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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리공원묘지#20]만해 한용운(韓龍雲) 묘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2. 11. 3. 10:00
만해 한용운(韓龍雲) 묘
만해 한용운선생은 대한민국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인물이다. 특히나 스님으로 알기보다는 시인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중고등학교 때 님의침묵이나 알수없어요 같은 시를 한번쯤은 접해봤을 것이다.
망우리를 처음 왔을 때 만해 한용운, 소파 방정환선생 묘가 망우리에 있다는 것을 알고 무척 흥분했던 기억이 새롭다. 공동묘지에는 이름없는 분들만 뭍히는 것으로 알고 있던 때였다. 또한 이곳에 만해선생 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인 묘도 있다는 것을 알고 무척 당황했던 기억이 새롭다.
예전에는 만해선생 묘역 앞에 개나리로 담을 만들어서 무척 답답했고 한강이 보이지 않았는데 어느 날인가 개나리를 다 제거하고 시원스럽게 만들어 놨다. 답사객이나 시민들 입장에서는 시원스럽게 해서 보기 좋지만 이곳처럼 높은 곳에서는 앞이 뻥 뚫린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아무튼 지금은 시원스럽게 되어서 가슴은 후련하다.
사진을 찾기 힘들어 새로 찍었는데 풀이 우거진 것이어서 다시 가서 또 찍어왔다. 이래저래 만해선생 묘는 무시로 드나들고 있으니 그 분의 정신을 하나라도 음미하면서 익힐수만 있다면 다행이런만...
만해 한용운(韓龍雲)
1879년(고종 16)∼1944년. 승려‧시인‧독립운동가. 본관은 청주(淸州). 본명은 한정옥(韓貞玉), 아명은 한유천(韓裕天). 법명은 용운(龍雲), 법호는 만해(萬海)‧만해(卍海). 충청남도 홍성 출신. 한응준(韓應俊)의 아들이다.
1. 성장기의 사회환경
유년시대에 관해서는 본인의 술회도 없고 측근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유년시대는 대원군의 집정과 외세의 침략 등으로 나라 안팎이 어수선한 시기였다. 그 불행한 시대적 배경과 사회적 여건은 결국 그를 독립운동가로 성장시킨 간접적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4세 때 임오군란이 일어났으며, 6세 때부터 향리 서당에서 10년 동안 한학(漢學)을 익혔다.14세에 고향에서 성혼의 예식을 올렸다.
16세 되던 해 동학란(東學亂)과 갑오경장이 일어났다. ‘나는 왜 중이 되었나.’라는 그 자신의 술회대로 세상에 대한 관심과 생활의 방편으로 집을 떠나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입산하여 처음에는 머슴으로 일하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1906년 동국대학교 전신인 명진학교 단기과정인 보조과 출신으로 동국대 제1회 졸업생이다. 1908년 봄에 일본 조동종대학(현 고마자와 대학)으로 유학 갔다가 6개월만에 귀국하였다. 1918년 동국대학교 전신인 중앙학림의 동창회인 일심회(一心會) 초대 회장을 6개월 역임하였고, 1924년 조선불교청년회 총재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1930년에 항일비밀결사단체인 만당(卍黨)의 당수가 되었다.
2. 득도와 저술
출가 직후에는 오세암에 머무르면서 불교의 기초지식을 섭렵하면서 선(禪)을 닦았다.
이후 세계에 대한 관심이 깊은 나머지 블라디보스톡 등 시베리아와 만주 등을 순력하였다.
27세 때 재입산하여 설악산 백담사(百潭寺)에서 연곡(連谷)을 은사로 하여 정식으로 득도(得度)하였다. 불교에 입문한 뒤로는 주로 교학적 관심(敎學的關心)을 가지고, 대장경을 열람하였으며, 특히 한문으로 된 불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 즉 불교의 대중화작업에 주력하였다.
1910년에는 불교의 유신을 주장하는 논저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였다.
36세 때 《불교대전(佛敎大典)》과 함께 청나라 승려 내림(來琳)의 증보본에 의거하여 《채근담(菜根譚)》 주해본을 저술하였다.
3. 문화사업과 독립운동
30세 되던 해에 안중근(安重根)의 장거가 있었는데, 그해 5월부터 약 6개월간 일본을 방문하였다. 주로 동경(東京)과 경도(京都)를 중심으로 새로운 문물을 익히고, 일본의 풍물을 몸소 체험하였다. 일본여행 중에 3‧1독립운동 때의 동지가 된 최린(崔麟) 등과 교우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 국권은 물론, 한국어마저 쓸 수 없는 피압박민족이 되자, 그는 국치의 슬픔을 이기지 못한 채 중국 동북삼성(東北三省)으로 갔다. 이곳에서 만주 지방 여러 곳에 있던 우리 독립군의 훈련장을 순방하면서 그들에게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심어주는 일에 전력하였다.
40세 되던 해에 월간 《유심(惟心)》이라는 불교잡지를 간행하였다. 불교의 홍포와 민족정신의 고취를 목적으로 간행된 이 잡지는 뒷날 그가 관계한 《불교》 잡지와 함께 가장 괄목할만한 문화사업의 하나이다. 《유심》지는 3호를 끝으로 폐간되었으나 불교에 관한 가장 종합적인 잡지였다.
41세 때 3‧1독립운동이 있었는데, 백용성(白龍城) 등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하여 참여하였다. 그는 독립선언문의 내용을 둘러싸고 최남선(崔南善)과 의견충돌을 하였다.
내용이 좀더 과감하고 현실적이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으나, 결국 마지막의 행동강령인 공약 3장만을 삽입시키는 데 그쳤다.
42세 때 그 만세사건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재판을 받아 3년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출옥 후에도 일본경찰의 감시 아래에서 강연 등 여러 방법으로 조국독립의 열변을 토하였다.
