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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용인]이한응열사 묘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2. 9. 14. 10:00
이한응열사 묘
이한응열사 묘를 찾아가는 길은 네비에 잘 나오는 것 같아 그냥 갔는데 엉뚱한 곳으로 안내한다.
부근까지는 네비에 의존해 가다가 마을 길에 접어들면 표지판을 찾아 그대로 가야한다.
마을길 옆에 차를 세우고 밭둑길을 따라 조금 걸어들어가면 묘역이 나온다. 밖에서 묘역이 보이지않아
처음가는 사람은 찾기 곤란하다. 인근에 사시는 분들이 묘를 잘 알고 계셔서 지역분들께 여쭤보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어느 지역에 가서 주민들께 묘역에 대해 물어보면 자세히 알고 계시는 주민이 있는 반면 문화재인데도
전혀 묘역에 대해 모르는 주민들이 있는 곳이 있다. 주민의 수준까지 논할 수는 없지만 문화재에 관심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을 정도의 생활을 한다는 것을 반증한다.
문화재에 대한 관심도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이 되어야 그 차순위로 생각하는 것이리라...
이제는 온고이지신의 자세로 미래를 가늠해볼 수 있는 역사에 관심을 기울여야 될 성 싶다.
이한응(李漢應)
1874년(고종 11)∼1905년. 한말의 외교관‧항일우국지사. 본관은 전의(全義). 일명 한응(漢膺). 자는 경천(敬天), 호는 국은(菊隱). 경기도 용인 출신. 이경호(李璟鎬)의 아들이다.
1892년 관립영어학교(官立英語學校)를 졸업하였다.
1894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1897년 한성부주사가 되고, 1899년 관립영어학교 교관으로 전출하였다.
1901년 영국‧벨기에 주차공사관3등참사관(駐箚公使館三等參事官)에 임명되어 영국의 런던에 부임하였다.
1903년에는 통훈대부에서 통정대부로 가자(加資)되었고, 1904년 주영공사 민영돈(閔泳敦)의 귀국으로 서리공사에 임명되어 대영외교에 모든 책임을 지고 활약하였다.
1904년 2월 한일의정서가 강제체결되어 한국의 독립이 흔들리자 영국 및 여러 외국과의 유리한 외교활동을 전개하기에 노력하였다.
그해 8월 제1차한일협약이 강제로 성립되어 일제가 한국의 주권을 잠식하자 각국에 주재하는 우리 공사들에게 전신으로 연락하여 한국 외교를 위하여 재외사절단이 공동항쟁을 하도록 토의하고, 영일동맹의 부당함을 들어 영국정부에 항의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어 외교권이 강탈되자, 그 치욕과 망국의 한을 참을 길 없어 귀국하기를 단념하고 임지에서 음독자결하였다.
이러한 소식이 국내에 알려지자 뒤이어 민영환(閔泳煥)‧조병세(趙秉世) 등도 순국하고 전국 각처에서 분사자가 뒤따랐다. 주영한국공사관 명예총영사 마틴턴의 주선으로 유해가 고국으로 돌아와 경기도 용인에 안장되고, 가선대부 내부협판에 추증되었으며, 장충단(奬忠壇)에 배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관리자(연락처) 용인시 황토유적 제49호 이한응열사 묘 경기도 용인시 이동면 덕성리 산70-1(길옆에 차를 세우고 걸어감) 전의이씨
▼ 풀이 우거져 볼품이 없게된 이한응열사 묘..
▼ 이한응열사 묘 안내판
▼ 이한응열사 묘 전경
▼ 이한응열사 묘 상석...
▼ 국은 이한응열사 묘라고 새겨진 상석.. 글자체가 아주 멋있다.
▼ 이한응열사 묘 석물..
▼ 이한응열사 묘비
▼ 이한응열사 묘 도두.. 대부분 곡장은 도두 앞쪽에 두는게 보통인데 특이하게 도두 뒷쪽으로 곡장을 둘렀다...
▼ 이한응열사 묘 측경
▼ 이한응열사 묘 후경
▼ 이한응열사 묘 청룡쪽, 백호쪽 후경
▼ 이한응열사 묘 아랫쪽에는 양아들 이상룡 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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