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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안산]이익선생 묘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2. 6. 2. 10:00

    이익선생 묘

     

    성호 이익선생 묘는 안산의 맨 처음답사 때에 찾아왔었는데 도심속의 섬마냥 붕 떠있는 곳에 묘역이 있어서 안타까운

    마음에 생각만 하고 있다가 이번 안산답사때 다시한번 찾게 되었다.

    맥선을 확인할 길도 없고 그냥 역사적 인물에 대한 예의로 찾아뵙고 기록을 남긴다.

    이익(李瀷)
    1681년(숙종 7)∼1763년(영조 39). 조선 후기의 실학자.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자신(子新), 호는 성호(星湖). 팔대조 이계손(李繼孫)은 성종 때에 벼슬이 병조판서‧지중추부사에 이르러 이때부터 여주이씨로서 가통이 서게 되었다.
    1. 가계
    증조부 이상의(李尙毅)는 의정부좌찬성, 할아버지 이지안(李志安)은 사헌부지평을 지냈고, 아버지 이하진(李夏鎭)은 사헌부대사헌에서 사간원대사간으로 환임(還任) 되었다가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 때 진주목사로 좌천, 다시 평안도 운산에 유배되었다.
    이익은 1681년 10월 18일에 아버지 이하진과 그의 후부인 권씨(權氏)사이에 운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1682년 6월에 전부인 이씨(李氏)사이의 3남 2녀와 후부인 권씨 사이의 2남 2녀를 남긴 채 55세를 일기로 유배지 운산에서 죽었다.
    아버지를 여읜 뒤에 선영이 있는 안산의 첨성리(瞻星里)로 돌아와 어머니 권씨 슬하에서 자라나 그의 조고다질(早孤多疾)의 생애가 시작된 셈이다.
    첨성리는 행정적으로 경기도 광주부에 속하여 광주 첨성리로 일컬어졌으나, 이른바 비래지(飛來地)로서 광주에서 과천‧금천을 거쳐 있는 안산군내에 있어서 흔히 안산의 첨성리로 불려졌다. 그는 10세가 되어서도 글을 배울 수 없으리만큼 병약하였으나, 더 자라서는 둘째형 이잠(李潛)에게 글을 배웠다.
    25세 되던 1705년 증광시에 응하였으나, 시소(試所)에서의 녹명(錄名)이 격식에 맞지 않았던 탓으로 회시에 응할 수가 없게 되었다.
    바로 그 다음해 9월에 둘째형 이잠은 장희빈(張禧嬪)을 두둔하는 소를 올린 때문에 역적으로 몰려 17, 18차의 형신(刑訊)끝에 47세를 일기로 옥사하게 되었다.
    2. 생애
    이익은 이 사건을 계기로 과거에 응할 뜻을 버리고 평생을 첨성리에 칩거하였다. 바다에 가까운 그 고장에는 성호(星湖)라는 호수가 있어서 그의 호도 여기에 연유된 것이며, 그 고장에 있던 그의 전장(田莊)도 성호장(星湖莊)이라 일컬어졌다.
    그는 여기에서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토지와 노비, 사령(使令)과 기승(騎乘)을 이어가지고, 재야의 선비로서 일평생 은둔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뒤로는 셋째형 이서(李漵)와 사촌형 이진(李?)과 종유(從遊)하며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35세 되던 1715년에 어머니 권씨마저 여의어 복상(服喪)을 마치고서는 노비와 집기를 모두 종가(宗家)로 돌려보냈으나, 형제자질에 대한 은애(恩愛)가 지극하여 실제로는 일가의 지주가 되었다.
    그가 47세 되던 해에 조정에서 그의 명성을 듣고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그의 가세는 퇴락되어갔으며, 이익 부자의 오랜 질역(疾疫)은 쇠운을 재촉하였다.
    64, 65세 때에는 이미 뒷잔등의 좌단(痤疸)이 악화되어갔고, 70세가 넘어서는 일찍이 괴과(魁科)로 급제하여 예조정랑‧만경현감을 지낸 외아들 이맹휴(李孟休)가 오랜 병고 끝에 죽었으며, 70세 후반기에 들어서는 반신불수가 되어 기거마저 불편할 지경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가산도 탕진되어 그의 만년에는 한 명의 고노(雇奴)외에는 송곳을 꽂을만한 전지도 없으리만큼 영락되고 만 셈이었다.
