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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념표석](종로11)금위영 터(禁衛營址)
    여행등산/기념표석답사 2014. 11. 3. 10:00

     

    표 석 명

    금위영 터(禁衛營址)

    임시관리번호

    종로11

    설치연도

    1990

    표석문안

    임진왜란 이후에 설치된 오군영(五軍營)의 하나인 군영 터. 대궐의 경비와 서울 남쪽의 수비를 맡았는데 광복 후에 국립 국악원이 있었다. 

    표석위치(주소)

    서울 종로구 운니동 98-5

    찾아가는 길

    3호선 안국역 4번 출구-->270m 삼환빌딩 앞 인도 옆 화단(현대원서공원 건너편)

    관계되는 내용

    금위영 터(禁衛營址)

     

    금위영은 5군영 중 가장 마지막으로 설치된 것으로서, 숙종 때 설치되었다. 주 임무는 국왕 호위와 수도인 한양을 방어하는 것이다.
    금위영은 인조(仁祖) 때 기병(騎兵) 중에서 정병(精兵)을 선발하여 병조 산하에 두었던 정초군(精抄軍)과 훈련도감의 별대(別隊)를 통합하여 1682년(숙종 8)에 설치되었다. 그러나, 금위영은 처음부터 5군영의 일부로 독립된 채 생겨난 것이 아니고, 병조 판서가 금위영의 대장직을 겸함으로써 실질적으로 6조 중에서 병조의 수중에 있었다. 이후 1754년(영조 30년)에 독립된 군영으로 생겨나게 되었다.
    초기의 편제는 1영-5부-20사-105초(哨)로 구성되었으나 1704년 군제를 개혁할 때 1영-5부-25사-125초로 편제되어 그 수가 증가하였다. 지휘부의 인원은 도제조(都提調)·제조(提調)· 대장(大將)· 중군(中軍)· 별기위별장(別騎衛別將) 각 1명, 천총(千摠) 4명, 파총(把摠) 5명, 낭청(郞廳) 2명, 초관(哨官) 41명 등이며, 병력은 별무사(別武士) 30명, 기사(騎士) 150명, 별기위(別騎衛) 32명, 표하군(標下軍) 1,177명, 별파진(別破陣) 160명, 보군(步軍) 등으로 구성되었다.
    금위영의 운영은 보(保)에 의해 이루어져 많을 때는 9만명에 이르렀다. 주축을 이루는 6도의 향군은 5초씩 번상하여 2개월간 복무하였고, 마병으로 이루어진 기사는 장번(長番)으로 복무했으며, 별파진은 16교대로 복무하였다. 이러한 금위영은 1881년(고종 18) 장어영으로 통합되었다가 1895년(고종 32)에 혁파(革罷)되었다
    .

    <위키백과사전에서 인용> 

     

    ▼ 금위영 터(禁衛營址) 표석

    창덕궁 돈화문 앞쪽에 국왕을 호위하던 금위영터가 있다. 그 앞을 맨날 지나다니면서도 표석에 관심이 없을 때는 보이지 않았다. 막상 표석을 찾으러 일부러 가야하는 경우가 허다하고 가서도 잘 눈에 안보인다. 그만큼 관심이 없으면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아는 만큼만 딱 보인다. 

    ▼ 금위영 터(禁衛營址) 표석은 삼환빌딩 앞 화단에 있다.

    ▼ 금위영 터(禁衛營址) 표석은 나무에 가려져서 잘 안보인다.

    ▼ 금위영 터(禁衛營址) 표석... 창덕궁 돈화문 인근에 위치

    ▼ 금위영 터(禁衛營址) 표석 뒤로 보이는 빌딩이 삼환빌딩이다.(다음로드뷰에서 옮겨옴)

    ▼ 금위영 터(禁衛營址) 표석 ... 유료주차장 간판이 유난히 눈에 띈다.(다음로드뷰에서 옮겨옴)

    ▼ 금위영 터(禁衛營址) 표석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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