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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화성]서거정선생 묘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2. 5. 23. 10:00
서거정선생 묘
서거정 묘는 화성에 있지만 오히려 수원에 가까이 있는듯 싶다. 예전에 수원에서 봉담으로 가는 길 옆에
있어서 답사를 했는데 이번에 다시한번 하게 되었다.
원래 서울 방이동에 있던 묘를 1975년에 이장하여 온 묘라서 특별히 묘역에 대한 느낌은 없지만 대문호의
묘가 문화재 대접도 못받은체 길 옆에 버려진 것 같아 씁쓸하다.
서거정(徐居正)
1420년(세종 2)∼1488년(성종 19).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강중(剛中), 초자는 자원(子元), 호는 사가정(四佳亭) 혹은 정정정(亭亭亭).
1. 가계와 관직
호조전서(戶曹典書)서의(徐義)의 증손으로, 목사(牧使) 서미성(徐彌性)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권근(權近)의 딸이다. 최항(崔恒)이 그의 자형(姉兄)이다.
조수(趙須)‧유방선(柳方善) 등에게 배웠는데, 학문이 매우 넓어서 천문(天文)‧지리(地理)‧의약(醫藥)‧복서(卜筮)‧성명(性命)‧풍수(風水)에까지 관통하였으며, 문장에 일가를 이루고, 특히 시(詩)에 능하였다.
1438년(세종 20)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444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에 제수되었다.
그뒤 집현전박사‧경연사경(經筵司經)이 되고, 1447년 부수찬(副修撰)으로 지제교 겸 세자우정자(知製敎兼世子右正字)로 승진하였으며, 1451년(문종 1) 부교리에 올랐다.
다음해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따라 명나라에 종사관(從事官)으로 다녀왔으며, 1455년(세조 1) 세자우필선(世子右弼善)이 되고, 1456년 집현전이 혁파되자 성균사예(成均司藝)로 옮겼다.
일찍이 조맹부(趙孟頫)의 〈적벽부(赤壁賦)〉글자를 모아서 칠언절구 16수를 지었는데, 매우 청려하여 세조가 이를 보고 감탄하였다 한다.
1457년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우사간‧지제교에 초수(招授)되었다.
1458년 정시(庭試)에서 우등하여 공조참의‧지제교에 올랐다가 곧이어 예조참의로 옮겼다. 세조의 명으로 《오행총괄(五行摠括)》을 저술하였다.
1460년 이조참의로 옮기고, 사은사(謝恩使)로서 중국에 갔을 때 통주관(通州館)에서 안남사신(安南使臣)을 만나 시재(詩才)를 겨루어 탄복을 받았으며, 요동인 구제(丘霽)는 그의 초고를 보고 감탄하였다 한다.
1465년 예문관제학‧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를 거쳐, 다음해 발영시(拔英試)에 합격하여 예조참판이 되고, 이어 등준시(登俊試)에 3등으로 합격하여 행동지중추부사(行同知中樞府事)에 특가(特加)되었으며, 《경국대전》 찬수에 참가하였다.
1467년 형조판서로서 예문관대제학‧성균관지사를 겸하여 문형(文衡)을 관장하였으며, 국가의 전책(典册)과 사명(詞命)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1470년(성종 1) 좌참찬이 되었고, 1471년 순성명량좌리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 3등에 녹훈되고 달성군(達城君)에 봉하여졌다.
1474년 다시 군(君)에 봉하여지고 좌참찬에 복배되었다.
1476년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중국사신을 맞이하였는데, 수창(酬唱)을 잘하여 기재(奇才)라는 칭송을 받았다. 이해 우찬성에 오르고, 《삼국사절요》를 공편하였으며, 1477년 달성군에 다시 봉해지고 도총관(都摠管)을 겸하였다. 다음해 대제학을 겸직하였고, 곧이어 한성부판윤에 제수되었다. 이해 《동문선》 130권을 신찬하였다.
2. 관찬 및 저술
1479년이조판서가 되어 송나라제도에 의거하여 문과의 관시(館試)‧한성시(漢城試)‧향시(鄕試)에서 일곱번 합격한 자를 서용하는 법을 세웠다.
1480년 《오자(吳子)》를 주석하고, 《역대연표(歷代年表)》를 찬진하였다.
1481년 《신찬동국여지승람》 50권을 찬진하고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1483년 좌찬성에 제수되었다.
1485년 세자이사(世子貳師)를 겸하였으며, 이해 《동국통감》 57권을 완성하여 바쳤다.
1486년 《필원잡기(筆苑雜記)》를 저술하여 사관(史官)의 결락을 보충하였다.
1487년 왕세자가 입학하자 박사가 되어 《논어》를 강하였으며, 다음해 죽었다. 여섯 왕을 섬겨 45년간 조정에 봉사, 23년간 문형을 관장하고, 23차에 걸쳐 과거시험을 관장하여 많은 인재를 뽑았다.
그의 저술로는 시문집으로 《사가집(四佳集)》이 전하며, 공동찬집으로 《동국통감》‧《동국여지승람》‧《동문선》‧《경국대전》‧《연주시격언해(聯珠詩格言解)》가 있고, 개인저술로서 《역대연표》‧《동인시화(東人詩話)》‧《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필원잡기》‧《동인시문(東人詩文)》 등이 있다.
