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우리공원묘지#41]수암 최백근(崔百根) 묘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2. 11. 30. 10:00
수암 최백근(崔百根) 묘
<네이버 블로그 기분좋은나무공간>에서 수암 최백근선생 묘를 처음 알고 답사하기 위해 묘지번호만으로
찾았지만 시간만 허비하고 그냥 되돌아 왔다. 다음번에 다시 찾아갔는데 마침 관리실에 관리인께서
알려줘서 한번에 찾을 수 있었다. 미리 묘비와 주변 사격을 눈여겨 놓은 덕분에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묘지답사를 하다보면 주위 사격이 특이하면 묘지를 찾는데 별 어려움이 없다. 오히려 주위에 특이한 나무나
건물, 묘비 등이 없이 오직 묘만 있는 경우라든지 평이한 나무만 있는 경우에는 여러번 허탕을 친 뒤에야
묘지를 답사할 수 있게 된다.
최백근선생은 5.16이후 군사혁명 때 혁명재판에 의해 사형이 집행된 통일운동가이다. 그와 함께 사형이
집행된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은 지난 2008년 재심을 통해 무죄판결을 받았다 한다. 최백근 선생도 고향
광양에서 신원복원을 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고 하니 추이를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최백근(崔百根)
1914년~1961년 (당시 48세)
1914년 2월 20일 전남 광양 고량면 태인도(현 동광양시 태인동)에서 출생
1932년 광주학생운동 응원동맹휴학을 주도한 혐의로 경찰에 연행, 고문으로 한 쪽 고막파열.
4월에는 치안유지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진주소년원에서 6개월간 복역
1933년 광주고보 (광주서중)에 진학. 일본 와세다대학에 진학, 재학중 비밀결사 독서회사건으로 중도에 귀국
1936년 서울외국어전문학원 입학
1938년 '전남지역 사회운동협의회' 사건으로 은거생활
1945년 건국준비위원회 참여
1946년 민주주의민족전선 서울시 대표, 근민당에 입당, 성북구 부위원장 및 당중앙위원과 총무부차장으로 활동
1948년 통일독립운동자협회의 실무비서, 평양 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 참여,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
1953년 9월14일 북쪽의 밀파간첩혐의로 대구고법에서 징역2년을 선고 받고 복역, 1955년 2월 14일 만기출소
1960년 사회당준비위 구성
1961년 민자통중앙협의회 서울시협의회를 사무국 활동, 한미경제협정 및 반공법 제정반대운동과 5.3일 남북학생회담 지지대회 조직
1961년 5.16군사 쿠테타로 5월22일 체포되어 군사법정에서 사형언도
1961년 12월 21일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와 같은 시각에 집행됨.
전남 광양 고량면 태인도(현 동광양시 태인동)에서 출생하여, 1932년 보통학교 6학년때
광주학생운동의 소식을 접하고 이에 응원동맹휴학을 주도한 혐의로 경찰에 연행, 고문으로 한 쪽 고막이 파열되기도 했다. 4월에는 치안유지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진주소년원에서 6개월간 복역했다. 1933년 광주고보 (현 광주서중)에 진학, 재학중 진보적인 선생님의 주선으로 일본 와세다대학에 진학, 재학중 비밀결사 독서회사건으로 중도에 귀국하여, 서울외국어전문학원을 다님. 졸업 후 비밀조직인 '전남지역 사회운동협의회' 사건으로 은거생활을 하다가 8.15를 맞고, 상경하여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 민주주의민족전선에 서울시 대표로 참여하였다.
