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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광주]문숙공 안정복 묘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2. 9. 3. 10:00

    문숙공 안정복 묘

     

    풍수하시는 분 모임에서 어느 분이 안정복 묘에 대해 소개해 주었다. 아주 멋진 묘라고 해서 언제 가볼

    요량으로 주소를 적어놓고 인근에 가게되면 다른 답사와 함께 할 생각이었다.

    네비 주소로 찾아갔지만 현장에서는 나뭇잎이 무성하여 아무것도 안보인다. 할 수 없이 스마트폰으로 

    방향을 찾아보고서야 묘를 찾을 수 있었다. 

    이즈음의 묘지 답사는 미리 확실하게 도상연습을 해서 찾아가야 한다.

    현장에 도착하면 능선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묘를 찾기가 여간 힘든게 아니다.

    풍수적으로 의미가 있겠지만 제대로 확인하면서 답사하지 않아 별로 기록할 만한 거리가 없다.

    묘 위치가 약 8부 능선 쯤에 위치하기 때문에 시간이 촉박한 경우 시간계산을 해가면서 다녀와야 한다.

    나무가 너무 우거져 맥선을 타고 돌아볼 엄두가 나지 않고 광주안씨 묘들이 좋은 혈자리에 들어서 있다고

    하는데 찾아들어가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겨울에 지나는 길이 있으면 다시 찾아야 할 곳이다.

    입구 마을에 사당이 위치하고 있고, 대로변에서 마을 입구쪽 들어오는 곳에 신도비가 있다.

    안정복(安鼎福)
    1712년(숙종 38)∼1791년(정조 15). 조선 후기의 실학자.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백순(百順), 호는 순암(順菴)‧한산병은(漢山病隱)‧우이자(虞夷子)‧상헌(橡軒). 제천(提川) 출신.
    1. 가계
    예조참의 안서우(安瑞雨)의 손자이고, 오위도총부부총관 안극(安極)의 아들이며, 모친은 이익령(李益齡)의 딸이다. 이익(李瀷)의 문인이다.
    1717년(숙종 43) 외할머니상을 당하여 어머니를 따라 외가인 영광(靈光) 월산(月山)의 농장에서 생활하다가 1719년 할아버지가 서울에서 벼슬을 하게 됨에 따라, 남대문 밖 남정동(藍井洞)으로 귀경한 뒤 1721년(경종 1) 10세에 처음으로 학문길에 들어섰다.
    그뒤 할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여러 지방을 전전하다가 1736년(영조 12) 25세 때 선영이 있는 광주 경안면(慶安面) 덕곡리(德谷里)에 정착하였다.
    2. 수학과 출사
    그의 집안은 전통적으로 남인이었기 때문에 다른 남인의 집안과 마찬가지로, 그 아버지 때부터 당쟁에 희생이 되어 벼슬길이 끊긴 불우한 집안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부터 공부를 시작하여 경학(經學)은 물론, 역사‧천문‧지리‧의약 등에 걸쳐 넓고도 깊은 경지에 도달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과거에는 단 한번도 응시하지 않았다.
    1746년 35세 때 특히 이익의 문하에 들어가서 공부하면서부터는 학문의 목표를 경세치용(經世致用)에 두고 이를 위해서 진력하였다.
    1749년 처음으로 만령전참봉(萬寧殿參奉)에 부임한 것을 시작으로, 내직으로는 감찰‧익위사익찬(翊衛司翊贊)을 역임하였고, 외직으로는 65세 때에 목천현감(木川縣監)을 지냈다.
    그러나 70세 이후에 받은 통정대부‧가선대부 등의 산직은 고령에 따른 예우에 지나지 않았다. 어쨌든 그는 노령에 들자 80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학문연구와 선비로서 갖추어야 할 몸가짐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3. 실학적 학문관
    그동안 그는 이익의 가르침을 받는 한편, 성호학파(星湖學派)의 여러 학자들과 어울려서 토론하고 학문적 교환을 가지면서 실학의 사상적 영역을 넓혀나갔으며, 경세치용의 구체적인 모색을 위한 사상적 정립을 꾀하여갔다. 그리고 이러한 성과들을 저술로 남기게 되었다.
    그의 저술로는 《순암선생문집(順菴先生文集)》 30권 15책이 있고, 《동사강목(東史綱目)》‧《하학지남(下學指南)》‧《열조통기(列朝通紀)》‧《임관정요(臨官政要)》‧《계갑일록(癸甲日錄)》‧《가례집해(家禮集解)》 등이 있다.
    이밖에 그가 지은 《잡동산이(雜同散異)》와 《성호사설유선(星湖僿說類選)》 등도 안정복을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책들이며, 문집에 수록되어 있는 《천학고(天學考)》‧《천학문답(天學問答)》은 그의 주변을 위협하였던 천주교의 박해와 안정복과 같은 전통적 조선학인의 서학(西學)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는 데 중요한 저술이기도 하다.
    4. 평가
    그는 18세기 조선 후기에 살면서 사상적으로 무던히도 고민하였던 학자이며 사상가였다.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봉건체제가 무너져가고 있던 제도적 모순과, 중국을 통해서 전래되고 있던 이단적(異端的)인 서학의 충격 속에서 조선시대의 전통적 가치와 유교이념을 되살리되, 이를 합리적으로 개진하기 위해서 고민하였다.
    특히, 그는 역사적 현실을 실증적으로 새로 정립해서 정신적인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하여 《동사강목》과 《열조통기》를 편술하였고, 경사(經史)의 부연적인 측면을 위해서 《잡동산이》를 지었으며, 행정에 임하여 취해야 할 목민관(牧民官)의 자세를 《임관정요》에 담았다.
    목천현감을 지낼 때에는 향약(鄕約)을 실시하여 농촌을 자치적인 유교의 실천세계로 기대하기도 하였다.
    당시는 이른바 실학의 학풍이 선구적인 학자‧사상가들에 의해서 개진, 선양되고 있었는데, 그는 이러한 실학의 한 지도자인 이익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여 이를 구체적으로 밝히고자 하였다. 그렇지만 성호학파에 속하였던 그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천주교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비판적이었다.
    그는 철저한 주자학자였고 전통성을 고집하는 전통적인 조선학인이었다. 오늘날 그의 주요한 저술과 편찬물은 거의 전해지지만, 그의 연보에 전해오는 저술과 황필수(黃泌秀)가 《하학지남》에 적어놓은 저술목록과, 그리고 그의 일록 등에서 전해오는 저술목록과는 일치하지 않고 있다.
    이밖에 그의 사상적 편력을 찾아볼 수 있는 그의 일부 저작물이 아직도 발견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불행하였던 시대에 살았지만, 사상적으로는 비교적 자유스럽고 개방적인 시대에 산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가 역사상에 차지하는 비중은 정치적 행적이나 정책적 업적보다는 학문적‧사상적인 공헌과 영향에 있다고 하겠다.
    이에 정통성으로 대표되는 그의 역사적 감각과 모든 학문과 사상체계를 합리적이고 실증적으로 정립하고자 하였던 학구적 방법은 당시의 학풍에서도 매우 뛰어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관리자(연락처) 

