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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안산]김여물 장군묘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2. 4. 12. 10:00

    김여물 장군묘

    안산지역 묘지답사에서는 성호 이익선생과 김여물장군 묘는 이미 한차례 다녀왔는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이번에는

    사세충렬문을 올랐는데 지난번에는 그곳으로 가지 않은것 같은데 도무지 기억이 없다. 묘를 올라가니 기억이 나는데

    그 윗쪽으로 아들 김류의 묘는 이번에 처음 가보게 된다.

    한번 간 곳도 제대로 기억을 못하니 이제는 기록을 그때그때 남겨놓지 않으면 나중에는 기억이 나지않아 올리고 싶어도

    안된다. 그래서 요즘은 다녀온 곳도 다시한번 가서 사진을 찍고 바로바로 올리는 중이다.

    다만 주소 등은 기억을 하지 못해 문화재에 나와있는 주소를 그대로 올리고 있고 내가 기억하고 고쳐 놓은 곳은 수정해서 올리

    고 있으니 이점 이해 바랍니다.

    김여물(金汝岉)
    1548년(명종 3)∼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충주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한 충신.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사수(士秀), 호는 피구자(披裘子) 또는 외암(畏菴). 평산 출신. 찰방 김훈(金壎)의 아들이고, 영의정 김유(金瑬)의 아버지이다.
    선조가 즉위한 1567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577년(선조 10)에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문무를 겸전했으나 성품이 호탕하고 법도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높은 벼슬자리에 등용되지 못하였다.
    충주도사(忠州都事)를 거쳐 담양부사를 지냈고, 1591년에는 의주목사로 있었으나, 서인 정철(鄭澈)의 당으로 몰려 파직, 의금부에 투옥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 유성룡(柳成龍)이 그가 무략에 뛰어난 것을 알고 옥에서 풀어 자기 막중(幕中)에 두려고 하였으나, 도순변사로 임명된 신립(申砬)이 그의 재능과 용기가 뛰어나고 충의로운 선비임을 알고 자기의 종사관으로 임명해줄 것을 간청하여 신립과 함께 출전했다.
    신립이 단월역(丹月驛: 현재의 충주 단월역)에 이르러 몇 명의 군졸을 이끌고 왜적의 북상로인 조령(鳥嶺)의 형세를 정찰할 때 상주(尙州)에서 패주해온 순변사 이일(李鎰)을 만나 조령 방어의 어려움을 알고 충주로 나아가 배수의 진을 치기로 결정했다.
    그는 이것을 반대하고 많은 적을 적은 수의 군사로 물리치는 데는 먼저 조령을 점령하여 지키는 것이 좋고, 그렇지 못하면 평지보다는 높은 언덕을 이용하여 왜적을 역습하는 것이 좋겠다고 강력히 주장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결국, 충주의 달천(㺚川)을 등지고 배수의 진을 치고 신립을 따라 탄금대(彈琴臺)아래에서 용전분투했으나 왜적을 당하지 못하여 강에 투신, 순국하였다.
    그는 충주싸움의 패배를 예견하고 아들 김유에게 “삼도(三道)의 근왕병(勤王兵)을 요청했으나 한 사람도 이에 응하는 자가 없다. 우리들이 힘을 다해 싸우나 아무런 도움이 없으니 안타깝다. 남아가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은 본시 바라는 바이지만 나라의 수치를 씻지 못하고, 또 장한 뜻이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고 한갓 재가 되어버리니 하늘을 우러러 한숨만 지을 뿐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또, 가족에게는 “내가 이곳에서 죽더라도 우리 일가는 모두 임금님의 행재(行在)로 가서 돕되 결코 난을 피하여 다른 곳으로 도망치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광해군초에 충절로써 정려(旌閭)되었으나, 인조반정 뒤에 종래의 포상에 의심스러운 데가 많다고 하여 고쳐진 일이 있으나 1639년(인조 17)에 그의 아들 김유의 청에 의하여 다시 정표(旌表)되었다.
    뒤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으며, 1788년(정조 12) 장의(壯毅)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리고 순조 때에는 신립 등과 함께 임진왜란 때 순의(殉義)한 충주 달천의 옛터에 제사를 지내 충절을 기렸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관리자(연락처) 

       안산시 향토유적 제4호
       김여물 장군묘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와동 141번지
       순천김씨

     

     

     

     

     

     

     

     

     

     