    83세 되던 1763년(영조 39)에 조정에서는 우로예전(優老例典)에 따라 그에게 첨지중추부사로서 승자(陞資)의 은전을 베풀어주었으나, 그해 12월 17일 오랜 병고 끝에 죽었다.
    유해는 선영이 있는 첨성리(현재 안산시 이동)에 안장되었다.
    3. 학문
    그의 타고난 성품은 기신(氣神)이 정랑(精朗)하고 성모(性貌)는 준결(峻潔)하며, 눈에는 정기가 넘쳐흘러서 그 영채(英彩)가 사람을 쏘는듯하고 조그마한 긍지도 가진듯싶지 않으면서도 중정간중(中正簡重)하여 하나의 덕성을 갖추어, 집안에서는 법을 세워 예절을 엄준히 하고 사치한 생활을 엄히 금하였다.
    그의 문인 안정복(安鼎福)은 이익의 인품에 대하여 “강의독실(剛毅篤實)이것은 선생의 뜻이요, 정대광명(正大光明)이것은 선생의 덕이요, 선생의 학은 정심굉박(精深宏博)하고, 그 기상은 화풍경운(化風景雲)이요, 그 금회(襟懷)는 추월빙호(秋月氷壺)이다.”라고 술회하였다.
    그의 학문은 그 일문에 이어져서 준재가 많이 배출되어 아들 이맹휴는 《예론설경(禮論說經)》‧《춘관지(春官志)》‧《접왜고(接倭考)》 등을 남기고, 손자 이구환(李九煥)은 조업(祖業)을 계승하였다.
    그 위에 종자(從子) 이병휴(李秉休)는 예학으로, 종손(從孫) 이중환(李重煥)은 인문지리로 이름을 남기고, 이가환(李家煥)은 정조의 은총을 받아 벼슬이 공조판서에 이르렀으나, 천주교를 신앙하여 1801년(순조 1)의 신유사옥 때에 옥사하였다.
    이익의 문인으로 두드러진 자로는 윤동규(尹東奎)‧신후담(愼後聃)‧안정복‧권철신(權哲身) 등이 있어 당대의 학해(學海)를 이루어 그 흐름을 정약용(丁若鏞)에게까지 미쳤다.
    증조부 상의는 일찍이 이수광(李睟光)과 더불어 주청사(奏請使)로 중국에 다녀온 일이 있었고, 이익의 딸이 이수광의 후손과 결혼한 것으로 보아 이익‧이수광의 양가는 세교집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첨성리에 칩거하며 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이하진이 1678년에 진위 겸 진향사(陳慰兼進香使)로 연경(燕京)에 들어갔다가 귀국할 때에 청제(淸帝)의 궤사은(饋賜銀)으로 사가지고 돌아온 수천권의 서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선현의 언행을 샅샅이 기억하고 일찍부터 시나 문을 잘 외었다. 《맹자》‧《대학》‧《소학》‧《논어》‧《중용》‧《근사록》 등을 읽고, 다시 《심경(心經)》‧《역경》‧《서경》‧《시경》을 거쳐서 정주(程朱)와 이황(李滉)의 학문을 탐독하여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익의 학문은 이렇듯 철저한 유교적 기반 위에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여러 경서(經書)에 대한 질서(疾書)를 지어내고, 주자(朱子)의 《근사록》과도 같이 이황의 언행록인 《이자수어(李子粹語)》를 찬저(撰著)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한편으로 허목(許穆)‧윤휴(尹鑴) 등의 뒤를 이어 주자에게로만 치우치는 폐풍에서 벗어나 수사학적(洙泗學的)인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의 부흥을 기하였다. 그것은 단순한 부흥이 아니라 부흥이 바로 혁신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이(李珥)와 유형원(柳馨遠)의 학풍을 존숭하여 당시의 사회실정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세무(世務)에 실효를 거둘 수 있는 재구(材具)의 준비가 있어야만 실학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사장(詞章)‧예론(禮論)에 치우치거나 주자의 집전(集傳)‧장구(章句)에만 구애되는 풍조에서, 그리고 종래의 주자학적으로 경화된 신분관‧직업관에서 벗어나는 한편, 임란‧호란을 겪고 난 뒤의 사회변동과 당시의 세계관‧역사의식의 확대 및 심화에 따른 자기나라에 대한 재인식‧자각에서 일어난 조선 후기 실학의 기본성격을 나타낸 것이다.
