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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고양]심희수 묘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2. 7. 26. 10:00
심희수 묘
심희수 묘를 찾아가려는 목적은 일타홍과의 사랑이야기의 주인공을 만나기 위해서다. 세상은 참으로 이상한 것이 정승을 찾아가는 길에 왜 그 처첩인 기생을 먼저 생각하는 것일까? 나부터 그런 생각이 드니 대부분 이곳을 찾는 답사객들의 발걸음이 먼저 일타홍 단비 앞에 머무는 것이리라.
일타홍과 심희수의 사랑이야기는 많이 알려져 있다. 젊은 날 방탕생활을 하던 심희수를 기생 일타홍이 한눈에 비범한 인물임을 알아보고 희생과 봉사로 그를 과거에 급제시키고 정승에까지 이르도록 했다. 신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사연인 셈이다. 그들의 이별 또한 슬픈 사연이라 단비 뒷면에 두사람의 마지막 이별의 시가 세겨져 있다.
사랑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즐겁고 행복한 것은 전해지지 않고 오히려 슬프고 아쉬운 이별은 유유히 흐르는 강물처럼 이사람에서 저사람으로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잘도 전해진다. 그래서인지 청송심씨 문중에서도 여지껏 없던 일타홍 단비를 1983년도에 새로 세운게 아닐까?
심희수(沈喜壽)
1548년(명종 3)∼1622년(광해군 1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백구(伯懼), 호는 일송(一松) 혹은 수뢰루인(水雷累人). 정자(正字) 심건(沈鍵)의 아들이며,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종제이고, 이연경(李延慶)의 외손자이다.
노수신(盧守愼)의 문인으로, 1570년(선조 3)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이해 이황(李滉)이 죽자 성균관을 대표하여 장례에 참여하였고, 1572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보임되고 1583년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89년 헌납으로 있을 때 정여립(鄭汝立)의 옥사가 확대되는 것을 막으려다 조정과 뜻이 맞지 않아 한때 사임하였다가 이듬해 부응교가 되었다.
1591년에는 응교로서 선위사(宣慰使)가 되어 동래에서 일본사신을 맞았으며, 이어 간관이 되어 여러 차례 직언을 하다가 선조의 비위에 거슬려 사성으로 전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의주로 선조를 호종하여 도승지로 승진하고, 대사헌이 되었다. 때마침 명나라 조사(詔使)가 오자 다시 도승지가 되어 응접하니 그가 중국어를 잘 하였기 때문이다.
이해 겨울 형조판서를 거쳐 호조판서가 되어 명나라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의 접반사(接伴使)가 되어 오래도록 서도(西道)에 있었으며, 송응창을 설득하여 관서의 기민구제(飢民救濟)에 진력하였다.
1599년 예문관제학‧예조판서를 거쳐 이조판서가 되고, 홍문관‧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하고서 안으로는 사명(辭命)을 장악하고 밖으로는 접빈(接賓)에 힘썼다. 좌찬성‧우찬성 등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뽑혔다.
1606년 성균관에서 익명의 투서가 나왔는데, 선조가 이를 색출하기 위하여 유생들의 심문을 고집하자 그는 불가함을 말하여 뜻을 관철시켰으며, 그해 가을에 좌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선조의 생부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을 추숭하려 하자 예전(禮典)에 어긋남을 강력하게 표하여 그 논의를 중지시켰다.
1607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다시 좌의정으로 입상(入相)하였다.
그러나 권신 이이첨(李爾瞻) 등이 국정을 장악하여 임해군(臨海君)을 극형에 처하려 하자 이의 부당함을 주장하였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가 일어나 부원군 김제남(金悌男)이 죽고 이이첨 등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옥사의 주모자로 몰아 해치려 하자 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 등과 강력하게 그 부당성을 논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듬해에 영창대군의 처형은 인륜에 어긋나며, 그 가해자인 강화부사 정항(鄭沆)을 참수하라고 주장하다가 광해군의 노여움을 산 정온(鄭蘊)을 적극 변호하여 귀양에 그치게 하였다.
