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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고양]박대립선생 묘 및 신도비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2. 7. 28. 10:00
박대립선생 묘 및 신도비
함양박씨 묘역에는 입구에 박대립선생 신도비가 보이고 묘역 또한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문중에 인물이
나오면 한 사람으로 인해 전 문중이 빛이나고 그 후손들 또한 영광을 입게 된다.
이곳에 넓게 분포된 함양박씨의 묘들도 뛰어난 몇사람의 업적으로 문중이 크게 번창한 것이리라.
고양 오금동 일대는 지금 한창 공사중이어서 접근하기조차 힘들다. 공사가 끝나면 어떻게 변할지 걱정이
되지만 산중에 묘역이 있어서 묘들은 안전하게 보존될듯 하다.
묘지 답사를 하다보면 몇 백년동안 자리 옮김없이 한자리를 지키는 묘들도 많지만 어떤 묘는 몇 십년도
안되어서 옮기고 또한 이장을 해서 옮겨왔는데 또 옮겨야할 상황이 되는 묘도 보게 되는데 운명이 기구하다고
해야할지... 후손들의 안목이 좁다고 평가해야할지 모르겠다. 이곳 묘역은 풍수적 입지로 명당여부를 떠나 옮기지
않아도 될 묘역이어서 최초 세장지로 선정했던 조상님이 아주 현명한 분이었다는 것은 확실할 것이다.
박대립(朴大立)
1512년(중종 7)∼1584년(선조 1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수백(守伯), 호는 무환(無患) 혹은 무위당(無違堂). 돈령부정(敦寧府正) 박세영(朴世榮)의 아들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40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검열‧양주교수(楊州敎授)‧봉상시참봉(奉常寺參奉)을 거쳐 형조좌랑에 승진하였다.
이때 정실관계로 수십년 묵은 송사(訟事)를 판서에게 항변하여 종결지음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영의정 심연원(沈連源)의 추천으로 지평(持平)이 되었고, 1567년(선조 즉위)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부제학이 되었다.
그뒤 대사간‧함경도관찰사‧대사헌‧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 등을 역임하였다.
1579년 이조참판에서 형조판서에 특진, 이조판서‧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우참찬‧호조판서를 차례로 역임하고 우찬성이 되었다.
1582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겸임하였고, 이어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를 지낸 뒤 다시 우찬성을 거쳐 좌찬성이 되었다.
기품이 장중하고 의지가 확고하였으며, 효도와 우애가 독실하고 가법이 엄정하였다. 또한, 검소하여 청빈하게 살았으나 남을 돕기에 힘썼다...<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관리자(연락처) 고양시 향토유적 제20호 박대립선생 묘 및 신도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오금동 산121 함양박씨
묘는 통일로 숫돌고개에서 상촌마을 오금동에 남향으로 貞敬夫人 長水 黃氏의 묘와 합장되어 있다. 묘 앞 중앙에는 묘비와 상석, 향로석, 동자석 그리고 문인석과 망주석이 1쌍씩 배치되어 있다. 숙종 18년(1692)에 立石한 신도비는 팔작지붕형의 옥개와 운문이 조각된 장방형의 비좌를 갖추었다. 비문은 이정구가 글을 짓고, 권규가 전을, 5대손 경후가 글을 썼는데 규모는 높이가 170㎝, 너비가 70㎝, 두께가 21㎝이다. 박대립(1512~1584)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守伯, 호는 無違堂이며 본관은 咸陽으로 敦寧府正 朴世榮의 아들이다.
<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에서 인용>▼ 박대립선생 묘 전경..
▼ 박대립선생 묘 안내판
▼ 박대립선생 신도비
▼ 박대립선생 묘표
▼ 박대립선생 묘 석물
▼ 박대립선생 묘 측경
▼ 박대립선생 묘 입수도두...
▼ 박대립선생 묘 후경.. 앞쪽 명당에 신도시가 들어선다.
▼ 박대립선생 묘 후경...앞쪽 안산과 적절히 조화가 된다.
박세무(朴世茂)
1487년(성종 18)∼1554년(명종 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경번(景蕃), 호는 소요당(消䍃堂). 성균생원 박중검(朴仲儉)의 아들이며, 모친은 부사 이관식(李寬植)의 딸이다.
1516년(중종 11) 사마시에 합격하고, 153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에 들어가 헌납을 거쳐 사관(史官)이 되어 직필(直筆)로 당시의 세도가인 김안로(金安老)의 미움을 사게 되어 1539년 마전군수로 좌천되었다가 관직에서 물러났다.
1544년 전적(典籍)‧참교(參校)로 복직되었고, 이듬해 사복시정이 되었다가 안변부사로 나갔으며 그뒤 내자시정‧내섬시정‧군자감정을 역임하였다.
당시 국정을 전단하던 이기(李芑)가 불렀을 때 만나보지 않고 《동몽선습(童蒙先習)》을 지어 자제들을 가르치는 것을 기쁨으로 삼았다.
예조판서에 추증되고, 괴산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다...<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 박대립선생 묘 윗쪽으로 함양박씨 문중 묘가 많이 있다. 박세무 묘..
▼ 박세무 묘비
▼ 박세무 묘에도 박세영 묘처럼 문,무인석이 1쌍씩 세워져 있다.
▼ 무슨 의미가 있을듯 한데 이유는 잘 모르겠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문인석은 청룡쪽, 무인석은
백호쪽에 세워야 하는데 그것은 제대로 지켜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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