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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묘 및 생가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4. 11. 6. 09:00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묘 및 생가
동학의 교조인 수운 최제우 선생의 태묘를 방문하려고 몇차례 계획을 세웠지만 워낙 멀어 경주 방문할 때 하겠다고 차일피일 미루었는데 경주를 방문하더라도 외진 곳에 있어 방문이 쉽지 않았다. 이번에 여근곡과 함께 맘 먹고 찾은 곳이다.
조선의 왕, 종교지도자, 문중의 시조 등의 묘들의 공통점은 대개 우뚝솟은 혈형을 선호한다. 즉 돌형이나 유형에 가까운 형태다. 그만큼 만인으로부터 존경과 추앙, 흠모를 받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혼자서 찾은 이곳은 묘역이 산정에 있어서 힘들 것으로 보였으나 산정까지 도로가 나있어서 아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특이하게 북동향으로 묘가 되어 있다. 능선에 맞춰 자연스럽게 좌향을 맞춘 것으로 보인다.
생가 또한 큰 인물을 만든 곳은 뭐가 달라도 다르기 마련이다. 그런데 생가터는 풍수 잣대로 보면 아쉬움이 많이 남는 곳이다. 산이 내려오면서 골을 크게 만들고 집터를 계곡풍이 때리는 형태이다. 물마저 감아주지 못하고 있어 큰 기운이 반궁수의 기운으로 흐르게 되었다.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1824(순조 24)∼1864(고종 1). 동학(東學)의 교조(敎祖).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복술(福述)·제선(濟宣). 자는 성묵(性默), 호는 수운(水雲)·수운재(水雲齋). 경주 출신. 아버지는 옥(鋈)이며,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7대조인 최진립(崔震立)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혁혁한 공을 세워 병조판서의 벼슬과 정무공(貞武公)의 시호가 내려진 무관이었으나, 6대조부터는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몰락양반 출신이었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일찍부터 경사(經史)를 익혔으나 기울어져가는 가세(家勢)와 함께 조선 말기의 체제내부적 붕괴양상 및 국제적인 불안정이 그의 유년기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3세의 나이로 울산 출신의 박씨(朴氏)와 혼인하였고, 4년 뒤 아버지를 여의었다. 3년상을 마친 뒤에는 집안살림이 더욱 어려워져 여기저기로 떠돌아다니며 갖가지 장사와 의술(醫術)·복술(卜術) 등의 잡술(雜術)에 관심을 보였으며, 서당에서 글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세상인심의 각박함과 어지러움이 바로 천명을 돌보지 않기 때문에 나타난 것을 깨닫고 천명을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하였다. 1856년 여름 천성산(千聖山)에 들어가 하느님께 정성을 드리면서 시작된 그의 구도(求道) 노력은 그 이듬해 적멸굴(寂滅窟)에서의 49일 정성, 그리고 울산 집에서의 계속된 공덕닦기로 이어졌고, 1859년 10월 처자를 거느리고 경주로 돌아온 뒤 구미산 용담정(龍潭亭)에서 계속 수련하였다.<중략>
1861년 포교를 시작하였고, 곧 놀라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동학의 가르침을 따르게 되었다. 동학이 세력을 얻게 되자 기존 유림층에서는 비난의 소리가 높아져 서학, 즉 천주교를 신봉한다는 지목을 받게 되었다. 또한 톈진조약 후 영불연합군이 물러가서 조선침공의 위험이 없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민심이 가라앉게 되자, 조정에서는 서학을 다시 탄압하게 되었으므로 1861년 11월 호남으로 피신을 가게 되었다.
1862년 3월 경주로 되돌아갈 때까지의 남원의 은적암(隱寂庵) 피신생활 중 동학사상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하였고, <논학문 論學文>·<안심가 安心歌>·<교훈가>·<도수사 道修詞> 등을 지었다. 경주에 돌아와 포교에 전념하여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는데, 1862년 9월 사술(邪術)로 백성들을 현혹시킨다는 이유로 경주진영(慶州鎭營)에 체포되었으나 수백 명의 제자들이 석방을 청원하여 무죄방면되었다.
1863년 7월 제자 최시형(崔時亨)을 북접주인으로 정하고 해월(海月)이라는 도호를 내린 뒤 8월 14일 도통을 전수하여 제2대 교주로 삼았다. 관헌의 지목을 받고 있음을 알고 미리 후계자를 정한 것이다. 이때 조정에서는 이미 동학의 교세확장에 두려움을 느끼고 그의 체포계책을 세우고 있었는데, 11월 20일 선전관(宣傳官) 정운구(鄭雲龜)에 의하여 제자 20여 명과 함께 경주에서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 철종이 죽자 1864년 1월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심문받다가 3월 10일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로 대구장대(大邱將臺)에서 41세의 나이로 참형에 처해졌다.<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발췌>
문화재지정
비지정
문화재명칭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묘 및 생가
소재지
경북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 산 75(묘), 가정리 315(생가)
관리자(연락처)
경주시청
▼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묘비..
▼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묘역 입구에 세워진 태묘 안내문
▼ 수운(水雲) 선생 묘역
▼ 묘역 뒤 봉우리가 산 정상이다.
▼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묘 근경
▼ 묘 전경
▼ 묘비 전면
▼ 묘비 후면
▼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묘역에 있는 석물... 문인석의 대용으로 세워져 있다.
▼ 천도교에서는 문인석을 무엇이라 부를까? 이 석물도 한쪽만 세워져 있다.
▼ 석물에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내용은 모르겠다...
▼ 묘 입수도두... 바로 산정상이다.
▼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묘 후경... 조안산과 대등한 위치를 확보했다.
▼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묘 청룡쪽 산세
▼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묘 전순... 전순이 똑바르지 않고 휘어지는 것은 좋은 현상이 못된다.
▼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생가 이정표
▼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생가에 세워진 유허비
▼ 유허비... 전면 글씨는 박정희 대통령 글씨다.
▼ 유허비 후면.
▼ 유허비 측면....
▼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생가... 계곡이 깊게 형성된 아래에 위치한다.
▼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생가 안내판
▼ 생가 대문....
▼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생가 사랑채
▼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생가에 있는 입간판 약력...
▼ 생가 사랑채의 수운선생 방...
▼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생가 안채
▼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생가 방앗간... 어울리지 않는다.
▼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생가 사랑채 뒤로 대밭이 만들어져 있다.
▼ 생가 뒤로 우물이 있고... 대밭은 계곡쪽으로 많이 심어야 한다.
▼ 계곡 아래는 곡살풍이 무섭다.
▼ 생가에 전시된 디딜방아...
▼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생가에서 바라본 묘소... 가운데 작은 봉우리 아래 묘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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