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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여주]원만석(元萬石), 원경렴(元景濂) 묘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3. 7. 23. 10:00

    원만석(元萬石), 원경렴(元景濂) 묘

     

    여주 원주원씨 묘역에는 원호선생을 위시해 후손들 묘가 상하로 길게 주렴처럼

    조성되어 있다. 아랫쪽에 원유남선생, 원만석, 원경렴 묘가 있다.

    눈이 듬성듬성 보일 때 찾은 곳을 한여름에 올리려니 가물가물하다. 그래도 시원한

    느낌을 느끼기에는 좋은 것 같다.

    원만석(元萬石)
    1623(인조 1)∼1667(현종 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군옥(君玉), 호는 고산(孤山). 서울 출신. 수군절도사 호(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중추부사 유남(裕男)이고, 아버지는 좌상 두표(斗杓)이며, 어머니는 사간 최동식(崔東式)의 딸이다.
    일찍이 부조(父祖)의 세력을 믿고 사람을 죽였다는 죄목으로 하옥된 바 있으나 인조의 특명으로 방면되었다. 1649년(인조 27)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에 기용되고, 1652년(효종 3) 지평(持平)·정언(正言)·문학을 역임하였다.
    1654년 세자시강원사서로 있을 때 시폐 열가지를 상소하여 왕의 특별한 비답을 받았다. 이듬해 장령(掌令)이 되고 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을 거쳐, 1656년 경상도에 전대미문의 흉년이 들었을 때 왕명으로 진구어사(賑救御使)가 되어 열 읍을 순회하면서 민정을 보살피고 기민을 구제하여 은덕을 폈다.
    그 해 헌납(獻納)을 지내고 이듬해 동래부사가 되어 어려운 왜금(倭禁:왜구의 침입을 막음)의 책임을 완수하였다. 1659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었으나, 그해 사우(祠宇)의 신주(神主)를 도둑맞는 일이 생겨서 추고(推考 : 허물을 심문하고 살핌)의 처분을 받았다.
    1662년(현종 3) 병조참지가 되고 이듬해 좌부승지를 거쳐, 1664년 우승지에 올랐다. 성격이 쾌활하여 일을 처리함에 과단성이 있었고, 민정을 잘 살펴 국민과 조정에 교량구실로 시폐를 논하여 시정을 촉구하였다. 한때 권력을 남용하였다는 반대세력의 비평을 받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명관으로 알려졌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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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지정
       원만석(元萬石), 원경렴(元景濂) 묘
       
       원주원씨


     

     

     

     

     

     

     

     

     

    ★원주원씨 원호,원두표 가계도
    원호
    (元豪)
      원유남
    (元裕男)
      원두표
    (元斗杓)
      원만석
    (元萬石)
      원몽은
    (元夢殷)
      원명설
    (元命卨)
      원경렴
    (元景濂)
         
     
      원두추
    (元斗樞)
      원만리
    (元萬里)
      원몽린
    (元夢鱗)
       

     

    ▼ 원만석(元萬石), 원경렴(元景濂) 묘... 증조할아버지와 증손자 관계이다. 

    ▼ 원만석(元萬石) 묘

    ▼ 원만석(元萬石) 묘 전경

    ▼ 원만석(元萬石) 묘

    ▼ 원만석(元萬石) 묘 망주석

     

    ▼ 원만석(元萬石) 묘 측경

     

     

    원경렴(元景濂, 1704~1767)
    조선 영조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도원(道源), 호는 소재(疎齋)이다. 좌의정 원두표(元斗杓)의 현손이자 대호군(大護軍) 원명설(元命卨)의 아들이다. 정혜공(貞惠公) 이규령(李奎齡)의 손녀사위로 31세인 1734년(영조 10)에 음보(蔭補)로 처음 참봉에 제수되고 1757년(영조 33) 목사에 재직시 정시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북도병사와 경기수사를 거쳐 병조참판에 이르렀으며 원흥군(原興君)에 봉해졌다. 묘는 북내면 장암리에 있다.

    <여주군사에서 인용>

     

     

     

     

     

     

     

     

     

     

    ▼ 원경렴(元景濂) 신도비...

    ▼ 원경렴(元景濂) 신도비

    ▼ 원경렴(元景濂) 신도비

    ▼ 원경렴(元景濂) 신도비 후경...

    ▼ 원경렴(元景濂) 묘역 전경

    ▼ 원경렴(元景濂) 묘비...

     

    ▼ 원경렴(元景濂) 묘 상석..

    ▼ 원경렴(元景濂) 묘 석물

    ▼ 원경렴(元景濂) 묘 석물.. 뒷쪽에 신도비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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