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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공주]윤원거 묘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2. 7. 2. 10:00
윤원거 묘
충남 공주지역에 풍수답사를 지난3월에 다녀와서 글을 올리려다 계속 답사를 진행하는 바람에
밀려서 이제야 올린다. 물론 작년에 다녀온 고양시, 성남시 지역 묘지답사기 또한 밀려서 올리지
못한 경우가 많은데 이제 7,8월은 묘지답사를 거의 못하는 시기이니 그때 답사한 내용을 하나하나
올려보도록 하겠다.
윤원거 묘는 영규대사 묘역 바로 윗쪽에 있다. 이곳은 이번까지 세번 다녀온 곳이다. 한번 가서는
제대로 보지 못하고 갔다온 곳도 기억하지 못해 또 가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번에는 단체로 갔으니까
기억을 못한 경우와는 다르지만...
윤원거 묘역은 풍수 의견들이 분분하다. 모친 해평윤씨 묘가 진혈처라는 의견이 주를 이룬다.
풍수를 공부하다보면 남들과 다른 의견을 개진하고 싶어지는가 보다. 난 원래 남들과 동화됨을
즐기는 사람이라 그들의 의견을 가능하면 따라하려 하는데 답사를 가다보면 꼭 다르게 얘기하는
사람이 있다. 처음에는 그분이 대단해 보여 자꾸 질문도 하고 하나라도 더 배워야겠다는 일념으로
대화도 나눠보지만 조금지나면 바닥이 보이기 시작한다.
긍정적인 의견이나 답변은 조리있게 설명을 해야하기 때문에 그것을 설명하자면 시간도 필요하고
여기저기에서 가져온 이론을 이해를 시켜가며 발표해야 한다. 그런데 부정적인 의견이나 잘 못을
지적하는 의견은 우선 강하게 밀어부치거나 큰 소리를 쳐서 주위를 압도한 후 자기 의견을 말하게 된다.
조리있게 말을 안해도 된다. 우선은 아니다 잘못됐다라고 말만 하면 된다. 그러다보니 어떤 동일한
묘역인데도 의견들이 분분하고 생각들이 다 다르게 나온다. 그 중에는 많은 공부를 하신 분들도 있고
자기의 의견을 조리있게 답사기를 통해 발표하시는 분들도 계시다. 그런 분들은 존경 받아 마땅 하다.
이왕 풍수이야기를 시작했으니 조금 더 얘기를 해보기로 한다.
공부를 한다면 끝이 보여야 하는데 풍수는 그 끝이 잘 보이지 않는다. 재야에서 30년을 풍수공부하고
실전을 했어도 무시당하기 십상이다. 그들의 얘기는 30년하면 뭐하느냐 제대로 공부를 안했는데..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대학에서 풍수박사학위를 받으면 인정을 해주느냐? 그런것도 아니다. 실전이 부족
하다고 무시하기 일쑤다. 흔히 강단파, 강호파로 불리우며 서로를 질시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상호간에 많이 이해하고 인정하는 분위기가 확대되고 있다. 그 중심에 대한민국풍수
지리연합회가 많은 노력을 기울여 오고 있음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풍수를 학문적으로 접근하는 학구파들의 노력으로 많은 국민들이 풍수를 학문으로 인정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고, 현장에서 여러 경험을 통해 논리적으로 접근하여 신뢰를 심어주고 국민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계기를 만들어 준 실전파들의 노력으로 이제 풍수는 제도권으로 들어가고 웰빙의 학문,
자연 순응의 학문으로 국민들이 인식하고 있다.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교류를 확대하고 논문 발표, 세미나 개최 등을 통해 상호 이해의 폭을 넓히고,
아울러 국민들에게도 좀더 다가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윤원거(尹元擧)
1601년(선조 34)∼1672년(현종 13). 조선 중기의 유학자.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백분(伯奮), 호는 용서(龍西).
시강원필선 윤전(尹烇)의 아들이며, 모친은 해평윤씨(海平尹氏)로 해평부원군 윤근수의 아들인 윤환(尹晥)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문장이 뛰어나 이수광(李睟光)의 칭찬을 받았다. 가정에서 학문을 익힌 뒤 1625년(인조 3)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과 예학을 전습하였다.
1633년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여 1635년 성균관재생으로 들어갔다.
