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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망우리공원묘지#39]삼학병(김명근,박진동,김성익)의 묘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2. 11. 28. 10:00

    삼학병(김명근,박진동,김성익)의 묘

     

    김상용 묘 아래로 가면 철조망이 나오는데 그 안쪽에 묘 3기가 나란히 있다. 철조망을 지나치지 말고

    철망을 따라 들어가면 삼학병 묘에 이를 수 있다. 묘라고 해서 다 똑같은 것이 아니다.

    어떤 묘는 집보다도 더 아늑하게 느껴지는 묘가 있고 어떤 묘는 월하의 공동묘지에 나오는 것처럼 오싹한

    기분이 드는 묘가 있다. 여러 묘를 돌아다니다 보면 유난히 음기가 세게 느껴지는 묘들이 있다. 이곳도

    그 사연이 기구해서인지 음기가 상당히 센 곳 중의 한곳이다. 묘역도 계곡 인근에 있어서 수기가 많고

    해가 일찍 넘어가는 곳이라 오후에 조금만 늦게 가도 어둑해지는 곳이다.

    삼학병에 대한 이야기는 <블로그 기분좋은나무공간>에 자세히 나와서 그 글을 옮겨온다. 다른 곳에는

    특별한 내용이 없는데 <블로그 기분좋은나무공간>에 제일 잘 나온것 같다.

    도서 <그와 나 사이를 걷다:김영식 지음,골든 에이지>에 소개되어 널리 알려진 삼학병에 대한 이야기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망우리공원묘지를 설명하자니 넣지않을 수 없어서 다른 분이 올린 글을 인용하여 올리니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삼학병(김명근,박진동,김성익)의 묘

    김명근( No: 109954 )
    박진동( No: 109955 )
    김성익( No: 110014 ) 
                                                                   

    학병 3인의 무덤은 왼쪽부터 ‘학병(學兵) 김명근(金命根), 박진동(朴晋東), 김성익(金星翼) 의사지묘(義士之墓)’라고 쓰인 비석과 함께 상석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세 비석의 뒷면에는 ‘1946년 1월19일 祖國을 爲하여 죽다’라고 똑같이 씌어 있다. 출생년도나 본관도 씌어 있지 않은 비석이다.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일제 때 학병으로 나갔다가 전사한 사람도 아니고 6·25전쟁 때 학도병으로 나가 전사한 사람도 아니다. 그럼 전쟁과 무관한 이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광복 후인 1946년 1월19일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946년 1월19일은 ‘학병동맹사건’이 일어난 날이다. 학병동맹은 1944년 일제의 학병제도 시행 후 전쟁에 나갔다가 광복 후 돌아온 학생들의 모임. 당시 학병에 징집됐다 돌아온 학생들은 일제의 희생자로 간주됐다. 더구나 이들 대다수는 혈기왕성한 젊은 지식인층이었기에 광복 후 그들의 정치적 입김은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시절 지식인 중에 좌파가 많았던 것처럼 학병동맹도 좌파 정치세력의 하나로 치부됐다. 그 탓에 학병동맹은 결국 우리에겐 잊혀진 존재가 되고 말았다.

    1945년 12월27일,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국의 신탁통치를 발표하자 남한 사회는 반탁의 우파와 찬탁의 좌파로 갈려 격렬한 대립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그 얼마 후인 1946년 1월18일 결국 터질 게 터지고 말았다. 반탁전국학생연맹(위원장 이철승)과 찬탁파인 좌익 학병동맹원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양쪽에서 40여 명이 부상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 학병동맹이 총기를 소지했다는 정보에 경찰은 이튿날인 19일 새벽 서울 삼청동의 학병동맹본부를 포위했고, 학병과 대치하는 과정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날 경찰의 총격으로 학병동맹원 3명이 피살됐다. 그 세 희생자가 바로 이곳 망우리에 묻힌 삼학병이다.

