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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안산]홍명원선생 묘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2. 5. 28. 10:00

    홍명원선생 묘

     

    안산답사때 홍명원선생 묘는 조금 신기해서 기억에 많이 남는다. 접근을 전철역에서 하지 않고 산반대편에서 하는

    바람에 산을 넘어 들어가다보니 힘들게 찾은 기억이 난다. 바다를 바라보며 묘역이 있어서 바람을 많이 받고 있다.

    홍명원(洪命元)
    1573년(선조 6)∼1623년(인조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낙부(樂夫), 호는 해봉(海峰). 아버지는 진사 홍영필(洪永弼)이며, 어머니는 경력 조수(趙琇)의 딸이다.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승문원에 들어가 홍문록(弘文錄)에 올랐다. 시강원(侍講院)의 설서‧사서를 거쳐 헌납이 되어 권신을 비난하다가 쫓겨나 함경도도사로 3년을 지내고 돌아와 1603년 예조정랑이 되었다. 다시 외직으로 나가 죽주부사가 되었으며 내직으로 들어와 수찬‧필선‧장령을 역임하고 이항복(李恒福)의 천거로 통정계에 승진, 정주목사‧의주부윤이 되어 서로(西路)의 잔폐를 구제하는 데 공헌하였다.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동부승지가 되었다가 부모를 모시기 위하여 광주목사(廣州牧使)를 자청, 그 치적이 나타났으므로 표창을 받고 가선계에 올랐다.
    이때 광해군의 금나라와의 수호관계가 명나라에 알려지자 급고사(急告使)로서 명나라에 가서 이를 무마시키고 돌아왔다.
    한편, 금나라에서 누차 조선을 위협하자 조정의 의론이 분분하였으나 그는 단연 배금(排金)을 주장하였다.
    인조반정 후 흉도들이 경기 부근에서 난을 일으키려 하자 경기관찰사가 되어 이를 진정시켰다. 벼슬하기 27년 동안 위형(威刑)을 쓰지 않고 공정하게 다스렸으므로 사람들이 다 경복하였다. 박엽(朴燁)‧정준(鄭遵)이 서임(西任)을 맡고 있을 때 총애를 믿고 교만 방자하여 많은 사람들을 침탈했으나, 그에 대해서는 감히 소홀히 대하지 못하였다.
    또한 중국에 갔을 때에는 학사들이 그를 장덕군자(長德君子)라고도 칭하였다.
    문장과 시에 뛰어나 문장은 양한(兩漢)을 주로 하고, 시는 성당(盛唐)을 주로 하였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또 그 아들의 공로로 찬성이 가증(加贈)되었다.
    저서로 《해봉집》 3권 3책이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관리자(연락처) 

       안산시 향토유적 제6호
       홍명원선생 묘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성곡동 산78
      남양홍씨

     

     

     

     

     

     

     

     

     

     

    홍명원

    조선시대의 문신으로 자는 낙부(樂夫), 호는 해봉(海峯), 본관은 남양(南陽), 진사(進士) 영필 (永弼)의 아들이다. 선조 30년(1597)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를 거쳐 선조 33년 검열(檢閱),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와 사서(司書)·수찬(修撰)·헌납(獻納) 이 되었으나 권신(權臣)들을 탄핵하던 끝에 미움을 사서 함경도도사(咸鏡道都事)로 좌천되었다.
    선조 36년(1603) 예조정랑(禮曺正郞)으로 훈련도감낭청(訓練都監?廳)을 겸했고, 그 후 죽주 부사(竹州府事)로 죽주산성(竹州山城)을 쌓고 돌아와 수찬(修撰)·시강원필선(侍講院弼善)·장령 등을 역임했으며 도체찰사(都體察使) 이항복(李恒福)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평안도와 황해도를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좌승지(左承旨)를 역임했으며, 광주목사로 나가 선정을 베푼 끝에 표리(表裏)를 하사받고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계(陞階)되었다.
    광해군 7년(1615) 인목대비에 대한 폐모론이 일어나자 사직하고 고향인 해곡(海谷)으로 돌아갔다. 광해군 14년(1622) 광해군 초 후금(後金)과 수교한 사실이 명나라에 알려져 양국 관계가 미묘해 지자 급고사(急告使)로 명나라에 가서 이를 무마했고, 후금의 위협에 강경론을 주장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후에 경기도 관찰사가 되어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는데 힘썼다. 시와 문장에도 뛰어나 특히 한대(漢代)의 문장과 당대(唐代)의 시에 정통하였다. 저서로는 《해봉집(海峯集)》 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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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산시 문화관광사이트에서 인용>

     

     

     

     

     

     

     

     

     

     

     

     

     

     

     

     

     

     

    ▼ 홍명원선생 묘 후경... 묘역을 산을 넘어 들어가다보니 뒤에서 들어갔다. 

    ▼ 홍명원선생 묘 안내판

    ▼ 홍명원선생 사적비

    ▼ 홍명원선생 묘비

    ▼ 홍명원선생 묘표

    ▼ 홍명원선생 묘 전경

     

    ▼ 홍명원선생 묘 석물

     

    ▼ 홍명원선생 묘역 측경

    ▼ 홍명원선생 묘 입수도두와 후경

     

     

    ▼ 홍명원선생 묘 주위에 있는 다른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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