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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원 원주]문익공 조엄(趙曮) 신도비 및 묘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3. 4. 23. 10:00

    문익공 조엄(趙曮) 신도비 및 묘

     

    원주시 지장면에는 유명인 몇 분의 묘소가 있다. 그곳을 몇번 답사를 하였는데 조엄선생 묘는

    워낙 유명해서 다 갔다왔을거라 판단하고 풍수 답사에서는 매번 지나쳐서 난 정작 이번이

    처음이다.

    묘역은 입구에서 한창 기념관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거의 완성단계에 있었는데 지금쯤은

    완성이 되어서 개관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조엄선생은 우리 나라에 고구마를 보급한 분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그의 일대기를 보면 그런 공로보다는 당파에 휩쓸려 말년이 불우하게

    흘러간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의 일대기를 들여다보면 한두번씩의 유배는 기본인 것 같아 보인다.

    그만큼 정쟁으로 인해 부침을 거듭했다는 소리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요즘의 청문회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 왕은 한 사람을 쓰기위해 귀양도 보내고 죽을 고비도 넘기게 하고 하여

    그의 인품을 테스트한다고 여겨질 정도다. 아무튼 어려운 시기를 잘 견뎌내면 곧이어 재등용의

    수순을 밟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어려운 시기를 제대로 견디지 못하고 건강을 해친다거나

    엉뚱한 일을 도모한다거나 하는 경우는 중간에 꺾어지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요즘에도 이런 경우가 자주 보이는 것 같아 세상은 돌고 도는 것이 맞는것 같다.

    조엄(趙曮)
    1719(숙종 45)∼1777(정조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명서(明瑞), 호는 영호(永湖). 중운(仲耘)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도보(道輔)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상경(商絅)이다. 어머니는 이정태(李廷泰)의 딸이다.
    1738년(영조 14) 생원시에 합격, 음보로 내시교관(內侍敎官)·세자익위사시직(世子翊衛司侍直)을 지내고, 1752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 정언이 되었다. 이어 지평·수찬·교리 등을 역임하고 동래부사·충청도암행어사를 거쳤다.
    1758년에 이례적인 승진으로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는데 도내(道內) 시노비(寺奴婢) 1만 여명의 노비공(奴婢貢)을 견감(蠲減)시켜 그 불만을 가라앉히고 한전(旱田)에 대한 감세(減稅)비율을 적용, 전세 부담을 줄이는 한편, 조창(漕倉)을 설치하는 치적을 쌓았다. 중앙으로 진출한 뒤 대사헌·부제학·승지·이조참의 등을 지냈다.
    1763년 통신정사(通信正使)로서 일본에 다녀온 뒤, 대사간·한성부우윤, 예조·공조의 참판 및 공조판서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770년 이조판서로 있을 때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의 천거로 특별히 평안도관찰사로 파견되어 감영의 오래된 공채(公債) 30여 만냥을 일시에 징수하는 등 적폐(積弊)를 해소하는 수완을 보였다. 그러나 토호세력들의 반발로 탐학했다는 모함을 받아 곤경에 처하기도 하였다.
    이후 다시 이조판서로 서용되었지만,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벽파(僻派)인 홍인한(洪麟漢)·정후겸(鄭厚謙) 등과 결탁했다는 홍국영(洪國榮)의 무고를 받아 파직되었다.
    이어 일단 벗겨졌던 평안도관찰사 재임시의 부정 혐의가 새삼 문제가 되어 탐재학민(貪財虐民)한 부패관리(贓吏)의 대표적 인물로 지목, 평안도 위원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아들 진관(鎭寬)의 호소로 죽음을 면하고 김해로 귀양이 옮겨졌으나 실의와 불만 끝에 이듬해 병사하였다.
    문장에 능하고 경사(經史)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경륜(經綸)도 뛰어났다. 민생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져서 남긴 업적이 적지 않다.
    특히 경상도관찰사 재임 시 창원의 마산창(馬山倉), 밀양의 삼랑창(三浪倉) 등 조창을 설치, 전라도에까지만 미치던 조운을 경상도 연해 지역에까지 통하게 하여 세곡 납부에 따른 종래의 민폐를 크게 줄이고 동시에 국고 수입을 증가하게 하였다.
    또한 통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대마도에서 고구마 종자를 가져오고 그 보장법(保藏法)과 재배법을 아울러 보급, 구황의 재료로 널리 이용되게 했던 점[제주도에서는 고구마를 조저(趙藷)라고 부르며, 고구마라는 말 자체가 그가 지은 ≪해사일기 海槎日記≫에서 일본인이 이를 ‘고귀위마(古貴爲麻)’라고 부른다고 기록한 데서 유래되었다 한다]은 후세에 공덕으로 크게 기려지고 있다.
    1794년(정조 18) 좌의정 김이소(金履素)·평안도안핵어사(平安道按覈御史) 이상황(李相璜)의 노력으로 신원되고, 1814년(순조 14)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통신사로서 일본을 내왕하며 견문한 바를 적은 ≪해사일기≫가 전하고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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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익공 조엄(趙曮) 신도비 및 묘
      
       풍양조씨


     

     

     

     

     

     

     

     

     

    ▼ 문익공 조엄(趙曮) 신도비 안내문

    ▼ 문익공 조엄(趙曮) 선생 사당 신축공사...

    ▼ 문익공 조엄(趙曮) 기념관 공사중...

    ▼ 문익공 조엄(趙曮) 신도비...

    ▼ 문익공 조엄(趙曮) 묘역 안내문...

    ▼ 문익공 조엄(趙曮) 묘역은 봉긋 솟은 곳에 있다.

    ▼ 문익공 조엄(趙曮) 묘 전경

    ▼ 문익공 조엄(趙曮) 묘비

    ▼ 문익공 조엄(趙曮) 묘 망주석

     

    ▼ 문익공 조엄(趙曮) 묘 측경... 석양녘이라 역광을 받았다.

    ▼ 문익공 조엄(趙曮) 묘 입수도두...

    ▼ 문익공 조엄(趙曮) 묘 후경... 청룡본신 안산으로 바짝 다가서 있다. 수구가 관쇄되어 있지만 명당이 없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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