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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고양]이신의선생 묘 및 신도비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2. 7. 23. 10:00

    이신의선생 묘 및 신도비

     

    고양시 원흥지구는 보금자리주택으로 지금 한창 공사중이다 보니 이신의선생 묘역을 찾기가 쉽지 않다.

    내가 방문할 때는 다행히 공사를 하고 있질 않아 쉽게 갈 수 있었다.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알 수

    없다. 따라서 근자에 다녀오신 분이 있으면 그 기록을 참조하시고 내가 다녀온 2011년 가을 사진만

    올려서 비교할 수 있도록 하겠다.

    이신의(李愼儀)
    1551년(명종 6)∼1627년(인조 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경칙(景則), 호는 석탄(石灘).
    형조판서 이원손(李元孫)의 아들이다. 민순(閔純)의 문인이며 김장생(金長生)과도 친교가 있었다.
    일찍이 어버이를 여의고 형으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며, 1582년(선조 15) 학행으로 천거되어 예빈시봉사가 되었고, 이어 참봉‧종묘서봉사 등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군 300명을 거느리고 적과 싸워 공을 세우고 사옹원직장에 올랐으며, 이어 사재감주부‧공조좌랑‧고부군수 등을 지냈다.
    1596년 이몽학(李夢鶴)의 난 때에는 직산현감으로 천안군수 정호인(鄭好仁)과 함께 8,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병사(兵使)에게 달려갔다.
    1604년 괴산군수를 거쳐 광주목사(廣州牧使)‧남원부사‧홍주목사‧해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1617년(광해군 9) 광해군의 폭정으로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하려는 데 대하여 이항복(李恒福)‧정홍익(鄭弘翼)‧김덕함(金德諴) 등이 극간하여 유배되자 그도 분연히 항소를 올렸다가 이듬해 회령으로 유배, 위리안치되었다. 그해 가을 북로(北虜)의 경보(警報)가 있어 변경일대가 불안하여지자 흥양으로 유배지를 옮겼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와 형조참의‧광주목사(光州牧使)를 역임하고, 1626년 판결사를 거쳐 이듬해 형조참판에 올랐다. 이해 정묘호란으로 왕을 호종하여 강화로 가던 도중 발병하여 인천에 체류하다가 수원 마정리에서 죽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고양의 문봉서원(文峰書院)과 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석탄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관리자(연락처) 

      고양시 향토유적 제14호
       이신의선생 묘 및 신도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도내동 산32 -->도내동 528-1
      전의이씨

     

     

     

     

     

     

     

     

     

     

    이신의선생 묘 및 신도비

    도내동 서촌(西村) 마을 도래울산 기슭에 위치하며 배(配) 정부인(貞夫人) 경주 이씨(慶州李氏)의 묘와 쌍분으로 되어 있다. 묘 앞에는 상석, 향로석이 있으며 좌우에 망주석 문인석이 갖추어져 있다. 묘 좌측의 대리석 묘비는 영조 25년(1749) 7월에 건립한 것으로 높이 250cm, 폭 60cm, 두께 20cm의 규모이다. 비문은 이광사(李匡師)가 썼으며 장방형의 비좌와 팔작지붕형 옥개를 갖추고 있다.


    신도비는 4면 각자(刻字)로 앞면 상단에 ‘증이조판서 문정공 석탄 이선생 신도비명(贈吏曺判書文貞公石灘李先生神道碑銘)’이라 전자(篆字)되어 있다. 비문은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지었고 윤용구(尹用求)가 추서(追書)했으며 김영한(金?漢)이 추전(追篆)하였다. 옥개가 갖추어진 비의 규모는 높이 160cm, 폭 56cm, 두께 27cm이다.
    이신의는 조선조 중기의 문신으로 명종 6년(1551)에 출생하여 인조 5년(1627)에 돌아갔다. 자는 경칙(景則)이며 호는 석탄(石灘)이다. 본관은 전의(全義)로서 참의(參議) 원손(元孫)의 아들이다.
    행촌(杏村) 민순(閔純)의 문인으로 선조 15년(1582) 학행으로 추천을 받아 예빈시봉사(禮賓寺奉事)가 되고 참사(參事) 종묘서봉사(宗廟署奉事)를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향군 300명을 거느리고 적과 싸워 공을 세워 사옹원도장(司甕院道長)이 되었다. 그후 사재감주부(司宰監主簿), 공조좌랑(工曹左郞), 고부군수(古阜郡守) 등을 거쳐 선조 37년(1604) 임천군수(林川郡守)가 되었다. 이어 남원부사(南原府使), 홍주(洪州), 해주(海州) 목사(牧使)를 지냈다. 인조 5년 정묘호란 때 왕을 호종하여 강화로 가던 도중 수원에서 병사하였다.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정(文貞). 문봉서원에 제향된 고양팔현 중의 한 사람이며 저서로는 [석탄집(石灘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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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시문화관광사이트에서 인용>

     

     

     

     

     

     

     

     

     

     

     

     

     

     

     

     

     

     

     

     

     

     

    ▼ 석탄 이신의 선생 묘 및 신도비 안내판... 

    ▼ 석탄 이신의 선생 신 신도비

    ▼ 이신의 선생 구 신도비

    ▼ 석탄 이신의 선생 묘 전경... 묘역이 바짝 올려챘다.

    ▼ 이신의 선생 묘 전경

    ▼ 이신의 선생 묘.. 예전 사진을 보면 묘역 주위로 나무가 무성한데 지금은 몇그루 없다.

    ▼ 이신의 선생 묘 장명등

    ▼ 이신의 선생 묘비

    ▼ 이신의 선생 묘 현무봉... 묘역 옆으로는 문화재 발굴작업이 한창이었다.

    ▼ 이신의 선생 묘 입수도두... 노란 깃발이 곧 이곳을 공사하겠다는 경계선 표시인듯 보인다.

    ▼ 이신의 선생 묘 후경.. 보금자리 주택이 들어서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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