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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념표석](종로41)맹사성집 터(孟思誠家址)
    여행등산/기념표석답사 2014. 11. 24. 09:00

     

    표 석 명

    맹사성집 터(孟思誠家址)

    임시관리번호

    종로41

    설치연도

    1990

    표석문안

    조선 초 세종 때 정승을 지낸 청백리가 살던 집터. 그의 이름을 따서 맹감사현(峴), 맹현(孟峴)이라고 하며, 퇴청하면 이곳에서 피리를 불기를 즐겨했다.

    표석위치(주소)

    서울 종로구 삼청동 35-119

    찾아가는 길

    3호선 안국역 2번 출구-->10m 마을버스 정류장(종로02번 승차)-->사우디대사관 하차-->10m 전방 횡단보도 건너-->언덕길 직진-->삼거리 우회전-->100m 삼거리 죄회전-->50m 골목 끝 북촌동양문화박물관 앞

    관계되는 내용

    맹사성(孟思誠)

     

    1360(공민왕 9)∼1438(세종 20).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신창(新昌). 자는 자명(自明)·성지(誠之), 호는 동포(東浦)·고불(古佛). 아버지는 고려 수문전제학(修文殿提學) 희도(希道)이며, 최영(崔瑩)의 손서(孫婿)이다. 온양 출신.
    1386년(우왕 12)에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춘추관검열(春秋館檢閱)이 되었다. 이어 전의시승(典儀寺丞)·기거랑(起居郎)·사인(舍人)·우헌납(右獻納) 등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수원판관이 되었다가 다시 내직으로 내사사인(內史舍人)이 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뒤 태조 때 예조의랑(禮曹議郎)이 된 이래, 정종 때 간의우산기상시(諫議右散騎常侍)·간의좌산기상시가 되었다. 태종 초에 좌사간의대부(左司諫議大夫)·동부대언(同副代言)·이조참의를 두루 역임하였다. 1407년(태종 7)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이 되어, 진표사(進表使)로 명나라에 가는 세자를 시종관(侍從官)으로서 수행하여 다녀왔다.
    1408년 사헌부대사헌이 되어 지평(持平) 박안신(朴安信)과 함께 평양군(平壤君)조대림(趙大臨:太宗의 딸 慶貞公主의 夫君)을 왕에게 보고하지 않고 잡아다가 고문하였다. 이 일로 태종의 큰 노여움을 사 처형될 뻔했으나 영의정 성석린(成石璘)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였다.
    1411년 다시 기용되어 판충주목사로 임명되었다. 그러자 예조에서 관습도감제조(慣習都監提調)인 그가 음률(音律)에 정통하므로 선왕(先王)의 음악을 복구하기 위하여 서울에 머물게 하여 바른 음악을 가르치도록 건의하였다. 그 이듬해에도 그가 풍해도도관찰사(豐海道都觀察使)에 임명되자, 영의정 하륜(河崙)이 음악에 밝은 그를 서울에 머물게 하여 악공(樂工)을 가르치도록 아뢰었다.
    1416년 이조참판에 이어 예조판서가 되었다. 이듬해 생원시에 시관(試官)이 되어 권채(權採) 등 100인을 뽑았으며, 왕이 친림한 문과 복시에 독권관(讀卷官)이 되었다. 그 해 노부(老父)의 병간호를 위해 사직을 원했으나 윤허되지 않고, 역마(驛馬)와 약을 하사받았다.
    이어 호조판서가 되어서도 고향의 노부를 위해 다시 사직을 원했다. 그러나 왕은 그를 충청도도관찰사로 삼아 노부를 봉양하게 하였다. 1418년 공조판서가 되어 또다시 노부의 병간호를 위해 사직하려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419년(세종 1) 이조판서와 예문관대제학이 되고, 이듬해에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다. 1421년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를 역임하고 1427년에 우의정이 되었다. 그는 우의정 재임시에 ≪태종실록 太宗實錄≫ 편찬 감관사(監館事)로서 감수하였다.
    ≪태종실록≫의 편찬이 완료되자 세종이 한번 보고자 하였다. 그러자 그가 “왕이 실록을 보고 고치면 반드시 후세에 이를 본받게 되어 사관(史官)이 두려워서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것”이라 하고 반대하니 세종이 이에 따랐다.
    1432년 좌의정에 오르고 1435년 나이가 많아서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 그러나 나라에 중요한 정사(政事)가 있으면 반드시 그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사람됨이 소탈하고 조용하며 엄하지 않았다. 비록 벼슬이 낮은 사람이 찾아와도 반드시 공복(公服)을 갖추고 대문 밖에 나아가 맞아들여 윗자리에 앉히고, 돌아갈 때에도 공손하게 배웅하여 손님이 말을 탄 뒤에야 들어왔다.
    효성이 지극하고 청백하여 살림살이를 일삼지 않고 식량은 늘 녹미(祿米 : 봉급으로 받은 쌀)로 하였다. 출입할 때에는 소[牛] 타기를 좋아하여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 영의정 성석린은 선배로서 그의 집 가까이에 살았는데, 매 번 그의 집을 오고 갈 때는 그 집 앞에서 말을 내려 지나갔다.
    그는 음악에 조예가 있어 스스로 악기를 만들어 즐겼다. 품성이 어질고 부드러웠으나, 조정의 중요한 정사를 논의할 때에는 과단성이 있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맹사성집 터(孟思誠家址) 표석

    맹사성 집 터를 북촌답사를 통해 알았다. 그가 청백리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북촌에서도 제일 높은 곳에 집이 있으리라고는 예측 못했다. 풍수에서 집이 높은 곳에 있고 물이 모이지 못하면 재물이 없다는 것은 기본이 된다. 재물은 없어도 권위는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곳이다.

    경복궁 강녕전에서 이곳 맹사성집이 보인다고 한다. 그래서 세종대왕이 스승이었던 맹사성집에 불이 켜져있으면 스승보다 먼저 잘 수 없다고 하여 불이 꺼진 이후에야 잠자리에 들었다고 전해진다.

    고불 맹사성의 일화는 아직도 많은 곳에서 전설로 전해지고 있다. 모두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고 겸손하게 처신한 내용들이 대부분이다. 경기도 용인에는 맹사성 묘가 있는데 꽃봉우리에 쌓인 화심형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 집터와 비슷한 형태이다. 

     ▼ 맹사성집 터(孟思誠家址) 표석... 앞쪽으로 보이는 곳이 동양문화박물관이다.

     ▼ 맹사성집 터(孟思誠家址) 표석 위치<다음 로드뷰에서 옮겨옴>

     ▼ 맹사성집 터(孟思誠家址) 표석 위치<다음 로드뷰에서 옮겨옴>

    ▼ 맹사성집 터(孟思誠家址) 표석 위치... 안국역에서 2번 출구로 나와 종로02 마을 버스를 타고 사우디대사관에서 내려 북촌동양문화박물관을 찾으면 된다.

     ▼ 맹사성집 터(孟思誠家址) 표석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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