    그는 불씨(佛氏)의 이단(異端), 술가(術家)의 소기(小技)와 패관잡설(稗官雜說) 등 세가지 서(書)를 혐오하였다.
    그러나 당시 중국을 통하여 전래된 서학(西學)에는 학문적인 관심을 기울여 천문(天文)‧역산(曆算)‧지리학과 천주교서 등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를 널리 열람하고 만국전도(萬國全圖)‧시원경(視遠鏡)‧서양화(西洋畵) 등 서양문물에 직접 접하여 그의 세계관‧역사의식을 확대, 심화시킬 수 있었다.
    그것은 그로 하여금 종래 중국중심의 화이관(華夷觀)‧성인관(聖人觀)에서 탈피하여 보다 합리적이고 실증적인 시야를 지닐 수 있게끔 한 것이다.
    그는 정통적인 유학자이면서도 노불(老佛)의 학이나 새로 전래된 천주교와 같은 이른바 이단에 대해서도 그 윤리면에 있어서는 남다른 관심을 나타내었으나, 불교의 윤회설이나 천주교의 천당지옥설‧야소부활설(耶蘇復活說)과 같은 것은 황탄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익은 종래의 이기설(理氣說)에 있어서도 사물의 존재원리로서의 이(理)는 인정하지만, 존재 자체는 기(氣)아닌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현실적으로는 존재원리보다도 기로서의 인간존재를 보다 더 중요시한 셈이다.
    그는 문학론(文學論)에 있어서도 경세실용적(經世實用的)인 면에서 교화와 풍간(諷諫)에 보다 더 많은 의의를 부여하고, 그의 화론(畵論)에 있어서와 같이 형(形)‧신(神)의 일치로써 ‘사진(寫眞)’, 즉 전신사영(傳神寫影)의 원칙을 중시하였다.
    그의 시에 있어서도 마치 두보(杜甫)나 이태백(李太白)에서와 같이 색태(色態)를 돋보이게 하여 사실적이면서도 회화적인 묘사를 귀히 여기는 한편, 황새‧소리개‧지렁이‧개미와 같은 동물의 생태를 빌린 우의적‧풍자적인 시작과 현실적인 좌절‧갈등에서 오는 은일적(隱逸的)인 시작을 많이 남겼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이단잡설과 훈고(訓誥)‧사부(詞賦)는 물론, 이기(理氣)의 논의까지도 당시 사회의 현실문제에 비추어서는 아무런 실익을 주지 못하는 것으로 보고, 그러한 의미에서 예학이나 이기설 같은 것이 당시에는 긴요하고 절실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학문‧사상은 내외적으로 당시 조선이 처한 사회현실로 보아 경세실용이라는 면에 중점이 두어졌다.
    4. 평가와 저술
    이익의 학문사상은 단적으로 말한다면 탈주자학적인 수사학적 수기치인의 학으로 규정지을 수 있다. 그것은 단순한 수사학에로의 복귀 내지 부흥이 아니라, 당시 조선의 사회현실에 입각한 사회개편을 주장한 개혁사상을 의미한다.
    그의 학문의 체(體)는 어디까지나 경학에 두어졌음에도 사회현실에 비추어 보다 더 긴요하고 절실한 것은 경세치용의 학으로 간주하였다. 그는 당시에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서학의 수용으로 세계관‧역사의식을 확대, 심화시켜갔고, 보다 더 실증적이고 합리적인 사유방식을 체득할 수가 있었다.
    그의 여러 ‘이단(異端)’에 대한 자세를 볼 때 윤리면에 대해서는 너그러움을 보였으나, 신앙 자체에 대해서는 거부적인 견해를 취하여 그 점에서는 새로 전래, 유포되던 천주교에 대해서도 다름이 없었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정통적인 유학자에서 벗어남이 없었다.
    그의 이교배척, 폐전론(廢錢論)‧억말책(抑末策)의 제의, 남녀관에서 정통유학자로서의 한계를 나타내고 있기는 하지만, 한편으로 사민평등의 인간관‧신분관‧직업관에서 근대적인 사회에로 한걸음 다가섰음을 엿볼 수 있다.
    저서로는 《성호사설》‧《곽우록(藿憂錄)》‧《성호선생문집》‧《이선생예설(李先生禮說)》‧《사칠신편(四七新編)》‧《상위전후록(喪威前後錄)》과 《사서삼경》‧《근사록》‧《심경》 등의 질서, 《이자수어》 등이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관리자(연락처) 