이때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묘종사운동에 참여하여 그 반대자들과 논쟁을 벌였으나 성사되지 못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주전론을 제기하였으나 아버지가 강화도에서 순절한 뒤에는 일절 국사를 논하지 않고 재야에 은거,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1658년(효종 9)부터 학문과 덕행으로 추천되어 공조좌랑‧정랑‧종부시주부‧성균관사업‧사헌부지평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1660년 복제예송(服制禮訟)에서 남인 권시(權諰)를 옹호하는 발언을 하였다가 송시열(宋時烈)일파의 비난을 받았다.
1661년부터 여러 차례 사헌부장령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고, 1670년 세자시강원 진선에 임명되었을 때에는 상소를 올려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를 논하였는데, 그 요지는 솔선수범‧입지‧정심(正心)‧면학‧휼민(恤民)‧근검절약‧무사봉공 등이었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청요직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산(尼山)에서 가난하게 살았으나 윤문거(尹文擧)‧윤선거(尹宣擧)‧윤순거(尹舜擧) 등의 종형제와 학문을 연마하고 후생을 가르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특히 시율에 격조가 높았으나 저술은 즐겨하지 않았다. 뒤에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연산의 구산서원(龜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시문집 《용서문집》과 부록 합 4권 2책이 전한다.<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관리자(연락처) 공주시 기념물 제19호 윤원거 묘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유평리 산6-1 파평윤씨 윤원거 묘(尹元擧 墓)
파평윤씨 묘소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윤전의 아들 윤원거의 묘소이다. 윤원거는 본관이 파평이고 자는 백호, 호는 용서(龍西)이다. 가정에서 학문을 익히고 25살에 김장생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과 예학을 전습하였으며, 1635년(인조 13)에 성균관 재생으로 들어가게 된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주전론을 제기하였으나 아버지인 윤전이 강화도에서 순절하자 재야에 은거,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윤원거 는 윤전과 마찬가지로 유평리에 은거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으나 유언에 따라 유평리에 묘소를 쓰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파평윤씨가 어떻게 유평리에 들어왔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파평윤씨가 오랫동안 세거한 논산시 노성면이 계룡면 남쪽에 있어, 거리상 근접성 때문에 자연스럽게 유평리에 이거한 것으로 보인다.
묘비는 1796년에 세워진 것이며, 전체 높이 224m, 비신 높이 16㎝, 너비 68㎝, 폭 35㎝의 규모이다. 옥개석과 비좌는 오래된 것이지만 비신은 1993년에 새로 세웠다.
윤원거 묘비는 1796년 세워졌으며, 윤광안(尹光顔)이 글을 짓고, 조윤형(曺允亨)이 글을 썼다. 묘비의 뒤편에는 윤원거가 죽은 지 120여 년이 지났으나 윤원거의 높은 도와 절의를 나타내는 기록이 없어 작은 묘비를 세운다고 기록하고 있다. 옆에는 윤원거의 가계와 생애가 기록되어 있다.<공주시 문화관광사이트에서 인용>
▼ 윤원거 묘 주산을 도로에서 지나가면서 스냅으로 찍었다..
▼ 윤원거 묘 안내판
▼ 윤원거 묘 전경
▼ 윤원거 묘
▼ 맨 윗쪽이 윤원거 묘이며, 배위 연일정씨, 광산김씨 묘가 아래에 있다.
▼ 윤원거 묘비
▼ 윤원거 묘비 뒷면
▼ 윤원거 배위 안동권씨 묘표... 이곳에 묘는 3기이고 묘비에 표시된 것으로 봐서는 아랫쪽 2기는
배위 연일정씨,광산김씨 묘가 확실한데 안동권씨 묘는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추측해보건데
윤원거 묘에 합장되지 않았을까...
▼ 윤원거 배위 안동권씨 묘표 후면...
▼ 윤원거 묘 석물
▼ 윤원거 묘 입수도두...
▼ 윤원거 묘 후경
▼ 윤원거 묘에서 바라본 조안산...
▼ 윤원거 묘 아랫쪽에 있는 모친 해평윤씨...
▼ 윤원거 모친 해평윤씨 묘
▼ 해평윤씨 묘 석물
▼ 윤원거 모친 해평윤씨 묘 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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