       미지정
       문숙공 안정복 묘
       경기도 광주시 중대동197-19
       광주안씨


     

     

     

     

     

     

     

     

     

    ▼ 마을 입구쪽에 신도비 3개가 있다.  좌로부터 익헌공 안윤덕, 광양군 안황, 사간공 안성...

    ▼ 익헌공 안윤덕 신도비

    광양군 안황 신도비...

    사간공 안성 신도비...

     

    ▼ 문숙공 안정복 묘 전경

    ▼ 문숙공 안정복 묘 장명등

    ▼ 문숙공 안정복 묘

    ▼ 문숙공 안정복 묘비

    ▼ 문숙공 안정복 묘 전경

    ▼ 문숙공 안정복 묘 석물... 묘역은 근자에 새로 정비하여 석물들이 최근에 세운 것이다.

    ▼ 문숙공 안정복 묘 측경

    ▼ 문숙공 안정복 묘 곡장 뒷쪽

    ▼ 문숙공 안정복 묘 후경.. 날씨가 흐리고 나무가 우거져 조망이 안된다.

    ▼ 문숙공 안정복 묘 후경에 조망이 되지않아 내려오면서 조안산을 바라봤다. 이 돌혈의 묘는

    올라가보지 못했지만 안신행의 묘로 알려져 있다. 겨울에 한번 와 봐야할 곳이다.

    ▼ 문숙공 안정복 묘 조안산.. 날씨가 흐려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 광주안씨 재실 앞에 안정복선생 숭모비가 세워져 있다.

    ▼ 안정복선생 숭모비

    ▼ 안정복선생 강학소터

    ▼ 광주안씨 재실 입구...두 물이 합수하는 지점에 있다.

    ▼ 광주안씨 재실 출입문

    ▼ 광주안씨 재실 사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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