       경기도 기념물 제40호
       이익선생 묘
       경기도 안산시 안산시 상록구 일동 555
      여주이씨

     

     

     

     

     

     

     

     

     

     

    이익

    실학의 대가 성호(星湖) 이익(李瀷)선생은 평안도 운 산에서 1681년(숙종7년)부친 이하진(李夏鎭)이 유배 길에 운산에 와 있을때 태어났다. 이익 선생은 그가 평 생토록 떠나지 않고 거주하며 학문의 커다란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경기도 안산군 첨성리(瞻星里:지금의 안산시 상록구 일동)라는 지명에서 『星(성)』자를 따라 그의 호를 지었다. 

    이익선생은 1705년(숙종 31년) 증광문과(增光文科)를 보았으나 낙방하고 이듬해 형 잠(潛)이 당쟁으로 희생 되자 벼슬을 단념하고 안산 첨성촌(지금의 안산시 상록구 일동)에 머물며 일생을 학문에 전념하였다. 유형원의 학풍을 계승하여 실학자의 중조(中祖) 가 되었으며 그의 학풍은 그후 안정복, 이가환, 이중환, 정약용 등에게 계승되었다. 이익선생은 학문을 깊이 연구하는 데에만 몰두하여 천문, 지리, 의학, 재정지방제도, 과거제도, 학제, 병제, 관제 등 현실적인 문제에 비판과 이상 및 사상을 널리 써놓은 성호사설(星湖僿說)을 비롯한 곽우록(藿憂錄), 성호문집(星湖文集)을 남겼으며 조정에서는 선생이 돌아가신 후에 학덕을 높이 평가하여 이조판서에 추서하였다. 선생은 1763년(영조 39년)에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위치 및 구조 그의 묘소는 수원.인천간 산업도로가 바 라보이는 구릉상에 위치하고 있는데 묘소의 석물로는 묘비(墓碑)와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망주석(望柱石)이 있다. 봉분의 규모는 600×550×220cm이다. 묘비의 재질은 오석(烏石)이며 전면에는 "星湖先生李公諱瀷之墓 贈 貞夫人 高靈申氏左 贈 貞夫人 酒川睦氏右"라 새겨져 있다. 이 비석은 공이 사후 204년이 되는 1967년에 건립되었으며 규모는 옥개석이 90×60×50cm 이고 비신은 146×57×26cm, 기대석은 100×62×20cm 이다. 상석(床石)의 재질은 화강암으로 규모는 121×83 ×58cm이며 향로석은 39×28×39cm이다. 망주석의 높 이는 165cm이다. 두향(頭向)은 북향으로 남쪽을 바라 보고 있다. 묘소로 오르는 길은 계단이 설치되어 있으 며 무덤 앞에 안내판이 있다. 묘소 우측에는 사당이 있다 .

    <안산시 문화관광사이트에서 인용>

     

     

     

     

     

     

     

     

     

     

     

     

     

     

     

     

     

     

     

     

     

     

     

     

    ▼ 이익선생 묘 ... 도심속에 있다보니 섬에 같혀 있는듯 보인다. 

    ▼ 이익선생 묘 안내판

    ▼ 이익선생 사당

    ▼ 이익선생 사당 내부..

    ▼ 이익선생 묘역 전경

    ▼ 이익선생 묘

    ▼ 이익선생 묘비

    ▼ 이익선생 묘비

     

     

    ▼ 이익선생 묘를 답사할 때는 이른 봄이이었다.

    ▼ 이익선생 묘 입수도두...

    ▼ 이익선생 묘 후경

    ▼ 이익선생 묘 주변 전경

     

    ▼ 이익선생 사당 내부..

     

    ▼ 이익선생 묘 현무봉으로 판단되는 산..

    ▼ 이익선생 묘 앞에는 성호기념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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