조선 초기 세종에서 성종대까지 문병(文柄)을 장악하였던 핵심적 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학풍과 사상은 이른바 15세기 관학(官學)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훈신(勳臣)의 입장을 반영하였다.
그의 한문학에 대한 입장은 《동문선》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는 우리나라 한문학의 독자성을 내세우면서 우리나라 역대 한문학의 정수를 모은 《동문선》을 편찬하였으며, 그의 한문학 자체가 그러한 입장에서 형성되어 자기 개성을 뚜렷이 가졌던 것이다.
3. 역사의식
또한, 그의 역사의식을 반영하는 것으로는 《삼국사절요》‧《동국여지승람》‧《동국통감》에 실린 그의 서문과 《필원잡기》에 실린 내용이다. 《삼국사절요》의 서문에서는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세력이 서로 대등하다는 이른바 삼국균적(三國均敵)을 내세우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의 서문에서는 우리나라가 단군(檀君)이 조국(肇國)하고, 기자(箕子)가 수봉(受封)한 이래로 삼국‧고려 시대에 넓은 강역을 차지하였음을 자랑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은 이러한 영토에 대한 자부심과 역사전통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여 중국의 《방여승람(方輿勝覽)》이나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와 맞먹는 우리나라 독자의 지리지로서 편찬된 것이다.
이와같이, 그가 주동하여 편찬된 사서‧지리지‧문학서 등은 전반적으로 왕명에 의해서 사림인사의 참여하에 개찬되었다.
그런데 그가 많은 문화적 업적은 남겼으면서도 성종이나 사림들과 전적으로 투합된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관리자(연락처) 미지정(묘지석: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6호) 서거정선생 묘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왕림리 47 대구서씨 서거정
조선 전기의 명신이자 문장가인 서거정(1420~1488)의 묘소는 본래 서울시 강동구 방이동에 있었는데 도시계획으로 1975년 이장하여 현재의 위치에 모셔졌다. 서거정의 자는 강중(剛中), 호는 사가(四佳)이다. 할아버지는 호조전서(戶曹典書) 의(義)이고, 아버지는 목사(牧使) 미성(彌性)이며 어머니는 권근(權近)의 딸이다. 최항(崔恒)은 그의 자형(姉兄)이다. 조수(趙須)·유방선(柳方善) 등에게 학문을 배웠는데 천문(天文)·지리(地理)·의약(醫藥)·복서(卜筮)·성명(性命)·풍수(風水) 등 여러 방면에 두루 관통하였다.
1438년(세종 20)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444년(세종 26)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후, 세종에서 성종까지 45년 동안 여섯 왕을 섬기면서 23년간 문형을 관장하고, 23차에 걸쳐 과거시험을 관장하여 많은 인재를 뽑았다. 문장으로 일가를 이루었고, 특히 시(詩)에 능하였다. 특히 그의 문장은 중국에까지 알려져 1460년(세조 6) 사은사(謝恩使)로서 중국에 갔을 때 통주관(通州館)에서 안남사신(安南使臣)과 시재(詩才)를 겨루었고 요동인 구제(丘霽)는 그의 초고를 보고 감탄했다고 하며, 또 1476년(성종 7)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중국사신을 맞이했을 때에는 수창(酬唱)을 잘해 기재(奇才)라는 칭송을 받기도 하였다.
당시 국가의 공문서와 외교문서의 격식이 대부분 그의 손에서 나왔고, 조선시대의 기본법전으로 통치의 원칙이 된 『경국대전(經國大典)』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대표적인 저술로는 시문집 『사가집(四佳集)』이 전하며, 역대 우리나라 역사를 기록한 『동국통감(東國通鑑)』을 비롯하여 우리나라의 각 지방연혁과 풍물을 담은 인문지리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신라의 설총에서부터 조선건국 이후의 작가에 이르기까지 약 5백인의 작가들 작품 4,302편을 수록한 『동문선(東文選)』등을 공동으로 편찬하였고, 개인저술로서 『동인시화(東人詩話)』『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필원잡기(筆苑雜記)』·『동인시문(東人詩文)』 등을 남겼다.
묘소 앞에는 사당이 세워져 있고, 옛 석물로 남아있는 것은 묘표, 문인석, 신도비뿐이고 상석 등은 이장할 때 새로 건립한 것으로 보인다. 신도비는 어세겸(魚世謙, 1430~1500)이 찬하고 구언회(具言會)가 서(書)했다. 한편 묘소를 이장할 때 19매의 묘지석이 출토되어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6호로 지정되어 경기도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백자로 구워졌으며 제1번 묘지석은 특별히 청화(靑畵)로 쓰여졌고 나머지는 정사각형의 틀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 도필(刀筆)로 글자를 써넣었다. 지석의 우측면 상단에 번호를 부여해서 전체의 순서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현재 16, 17, 19번이 결번이다. 글은 이숙함이 지었다. .<화성시 문화관광사이트에서 인용>
▼ 서거정 신도비
▼ 서거정 묘소 안내문.. 글자가 잘 안보인다.
▼ 서거정 묘 전경
▼ 서거정 묘표
▼ 서거정 묘 석물
▼ 서거정 묘 입수도두
▼ 서거정 묘 후경...
▼ 서거정 묘 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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