손 및 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을 위시하여 전직‧현직 고관 등 많은 사람이 피난하였는데, 그는 혼자서 섬 안의 모든 일을 지휘, 명령하여 대군이나 대신들의 의사를 무시하였다. 그는 강화를 금성철벽(金城鐵壁)으로만 믿고 청나라 군사가 날아서 건너오지는 못할 것이라고 호언하며 아무런 대비책도 강구하지 않고 매일 술만 마시는 무사안일에 빠졌다.
    한편, 김포와 통진에 있는 곡식을 피난민을 구제한다는 명목 아래 배로 실어날라 정실이 있는 사람에게만 나누어주는 처사로 민심을 크게 잃었다.
    청나라 군사가 침입한다는 보고를 받고도 아무런 대비책을 세우지 않다가 적군이 눈앞에 이르러서야 서둘러 방어의 계책을 세웠으나 군사가 부족하여 해변의 방어를 포기하고 강화성 안으로 들어와 성을 지키려 하였다.
    그러나 백성들이 흩어져 성을 지키기 어렵게 되자 방어책임을 맡은 그는 나룻배로 도망하여 마침내 성은 함락되었다.
    대간으로부터 강화수비의 실책에 대한 탄핵을 받았는데, 인조는 원훈(元勳)의 외아들이라고 하여 특별히 용서하려 하였으나 대간의 탄핵이 완강하여 사사(賜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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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 영의정 김류 묘 아래에 있는 아들 김경징 묘

     

    ▼ 김경징 묘표

    ▼ 김경징 묘 석물

     

    ▼ 김경징 묘 후경

     

     

    ▼ 김경징의 손자(아들 김진표의 양자) 김노득 묘

    ▼ 김노득 묘

    ▼ 김노득 묘 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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