    조선시대의 충신. 자(字)는 사수(士秀), 호(號)는 피구자(披 子),외암(畏菴), 본관은 순천(順天), 성현도찰방(省峴道察訪) 훈(壎)의 아들이며 영의정(領議政) 류( )의 부친이다. 현 안산시 단원구 와동에 소재한 김여물의 신도비(神道碑)에는,「무릇 충신(忠臣)·열사(烈士)가 나라를 섬김은 국난(國亂)을 당했을 때 목숨을 바쳐 인(仁)을 이루는 데 있다. 하늘의 명 또한 위훈(偉勳)과 환업(煥業)으로써 그 자손을 반드시 창성하게 하니, 이것은 마치 상하가 서로 주고 받으면서 보답하는 것과 같다.

    이와같은 이치는 크게 밝아 조그마한 착오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니 군자는 이로써 천리(天理)가 없다고 탄식하는 말을 함부로 하지는 못하는 것이다.」라는 글귀로 시작 그의 대인(大人)으로서 의 공평무사한 행적과 애국의 단성(丹誠)이 새겨 있는데, 이 신도비는 김상헌(金尙憲)이 찬(撰)한 것이다. 김여물은 어렸을 때부터 병서(兵書)에 밝아 20세(1567)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30세에 대과(大科)에 합격하였다. 호조(戶曹)·예조(禮曺)·병조(兵曹) 등의 좌랑 (佐郞)을 거쳐, 정랑(正郞)으로 승전되고 충주군사(忠州郡事)등을 역임하였다.

    선조 24년(1591) 의주목사(義州牧使)로 있을 때 서인(西人) 정철(鄭澈)의 당(黨)으로 몰려 파직 투옥되었다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신립과 함께 왕의 특명으로 충주(忠州)의 방어를 나섰다. 김여물은 신립에게 새재의 고수를 주장하였으나 신립은 듣지 않았고 마침내 왜적에게 새재를 내주고 말았다. 또 불리하면 중앙으로 가서 한양을 지켜야 한다고 하였으나 신립은 또 듣지 아니하였으니, 김여물은 미리 패할 것을 알았다.

    우리 군사가 패하자 신립이 김여물에게 묻기를, "공은 살기를 원하오" 하니 김여물은 웃으면서 "내 어찌 죽음을 아끼리오" 하고, 함께 탄금대(彈琴臺) 아래 이르러 적 수십 명을 맨손으로 죽이고 물에 투신하였으니 이때 공의 나이 45세였다. 이듬해 의관을 거두어 안산(安山) 동장리(洞長里)에 장사지내고 정려를 세웠다. 후에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장의(壯毅)이다.

    <안산시 문화관광사이트에서 인용>

     

     

     

     

     

     

     

     

     

     

     

     

     

     

     

     

     

     

     

     

     

    ▼ 김여물장군, 아들 김류 신도비

    ▼ 김여물장군 신도비가 있는 공원에서 바라본 광덕산

    ▼ 김여물장군 신도비(왼쪽)

     

     

     

     

    ▼ 김여물장군과 후실,아들 처,손자 처, 증손 처 등 4세에 걸친 절개를 기리기 위한 정문이다.

    ▼ 4세충렬문 내부...

    ▼ 4세충렬문 근경...

    ▼ 김여물장군 묘는 4세충렬문 우측으로 돌아 약100미터만 올라가면 나온다.

     

    ▼ 김여물장군 묘역.... 무곡성인 광덕산 아래에 있다.

    ▼ 김여물장군 묘 앞쪽에 후손 묘가 있다.

    ▼ 김여물장군의 증손이며 영의정 김류의 손자인 김진표 묘

    ▼ 김여물장군 증손 김진표 묘표

    ▼ 김여물장군 증손 김진표 묘 석물

     

     

    ▼ 김여물장군 증손 김진표 묘 후경

     

    ▼ 김여물장군 묘 안내판

    ▼ 김여물장군 묘 전경

    ▼ 김여물장군 묘

    ▼ 김여물장군 묘 석물

     

     

     

    ▼ 김여물장군 묘표

    ▼ 김여물장군 구 묘표

    ▼ 김여물장군 신 묘표

    ▼ 김여물장군 묘 입수처는 등산로와 접해 있다..

    ▼ 김여물장군 묘 후경

     

     

    ▼ 김여물장군 묘 후경... 아들 영의정 김류 묘는 왼쪽 청룡쪽 망주석에서 오른쪽 묘로 나있는 길을

    따라 약 100미터정도 올라가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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