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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남 예산]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묘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3. 4. 25. 10:00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묘

     

    대한민국풍수지리연합회가 결성된지 만3년이 흘렀다. 초기 연합회 출범의 어려움을 딛고

    극복하여 힘겹게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는 조금씩 자리가 잡혀가는 것 같아 연합회 출범

    발기인의 한사람으로서 마음 뿌듯함을 느낀다.

    연합회 사업으로 1년에 봄, 가을 두번 전체 회원을 대상으로 통합간산을 실시하는데

    지난해 가을에는 대권주자들의 선영, 생가를 통합간산하였고 이번이 다섯번째로 충남

    예산지역의 음양택을 다녀왔다. 약200여명의 회원들이 참여하여 성황을 이뤘다.

    참고로 나는 대풍련에서 민간자격분과위원장을 맡으면서 자격시험을 주관하고 있다.

    작년까지 풍수지리사시험을 2회 치르고 이번 5월에 3회 풍수사시험을 치르게 된다.

    관심있으신 분들은 대풍련 공지사항을 참고하시고 응시원서를 이달말까지 제출하면 된다.

     

    아계 묘역은 흔히 말하는 비보풍수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입구에서부터 삼신도가

    눈에 띄고 묘역은 보토의 흔적이 역력하다.

    많은 회원님들이 이곳에서 갑론을박을 하며 묘역의 길흉화복에 대해 논했는데 서로 다른

    의견이야말로 대풍련이 발전하는데 큰 밑거름이 될거라 확신한다.

    이산해(李山海)
    1539(중종 34)∼1609(광해군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鵝溪)·종남수옹(終南睡翁). 장윤(長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치(穉)이고, 아버지는 내자시정(內資寺正) 지번(之蕃)이며, 어머니는 남수(南脩)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작은아버지인 지함(之菡)에게 학문을 배웠다. 1558년(명종 13) 진사가 되고, 1561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등용되고, 이듬 해 홍문관정자가 되어 명종의 명을 받아 경복궁대액(景福宮大額)을 썼다. 이어 부수찬이 되고 1564년 병조좌랑·수찬, 이듬 해 정언을 거쳐 이조좌랑이 되었다.
    1567년(선조 즉위년) 원접사종사관(遠接使從事官)으로 명나라 조사(詔使)를 맞이한 뒤 이조정랑·의정부사인·사헌부집의·상의원정(尙衣院正)·부교리를 역임하고, 직제학이 되어 지제교를 겸하였다. 이어 교리·응교를 지내고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위해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 전념하도록 휴가를 주던 제도)를 마친 뒤 1570년 동부승지로 승진하였다. 1577년 이조·예조·형조·공조의 참의를 차례로 지내고 대사성·도승지가 되었다.
    1578년 대사간이 되어 서인 윤두수(尹斗壽)·윤근수(尹根壽)·윤현(尹晛) 등을 탄핵해 파직시켰다. 다음 해 대사헌으로 승진하고 1580년 병조참판에 이어 형조판서로 승진하였다. 이듬 해 이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에 오르고, 다시 이조·예조·병조의 판서를 역임하면서 제학·대제학·판의금부사·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를 겸하였다. 1588년 우의정에 올랐고, 이 무렵 동인이 남인·북인으로 갈라지자 북인의 영수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다음 해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이 되었으며, 종계변무(宗系辨誣 : 명나라 ≪태조실록≫과≪대명회전≫에 이성계의 가계가 고려의 권신 李仁任의 후손으로 잘못 기록된 것을 시정하도록 요청한 일))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책록되고,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에 책봉되었다.
    이듬 해 정철(鄭澈)이 건저(建儲 : 세자 책봉) 문제를 일으키자 아들 경전(慶全)을 시켜 김공량(金公諒 : 仁嬪의 오빠)에게 정철이 인빈과 신성군(信誠君)을 해치려 한다는 말을 전해 물의를 빚었으며, 아들로 하여금 정철을 탄핵시켜 강계로 유배시켰다. 한편 이와 관련해 호조판서 윤두수, 우찬성 윤근수와 백유성(白惟成)·유공진(柳拱辰)·이춘영(李春英)·황혁(黃赫) 등 서인의 영수급을 파직 또는 귀양보내고 동인의 집권을 확고히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해 개성에 이르렀으나, 나라를 그르치고 왜적을 침입하도록 했다는 양사(兩司 : 사간원·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면되어 백의(白衣)로 평양에 이르렀으나, 다시 탄핵을 받아 평해(平海)에 중도부처(中途付處)되었다.
    1595년 풀려나서 영돈녕부사로 복직되고 대제학을 겸하였다. 북인이 다시 분당 때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홍여순(洪汝諄) 등과 대북파가 되어 영수로서 1599년 재차 영의정에 올랐다. 이듬 해 파직되었다가 1601년 부원군(府院君)으로 환배(還拜 : 복직되어 제수됨)되었으며, 선조가 죽자 원상(院相)으로 국정을 맡았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신동으로 불렸으며, 특히 문장에 능해 선조조 문장팔가(文章八家)의 한 사람으로 불렸다 한다. 서화도 잘해 대자(大字)와 산수묵도(山水墨圖)에 뛰어났으며, 용인의 조광조묘비(趙光祖墓碑)와 안강의 이언적묘비(李彦迪墓碑)를 썼다. 이이(李珥)·정철과 친구였으나 당파가 생긴 뒤로는 멀어졌다. 저서로 ≪아계집≫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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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묘
      
