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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망우리공원묘지#18]죽산 조봉암(曹奉岩) 묘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2. 11. 1. 10:00


    죽산 조봉암(曹奉岩) 묘

     

    사연이없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러니 오죽하면 핑계없는 무덤이 없다라는 속담이 있을까? 이곳 묘 또한 기구한 운명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곳이다. 조봉암 선생은 공산당으로 몰려 사형을 당했는데 최근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아 신원이 회복되었다. 그래서 묘비에도 아무런 행적을 기록하지 않은 것일까?

    길가에 있어서 망우리를 찾은 사람들은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묘이다.

    망우리는 산세가 남북으로 뻗어있어서 대부분의 묘들은 동향이나 서향으로 좌향을 자리잡을 수밖에 없는데 이곳은 특이하게 남향으로 앉아있다. 

    망우리 묘지를 찬찬히 살펴보니 이곳도 무질서하게 자리를 배치한게 아니라 어떤 권력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중요한 자리, 좀 괜찮은 자리는 비교적 넓게, 양지 바른 곳에 배치가 되었고 힘없고 백없는 사람들은 귀퉁이에 겨우 몸하나 누워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사람은 죽어서도 다 등급이 있기 마련이다. 공동묘지도 이러한데 국립묘지나 집안 묘지에서는 오죽할까...

    조봉암선생의 신원이 회복되었으니 묘비에도 그의 행적이 기록될 날도 머지않았다고 본다.

     

    죽산 조봉암(曹奉岩)

     

    1898년∼1959년. 정치인. 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죽산(竹山). 경기도 강화 출신. 빈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YMCA 중학부 재학중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여하였다가 1년간 투옥되었다.

    그뒤 일본에 건너가 주오대학(中央大學)정경학부에서 공부하던 중 동경유학생들이 조직한 사회주의‧무정부주의계열의 흑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흑도회가 해산되자 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하여 항일단체인 조선노동총동맹 문화부책을 맡아 노동운동을 하였다.

    1922년 소련령 웨르흐네스크에서 열린 고려공산당 합동회의에 국내파 대표로 참가하여 공산당 파벌 통일에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24년 코민테른의 지시로 모스크바 동방지도자공산대학 단기과정을 이수하였다. 그뒤 귀국하여 신사상연구회‧북풍회 등 사회주의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이 두 단체가 통합한 화요회에서는 창설주역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조선공산당 조직에 참여하였으며, 조선공산당 1차당 창당을 주도하였다.

    1926년 제2차 조선공산당을 수습, 조직하고 5월에 만주에 가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조직하였으며 그 책임비서가 되었다. 그뒤 코민테른의 지시로 상해로 가서 코민테른 원동부(遠東部)의 조선대표도 겸직하였다. 1926년 6‧10만세운동에 제2차조선공산당 조직이 일본경찰에 의하여 다시 해체되자 제3차당인 ML당조직에 참여하였으나 국내당과 마찰을 빚어 지도기능을 잃었다. 그뒤 코민테른의 결정에 따라 1국1당주의 원칙에 따라 중국공산당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1932년 일본 영사경찰에 의하여 상해에서 붙잡혀 신의주형무소에서 7년간 옥살이를 하였다. 그 뒤 고향에서 김조이(金祚伊)와 결혼하고 인천에서 은거하며 대회활동이 중지되었다.

    1945년 2월 일본 헌병대에 검거되어 수감되었다가 광복과 더불어 풀려났다. 광복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에서 활동하였고, 1946년 사회주의계열인 민족전선에서 활약하였으며, 그해 5월 박헌영(朴憲永)의 공산주의노선을 공개서한을 보내어 비판하였다. 1개월 후인 6월에는 조선의 건국은 ‘민족 전체의 자유생활보장’을 내걸고 노동계급의 독재, 자본계급의 전제를 다같이 반대한다는 중도통합노선을 주장하고 조선공산당과 결별하였다.

    그해 8월 이후부터 미군정당국의 좌우파합작을 지지하고 협력하였으며, 1948년 5‧30선거 때 인천에서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초대 농림부장관이 되었다. 1949년 농림부 예산 전용이 문제가 되어 그 책임을 지고 장관직에서 물러났고, 1950년 제2대국회에서 국회부의장에 선임되었다. 1952년 제2대정부통령 선거에 입후보하였다가 차점으로 낙선되었고, 1956년 12월 혁신계 인사들로 구성된 진보당(進步黨)창당준비위원회를 발족, 제3대정‧부통령선거에 박기출(朴己出)을 부통령후보로 내세워 대통령에 출마하였으나 다시 낙선하였다. 1957년 진보당을 창당하고 위원장에 선임되었으며, 1958년 5월 국회의원선거에 지역구후보를 내세워 원내에 진출하였다.

    그러나 1958년 1월 간첩죄 및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진보당원 16명과 함께 검거되어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 1959년 11월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후 사형 집행 52년 후인 2011년 1월 2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국가변란과 간첩 혐의에 대해 전원 일치로 무죄가 선고되어 신원이 복권되었다.

    저서로는 《공산주의 모순발견》‧《우리가 나아갈 길 》‧《우리의당면과제》 등이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비지정

    문화재명칭

    죽산 조봉암(曹奉岩) 묘

    소재지

    서울시 중랑구 망우동 망우리공원묘지(묘지번호 No.204717)

    관리자(연락처)

    망우리묘지관리소


    ▼ 죽산 조봉암(曹奉岩) 묘 위치 (지도#18번)  

    18 조봉암(曹奉岩)  204717 죽산(竹山) 1898~1959 독립운동가, 정치가,  북쪽순환도로 상 길옆

    ▼ 죽산 조봉암(曹奉岩) 묘 위치

    ▼ 죽산 조봉암(曹奉岩) 연보비

    ▼ 죽산 조봉암(曹奉岩) 묘 ... 동원천약수터 푯말앞에서 바라본 풍경.. 동원천약수터 밑으로 함세덕 묘를 간다.

    ▼ 죽산 조봉암(曹奉岩) 묘 원경

    ▼ 죽산 조봉암(曹奉岩) 묘역 입구

    ▼ 죽산 조봉암(曹奉岩) 묘 측면

    ▼ 죽산 조봉암(曹奉岩) 묘 전경

    ▼ 죽산 조봉암(曹奉岩) 묘비.. 묘비인데 행적이 전혀 없다.

    ▼ 죽산 조봉암(曹奉岩) 묘 망주석

    ▼ 죽산 조봉암(曹奉岩) 묘 장명등...

    ▼ 죽산 조봉암(曹奉岩) 묘지번호

    ▼ 죽산 조봉암(曹奉岩) 묘 입수도두

    ▼ 죽산 조봉암(曹奉岩) 묘 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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