47세 때인 1926년 근대한국시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였다. 이곳에 수록된 88편의 시는 대체로 민족의 독립에 대한 신념과 희망을 사랑의 노래로서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49세 되던 해 일제에 대항하는 단체였던 신간회(新幹會)를 결성하는 주도적 소임을 맡았다. 그는 중앙집행위원과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의 자리를 겸직하였다. 나중에 신간회는 광주학생의거 등 전국적인 민족운동으로 전개, 추진되었다.
52세 때 《불교》라는 잡지를 인수하여 그 사장에 취임하였다. 그전까지는 권상로(權相老)가 맡아오던 이 잡지를 인수하여 불교의 홍포에 온 정력을 기울였다.
특히, 고루한 전통에 안주하는 불교를 통렬히 비판하였으며, 승려의 자질향상‧기강확립‧생활불교 등을 제창하였다.
55세 때 부인 유씨(兪氏)와 다시 결합하였다.
57세 때 《조선일보》에 장편소설 〈흑풍(黑風)〉을 연재하였고, 이듬해에는 《조선중앙일보》에 장편 〈후회(後悔)〉를 연재하였다. 이러한 소설을 쓴 까닭은 원고료로 생활에 보탬을 얻기 위한 까닭도 있지만 그보다도 소설을 통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려는 의도가 더 큰 것으로 이해된다.
60세 때 그가 직접 지도해오던 불교계통의 민족투쟁비밀결사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이 일어났고, 많은 후배동지들이 검거되고 자신도 고초를 겪었다.
1939년 회갑을 맞으면서 경상남도 사천군 다솔사(多率寺)에서 몇몇 동지들과 함께 자축연을 가졌다. 다솔사는 당시 민족독립운동을 주도하던 본거지였다.
1944년 5월 9일 성북동의 심우장(尋牛莊)에서 중풍으로 죽었다. 동지들에 의하여 미아리 사설 화장장에서 다비된 뒤 망우리 공동묘지에 유골이 안치되었다. 친하던 벗으로는 이시영(李始榮)‧김동삼(金東三)‧신채호(申采浩)‧정인보(鄭寅普)‧박광(朴珖)‧홍명희(洪命熹)‧송월면(宋月面)‧최범술(崔凡述) 등이 있었으며, 신채호의 비문은 바로 그가 쓴 것이다.
5. 불교사상(발췌하여 수록함)
① 불교행정조직혁신론: 현행의 본말사제도(本末寺制度)를 그냥 두고 중앙에 통제기구를 신설하자는 것.
② 사원운영의 혁신론: 불교가 시대를 계도(啓導)하려면 그 운영과 조직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이 그가 주장한 유신의 골자이다.
③ 청년불교의 제창: 친일적 경향의 원종에 대항하여 조선불교청년동맹(朝鮮佛敎靑年同盟)을 결성한 것은 1914년이었다.
④ 선교진흥론(禪敎振興論): 불교의 진흥을 위한 필수불가결의 요건은 수행 이상을 확립하는 일이다.
⑤ 경전의 한역: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대장경의 우리말 번역이다.
6. 사상적 의의(생략)
7. 문학세계와 문학사적 위치
한용운 문학의 특징은 불교사상과 독립사상이 탁월하게 예술적으로 결합된 데서 드러난다. 자유와 평등사상, 민족사상과 민중사상으로 요약되는 불교적 세계관과 독립사상은 한용운문학의 뼈대이자 피와 살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의 문학은 불교사상과 독립사상, 문학사상이 삼위일체를 이룬다는 점이 특징이라는 뜻이다.
1926년에 간행된 《님의 침묵》은 이별하는 데서 시작되어 만남으로 끝나는 극적 구조성을 지닌 한편의 연작시로 볼 수 있다. 곧 시집 《님의 침묵》은 시 전편이 ‘이별―갈등―희망―만남’이라는 구조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소멸〔正〕―갈등〔反〕―생성〔合〕이라는 변증법적 지양을 목표로 하는 극복과 생성의 시편들이라 할 수 있다. 이별은 그의 시 전체의 대전제로서 만남에 이르는 방법적인 원리이며 사랑을 완성하는 자율적인 법칙인 것이다.<중략>
이밖에 그는 현대시 〈님의 침묵〉과는 별도로 다수의 한시와 시조, 그리고 〈죽음〉‧〈흑풍〉‧〈박명〉등의 소설도 남기고 있는데 이들 역시 불교사상과 독립사상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처럼 그의 문학은 험난한 역사를 살아가는 예지와 용기를 가르쳐주며, 현실적인 생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신념과 희망을 불러일으켜 준다는 점에서 참된 의미를 가진다.<중략>..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비지정
문화재명칭
만해 한용운(韓龍雲) 묘
소재지
서울시 중랑구 망우동 망우리공원묘지(묘지번호 No.204411)
관리자(연락처)
망우리묘지관리소
▼ 만해 한용운(韓龍雲) 묘 위치 (지도#20번)
20 한용운(韓龍雲) 204411 만해(萬海) 1879~1944 승려, 독립운동가 길옆 연보비 윗쪽
▼ 만해 한용운(韓龍雲) 묘 위치
▼ 만해 한용운(韓龍雲) 연보비
▼ 만해 한용운(韓龍雲) 묘 전경
▼ 만해 한용운(韓龍雲) 묘
▼ 만해 한용운(韓龍雲) 묘 측경
▼ 만해 한용운(韓龍雲) 묘비
▼ 만해 한용운(韓龍雲) 묘지번호
▼ 만해 한용운(韓龍雲) 묘 후경
▼ 만해 한용운(韓龍雲) 묘 아래에 연보비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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