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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안산]청평부원군 한응인 묘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2. 4. 11. 10:00

    청평부원군 한응인 묘

     

    안산지역 묘지답사는 두차례 했는데 한응인 묘는 안산시내와는 조금 떨어져 있어서 가지 못했고 한번은 

    찾아갔으나 제대로 위치를 못찾고 돌아온 기억이 난다. 이번에 안산답사를 하면서 제일 먼저 한응인 묘역을 

    답사하였다.

    이른 아침에 찾아갔는데 묘역이 아침 햇살을 받아 신비롭게 보인다. 진입로가 없어서 밭을 가로질러 갔다.

    인근의 오태수 묘도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함께 답사를 하면 좋을듯 싶다.

    한응인(韓應寅)
    1554년(명종 9)∼1614년(광해군 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졸재(百拙齋)‧유촌(柳村). 부사직(副司直) 한경남(韓敬男)의 아들이다.
    1576년(선조 9) 사마시를 거쳐, 이듬해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에 뽑혔고, 곧이어 승정원주서‧예조좌랑‧병조좌랑‧지평‧정언을 지내고, 1584년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성균관직강을 거쳐, 1588년 선천군수로 부임하여 이듬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적발, 그 공으로 호조참의가 되고, 이어 도승지가 되었다.
    1590년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에 오르고, 정여립 모반을 고변한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1591년 예조판서에 승진하여 진주사(陳奏使)로 다시 명나라에 들어가 일본의 도요토미(豊臣秀吉)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하여 조선에 길을 빌려 달라는 사실을 고하여 명나라의 조선에 대한 의심을 풀게 하였다.
    이듬해 돌아오는 길에 의주에서 왜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개성에 이르자 피난길에 오른 선조를 만나 왕을 따라 다시 평양으로 갔다가, 제도도순찰사(諸道都巡察使)로 임진강 방어에 임하였다.
    그러나 가토(加藤淸正)의 유인작전에 속아 전군이 붕괴하자, 왕을 뒤따라 의주의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가 공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요동(遼東)에 건너가 원병(援兵)의 급속한 출병을 요구하였고, 12월 이여송(李如松)이 원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자 한어(漢語)에 능한 그는 접반관(接伴官)으로 이여송을 맞이하였다.
    이듬해 청평군(淸平君)에 봉해지고, 서울이 수복되자 질서회복에 힘썼으며, 호조판서로서 군량미 보급에 진력하였다.
    1595년 주청사(奏請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다음해 평안감사로서 당시 평안도에 있던 많은 명나라 장병과의 화합을 도모하였다.
    1599년 사은사(謝恩使)로 다시 명나라에 정유재란 때의 원군을 사례하고 돌아와서 우찬성에 올랐다.
    1600년 이조판서, 다음해 호조판서‧병조판서를 거쳐, 1605년 부원군(府院君)에 진봉되고, 1607년 우의정에 올랐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초서(草書)에 뛰어났으며, 저서로는 《백졸재유고》가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관리자(연락처)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3호
       한응인 묘역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사사동 111
       청주한씨


     

     

     

     

     

    한응인(1554-1614, 명종9-광해군6)은 부사직 경남(敬男)의 아들로 태어나 선조(宣祖)대에 활약 했던 문신으로서 초서에 뛰어났으며, 명에 4차례 다녀온 선조유교칠신(宣祖遺敎七臣)의 한사람 으로 자는 춘경, 호는 백졸제(白拙濟) 본관은 정주(淸州) 시호는 충정(忠靖)이며, 청평부원군 (淸平府院君)이다. 24세에 알성문과 병과에 급제한 후 여러관직을 거쳐 육조판서와 우의정을 역임하고 52세때인 1605년에는 부원군에 올랐으며, 54세에 우의정에 오른 뒤 다음해 선조로부터 영창대군을 보호하라는 유교를 받았는데, 광해군조(光海君朝)가 되자 계축옥사(癸丑獄事, 1613) 에 연루되어 관직을 삭탈당해 전리방귀(田里放歸)에 처해져서 안산에서 지내다가 이듬해 61세에 돌아가셨다. 신도비는 묘역의 50m 전방에 위치하고 있다.

    신도비는 비신, 우진각 지붕형의 가첨식(加添石)과 기대(基臺)로 구성되어있고, 규모는 비신이 79×23×179cm, 가첨석이 143×95×58cm, 기대가 145×100×59cm이다. 비문은 김류가 찬하고 한인급(韓仁及)이 글씨를 썼으며 김광현이 전액(篆額)을 하여 1642년에 건립되었다. 이 신도비 의 양식적 특징은 가첨석의 하단부 건물에 기둥석부와 지붕사이에 있는 공포(貢包)의 형상을 조각해 놓음으로써 압박감을 덜어주어 안정감있게 보이도록 한 것이다..

    <안산시 문화관광사이트에서 인용>

     

     

     

     

     

     

     

     

     

     

     

     

     

     

     






    ▼ 한응인 묘역... 서리가 내린듯 신비롭다

    ▼ 한응인 신도비각..

    ▼ 한응인 묘역 안내판

    ▼ 한응인 신도비

     

     

     

     

     

    ▼ 한응인 묘역 원경

     

    ▼ 한응인 묘역 앞에서...

    ▼ 한응인 묘역 안내판

    ▼ 한응인 행장

    ▼ 한응인 묘 전경

    ▼ 한응인 묘... 이른 아침에 찾아 해가 역광으로 비친다.

    ▼ 한응인 묘표

    ▼ 한응인 묘 근경

    ▼ 한응인 묘 석물

     

    ▼ 한응인 묘 측경

    ▼ 한응인 묘 후경

    ▼ 한응인 묘 조안산.. 고만고만한 산들이 편안하게 배치되어 있다...

     

     

    ▼ 한응인의 아버지 한경남 묘

    ▼ 한경남 묘 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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