여운형이 주도한 근민당에 입당, 성북구 부위원장 및 당중앙위원과 총무부차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48년 이승만의 단정수립에 반대하여 통일독립운동자협회의 실무비서로서 큰 역할을 하고, 평양 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하시는 등 하나의 조국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활동하다, 1953년 9월14일 북쪽의 밀파간첩혐의로 대구고법에서 징역2년을 선고 받고 1955년까지 복역했다. 1960년 4.19를 맞아 활동을 재개하며 사회당준비위 구성하였고, 민자통중앙협의회가 결성되자 바로 서울시협의회를 구성하고 사무국역임. 한미경제협정 및 반공법 제정반대운동과 5.3일 남북학생회담 지지대회 조직하는 등 민족의 자주적 통일을 위하여 가열찬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1961년 5.16군사 쿠테타로 5월22일 체포되어,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12월 21일 오후4시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와 같은 시각에 집행되어 운명했다.
<민주노총 열사추모 홈페이지에서 인용>
혁명재판 [ 革命裁判 ]
5·16 이후 국가재건비상조치법에 따라 이루어진 특별군사재판.
자유당과 민주당 치하의 부정·부패 및 5·16 전후의 반혁명사건을 총괄적으로 입건처리하기 위해 1961년 7월 12일 혁명재판소와 혁명검찰부를 개설한 뒤, 290일간에 걸쳐 1천여 회의 공판을 열고 총 250건을 처리, 62년 5월 10일 재판을 끝냈다. 재판소장 최영규(崔英圭) 소장 이하 43명의 심판관과 검찰부장 박창암(朴蒼岩) 대령 이하 31명의 검찰관이 동원되었으며, 3·15부정선거, 특수반국가행위, 반혁명행위, 부정축재 및 밀수, 공무상 독직, 정치폭력배 등의 사건에 관련된 697명이 입건되었다.
이 재판으로 3·15부정선거 지휘자 최인규(崔仁圭), 경무대 앞 발포책임자 곽영주(郭永周), 정치폭력배 이정재(李丁載)·임화수(林和秀)·신정식(申廷植), 사회당 조직부장 최백근(崔百根),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趙鏞壽), 특수밀수범 한필국(韓弼國) 등은 사형을 언도받아 형이 집행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미지정
문화재명칭
수암 최백근(崔百根) 묘
소재지
서울시 중랑구 망우동 망우리공원묘지(묘지번호 No.111672)
관리자(연락처)
망우리묘지관리소
41 최백근(崔百根) 111672 1914~1961, 민족통일운동가 망우관리사무소 화장실 우측아래-->소나무 보고 내려감-->흰색건물(구리시장애인근로복지센터)뒤쪽-->작은언덕위에 있음 ▼ 수암 최백근(崔百根) 묘 위치 (지도#41번)
▼ 수암 최백근(崔百根) 묘 위치
▼ 수암 최백근(崔百根) 묘 전경
▼ 수암 최백근(崔百根) 묘 가는 길... 관리사무소 화장실 쪽에서 바라보면 가운데에 있는 소나무가 보이는데
그 소나무를 기점으로 하여 내려가면 된다.
▼ 조금 더 내려가면 멀리 직사각형 오석 묘비가 보인다.
▼ 수암 최백근(崔百根) 묘
▼ 수암 최백근(崔百根) 묘표
▼ 수암 최백근(崔百根) 묘표 뒷면
▼ 수암 최백근(崔百根) 묘 측후경...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각이다..
▼ 수암 최백근(崔百根) 묘 측경
▼ 수암 최백근(崔百根) 묘지번호
▼ 수암 최백근(崔百根) 묘 입수도두
▼ 수암 최백근(崔百根) 묘 후경
'답사는 즐거워 > 묘지답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충남 논산]사계 김장생(金長生)선생 묘 일원 (0) 2012.12.03 [망우리공원묘지 묘지터]여성운동가 박원희(부군 사회운동가 김사국) 묘터 (0) 2012.12.01 [망우리공원묘지#40]조각가 권진규(權鎭圭) 묘 (0) 2012.11.29 [망우리공원묘지#39]삼학병(김명근,박진동,김성익)의 묘 (0) 2012.11.28 [망우리공원묘지#38]월파 김상용(金尙鎔) 묘 (0) 2012.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