    역사의 한 페이지에서 사라진 학병동맹사건은 그 피해자의 본명조차 잘못 알려져 있다. ‘광복기 시의 현실인식과 논리’(박용찬, 2004)는 사회과학대사전에 의거해 삼학병의 이름을 박진동, 김성익, 이달(李達)이라고 써 놓았지만, 실제 무덤 비석에는 이달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대신 김명근이 씌어 있다. 어느 것이 맞을까. 1946년 1월29일자 조선일보는 그에 대한 해답을 던져준다. 이달의 본명이 김명근이었다. 삼학병 중 김성익은 학병동맹의 부위원장이었고, 박진동은 진주고보 11회 졸업생으로 학병동맹의 군사부장이었다. LG그룹 일가를 취재한 2005년 5월16일자 서울신문은 ‘박진동은 남해군수를 지낸 박해주의 아들로 LG그룹 창립자인 구인회 회장의 장녀 양세(당시 15세)와 결혼하였으나, 광복 후 좌우익 투쟁 중 학병동맹본부 피습 사건으로 사망하였다’라고 보도했다. 그리고 그 동기 백석주는 후일 증언을 통해 박진동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19일 아침 7시 학병동맹회관에 이르니 전쟁터를 방불케 할 정도로 어지러웠다. 경찰은 모두 철수하고 없었고 박진동은 마루에 쓰러져 있었는데 눈을 감지 못하고 있어 눈을 감겨주었다.”

    좌우파가 대립하던 혼돈 정국에서 벌어진 이 사건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첫 반응은 ‘우파가 좌파를 진압하려 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시대상황의 희생물’이라고 보는 시각이 대다수였다. 그러나 후에 우파 정권은 미군정과 함께 학병동맹을 해산시켰고, 이후 우리는 그 어디에서도 학병동맹사건에 대해 기억할 단서를 놓쳐버렸다. 다만 망우리공원 한쪽 구석에 덩그러니 선 비석만이 이들이 ‘조국을 위해 죽은’ 학병임을 알리고 있을 따름이다. 그렇게 그들은 죽어서도 오랫동안 잊힌 존재가 됐다. 좌이건 우이건 민주정부를 추구한 것은 다를 바가 없는데, 이념이 달라 대립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세 명은 죽어서도 아무 말이 없다.

    세 학병의 장례식은 1946년 1월31일 거행됐다. 그해 조선일보 2월1일자는 ‘천일(天日)조차 무색(無色)하다. 3학병 연합장의 성대’라는 제목으로 장례식을 상세히 보도하며 애도했다. 그리고 그 기사의 오른쪽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

    ‘좌우익은 회개하라. 난국에 비분. 비정치인사 궐연(蹶然)...

    <네이버블로그 기분좋은나무공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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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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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지정
      삼학병(김명근,박진동,김성익)의 묘

       서울시 중랑구 망우동 망우리공원묘지(묘지번호 No.109954, 199955, 110000)

       망우리묘지관리소


     

     

     

     

     

     

     

     

     

    ▼ 삼학병(김명근,박진동,김성익)의 묘 위치 (지도#39번) 

    39 삼학병 109954, 199955, 110000 김명근,박진동,김성익  김상용 묘 아래 더 내려가면  철책->철책안으로 무덤 셋이 나란히 보임

    ▼ 삼학병(김명근,박진동,김성익)의 묘 위치 

    ▼ 삼학병(김명근,박진동,김성익)의 묘  전경

    ▼ 삼학병 김명근의 묘

    ▼ 삼학병 박진동의 묘

    ▼ 삼학병 김성익의 묘

    ▼ 삼학병(김명근,박진동,김성익)의 묘 망주석

    ▼ 삼학병(김명근,박진동,김성익)의 묘 측면

    ▼ 삼학병(김명근,박진동,김성익)의 묘비에는 똑같이 1946.1.19 조국을 위하여 죽다라고 쓰여 있다.

    ▼ 삼학병(김명근,박진동,김성익)의 묘 입수도두

    ▼ 삼학병(김명근,박진동,김성익)의 묘 후경.. 묘역은 넓고 사성은 좁아서 한 화면에 잡히지 않는다.

    ▼ 가운데가 박진동, 좌청룡 위치가 김성익의 묘

    ▼ 가운데 박진동, 백호쪽이 김명근의 묘

    ▼ 삼학병(김명근,박진동,김성익)의 묘 후경

    ▼ 삼학병(김명근,박진동,김성익)의 묘 측경

     

    ▼ 삼학병(김명근,박진동,김성익)의 묘에서 바라본 철조망 입구.. 철조망을 지나치지 말고 담을 타고 들어와야 한다.

    ▼ 삼학병 묘를 가려면 철망과 왼쪽 흙더미 사이 작은 틈새로 들어가야 한다.

    ▼ 철망 건너로 삼학병 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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