1615년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로 있을 때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허균(許筠)과 중국 야사(野史)에 나타난 종계문제(宗系問題)로 다투다가 궐외로 축출되고 이듬해 폐모론이 다시 일자 둔지산(屯之山)에 은거하여 《주역》을 읽고 시를 읊으며 자신의 지조를 지켰다.
1620년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나가지 않았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썼다.
저서로는 《일송집》이 있다. 상주의 봉암사(鳳巖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고양시 향토문화 제37호
문화재명칭
심희수 묘
소재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흥동 406-1
관리자(연락처)
청송심씨
묘는 원흥동 구석말 마을 청송심씨묘역에 貞敬夫人 光州 吳氏의 묘와 쌍분으로 되어 있다. 묘소에는 묘비, 상석, 향로석, 혼유석 및 최근 새로 세운 장명등과 망주석, 문인석 각 1쌍이 있다. 봉분 앞에는 숙종 1년(1675)에 세운 묘비가 있는데 앞면에 ‘議政府左議政 一松先生之墓 貞敬夫人 光州吳氏 부左’라 표기되어 있다. 심희수(1548~1622)는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伯懼 호는 一松이며 본관은 청송이다
<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에서 인용>
▼ 심희수 묘 전경..
▼ 심희수 묘 .. 청송심씨 묘역 중간에 위치해 있다.
▼ 심희수 묘 앞쪽 장명등은 근자에 만들었다. 옆쪽으로 작은 단이 보이는데.. 일타홍 단이다.
▼ 심희수 묘표.. 일송선생지묘...
▼ 묘표 후면...
▼ 심희수 묘 안내판
▼ 심희수 묘 석물...
▼ 심희수 묘 옆에 일타홍금산이씨지단이 세워져 있다. 일타홍과 심희수의 사랑이야기는 널리
알려져있다. 젊은날 방탕생활을 하던 심희수를 기생 일타홍이 헌신을 다하여 정승으로 만든 이야기.
단비 뒷면에는 두사람의 시 한편씩이 적혀있다.
▼ 일타홍 단비 뒷면에 세겨진 한시...
상월(賞月) - 일타홍(一朶紅)
靜靜新月最分明 정정신월최분명
一片金光萬古淸 일편금광만고청
無限世間今夜望 무한세간금야망
百年憂樂幾人情 백년우락기인정
맑고 고요한 초승달 또렷하기도 한데
한 줄기 달빛은 천년만년 푸르렀겠지.
넓디넓은 세상에 오늘 밤 달을 보며
백년의 즐거움과 슬픔 느끼는 이 몇이나 될까.
이별눈물(有倬) - 심희수(沈喜壽)
一朶芙蓉載柳車 일타부용재유거
香魂何處去躊躇 향혼하처거주저
錦江春雨丹旌濕 금강춘우단정습
應是佳人別淚餘 응시가인별루여
한 떨기 연꽃은 버들상여에 실려 있는데
향기로운 영혼(香魂)은 어딜 가려 머뭇거리나.
비단강(錦江) 봄비에 붉은 명정(銘旌) 젖어드니
아마도 고운 우리 님 이별 눈물인가 보다.
▼ 심희수 묘 후경.. 배위 묘 후경
▼ 심희수 묘 후경
▼ 심희수 묘 후경... 나지막한 구릉이 둘러져 있다.
▼ 심희수 묘 윗쪽에 있는 부친 심건 묘비
▼ 심건 묘 전경
▼ 심건 묘표와 배위 묘표
▼ 심건 묘 석물
▼ 심건 묘 후경.. 앞쪽에 심희수 묘가 있다.
▼ 심건 묘 윗쪽 입수도두처를 지나가면 결인처가 있는데 이쪽으로 도로가 나면서 묘역이 도로로
양분되어 있다. 도로 아래쪽에 심희수 묘역이 있고 윗쪽으로는 선조들 묘가 있다.
▼ 도로 윗쪽에 있는 심희수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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