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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종로]비우당과 자주동천
    답사는 즐거워/문화재답사 2014. 7. 17. 10:00

    낙산 동쪽에는 단종비 정순왕후의 유적이 여러 곳 있다. 대표적인 곳이 청룡사와 동망봉인데 또 한 곳의 유적이

    낙산 정상 바로 아래에 있는 자주동천(자주동샘)이 그곳이다. 이곳에는 근자에 지봉 이수광이 살던 집을 복원한

    비우당이 세워지면서 두 유적지가 혼합되어 있지만 원래의 유적 주인은 자주동샘이 된다.

    서울시에서 비우당을 복원하면서 이곳에 세우다보니 주객이 전도되어 지금은 비우당이 더 크게 부각되었다.

    아무튼 비우당과 자주동샘은 현재 한 울타리에 있게 되어 서로를 의지하며 지내고 있다.

     

    ▼ 낙산길에서 비우당으로 내려가는 길... 이곳에 공원을 조성하였다.

    ▼ 비우당이 언덕 아래에 있다보니 먼저 지붕이 보인다.

     

     

    ▼ 비우당... 앞쪽이 좁아서 전면 사진을 찍을 수 없게 되었다.

     

     

     비우당(庇雨堂)

     

    비우당(庇雨堂)은  '비를 가리는 집'이라는 뜻으로 조선시대 실학자인 지봉(芝峯) 이수광이 살던 곳이다. 낙산(駱山) 동쪽 상산(商山)의 한 줄기인 지봉 아래 있었는데, 이수광의 호 지봉이 여기서 나왔다. 원래는 창신동 쌍룡2차 아파트 자리에 있었는데 서울시에서 낙산공원을 조성하면서 이곳에 복원하였다. 조선 초기의 청백리로 명성이 높은 유관(柳寬)이 이곳에서 살았는데 지붕이 새자 손수 우산을 받치고 살면서 부인에게 '우산 없는 집은 어떻게 견딜꼬?'라 농담을 하였다는

     '유재상의 우산(柳相手傘)'이라는 고사가 생겼다. 이곳은 외손인 이수광 집안으로 상속되었는데, 그 집이 임진왜란 때 소실되자 이수광이 집을 새로 짓고 그 이름을 비우당(庇雨堂)이라 하였다.
    "동원비우당기(東園庇雨堂記)에 이러한 사연을 자세히 적었다. 이수광은 비우당에 살면서 이 일대의 여덟 곳을 '비우당 팔경'이라 하고 시를 읊었다.
    1.동지세류(東池細柳) : 흥인문 바깥의 못가에 핀 버들이 봄바람에 버들개지를 날리고 꾀꼬리가 지저귀는 모습을 노래
    2.북령소송(北嶺疎松) : 북악의 산마루가 낮에도 늘 어둑한데 푸른 솔그림자가 집에 드리운 것을 보고 동량으로 쓰이지 못함을 안타까워 함
    3.타락청운(駝駱晴雲) : 아침마다 누운 채 낙산의 구름을 마주하면서 한가한 구름처럼 살고싶다.
    4.아차모우(峨嵯募雨) : 아차산에서부터 벌판을 지나 불어오는 저녁비를 노래
    5.전계세족(前溪洗足) : 비가 오고 나면 개울에 나가 발을 씻고 개울가에 드러눕는다.
    6.후포채지(後圃採芝) : 지봉과 상산의 이름에 맞추어 상산사호(商山四皓)처럼 살고싶다.
    7.암동심화(巖洞尋花) : 복사꽃 핀 골짜기에서 나비를 따라 꽃을 찾아가는 풍류를 말 함
    8.산정대월(山亭待月) : 맑은 달밤 정자에 올라 술잔을 잡는 흥취를 말 함

     

     

    ▼ 비우당 

     

    ▼ 비우당 뒷쪽으로 거북바위와 샘이 보인다.

    ▼ 정순왕후의 전설이 스며있는 자주동샘

     

     

     자주동샘

     

    비우당이 있던 곳은 조선시대 자지동(紫芝洞)이라 불렀다. 단종의 비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宋氏)가 폐위되어 영월로 간 단종을 기다리면서 이곳에 와서 빨래를 하였는데 빨래가 붉은 빛으로 염색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 윗쪽에 거북바위가 있었다. 정순왕후가 단종이 거북이를 타고 승천하는 꿈을 꾸었는데 아침에 보니 이 바위가 나타났다는 전설도 전한다.

     

    ▼ 비우당 건물 옆에 자주동샘이 있다.

    ▼ 자주동샘

    ▼ 자주동샘 표석 

    ▼ 비우당 건물 뒷쪽 암석에 새겨진 자지동천(자주동천) 각자

    ▼ 자주동천 각자에서 바라본 자주동샘

    ▼ 자주동샘

     동원비우당기

     

    나의 집은 흥인문 밖 낙봉(駱峰) 동쪽에 있다. 상산(商山)의 한자락이 남으로 뻗어 고개를 숙인듯 지봉(芝峰)이 있고 그 위에 수십명이 앉을 만한 넓은 바위와 십(十)여 그루의 소나무가 비스듬히 있다. 서봉정(棲鳳亭) 아래 백여 묘(畝)의 동원(東園)이 그윽하게 펼쳐져 있는데 이 곳에 청백(淸白)으로 이름을 떨친 류관(柳寬) 정승이 초가삼간을 짓고 사셨다. 비가 오면 우산으로 빗물을 피하고 살았다는 일화가 지금까지 전해온다. 이 분이 나의 5(五)대 외가 할아버님이다. 아버님이 이 집을 조금 넓혔는데 집이 소박하다고 누가 말하면 우산에 비하여 너무 사치스럽다고 대답하여 듣는 이들이 감복하였다. 나는 이 집을 보전하지 못하고 임진왜란에 없어진 이 집터에 조그만 집을 짓고 비우당(庇雨堂)이라고 하였다. 비바람을 겨우 막겠다는 뜻이다. 우산을 받고 살아오신 조상의 유풍(遺風)을 이어간다는 뜻도 그 속에 담겨있다.

     

    ▼ 지봉 이수광이 지은 동원비우당기를 쓴 비... 조순 서울시장이 세웠다.

    ▼ 지봉 이수광선생의 약력

    ▼ 비우당기비가 세워진 공원

    ▼ 작은 공원에 바위가 받침위에 걸려있다. 아마도 비우당을 상징하는 조형물처럼...

    ▼ 비우당 공원에 놓여있는 돌인데.. 글자가 세겨져 있다. 내용은 알 수 없다.

    ▼ 비우당 공원에는 비상시 대피할 수 있는 대피소가 마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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