       한산이씨


     

     

     

     

     

     

     

     

     

    **한산이씨 이산해 가계도
    이계전   이우   이장윤   2남
    이치
        2남
    이지번
      이산해
    (영의정)
      2남 이경전
    (형조판서)
       
       
      4남
    이지함
      2녀 사위
    한음 이덕형

    ▼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묘 안내문...

    ▼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묘... 대풍련 통합간산으로 찾아서 회원들이 많이 보인다. 

    ▼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묘 전경

    ▼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묘

    ▼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묘비... 묘비 어디에서 휘(諱)자(字)가 안보인다. 특이한 것은 묘비에 시호를

    적으려고 칸을 띄워 놨는데 아마도 묘비를 세울 때까지는 시호가 내려지지 않았나 보다. 이산해의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묘비 뒷면

    ▼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묘 앞 상석... 상석 좌우 측면에 귀석(거북모양의 석물)이 있었는데 도난당하고 현재는 새롭게 만든 귀석이 있다. 무슨 의미로 귀석을 놓았을까? 아무도 답을 하지 못한다. 이곳 뿐만이 아니고 재실부근, 후손의 고택 부근에도 귀석이 여럿 보인다. 왜 이곳에는 귀석이 많을까?

    ▼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묘 석물...

     

    ▼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묘 측경...

    ▼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묘 백호쪽 석물...

    ▼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묘 측 후경...

    ▼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묘에서 바라본 조안산...

    ▼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묘역 앞쪽에 있는 방산저수지...

    ▼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묘 비보책으로 만든 연당 삼신도... 삼신도는 곧 도가(道家)의 신선사상(神仙思想)에서 나오는 삼신산을 의미하는데,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를 가리키는 삼산(三山)으로 신선이 거처한다는 전설속의 산이다.

    ▼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묘의 비보책으로 만든 삼신도... 이 연당은 아계 묘가 너무 높아 물이 직거로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

    ▼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묘역으로 오르는 길...

    ▼ 산 아래에 아계(鵝溪)의 사당이 있고 사당 청룡쪽에 이산해(李山海) 묘역이 있다.

    ▼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묘역에 있는 나무...

     

    ▼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묘역 내룡을 타고 내려오다 보면 알바위가 보이는데 이것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지각이 보이고 용의 행지가 어느 정도 보인다.

    ▼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사당

    ▼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사당

    ▼ 묘역에서 바라본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사당

    ▼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재실... 망암이라 써있다.

    ▼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묘역 앞 전순 끝자락... 새부리 마냥 뾰족하게 되어있다. 아계의 뜻이 거위라서 아마도 거위의 부리처럼 만든게 아닐까 생각든다. 그런데 끝이 뾰족한 것은 풍수에서는 매우 꺼리는 것이다. 머리는 금형이고 아래는 화형(금두화각(金頭火脚))은 화극금으로 좋지 못하다.

    ▼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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