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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념표석](종로42)민영환집 터(閔泳煥家址)
    여행등산/기념표석답사 2014. 11. 24. 10:00

     

    표 석 명

    민영환집 터(閔泳煥家址)

    임시관리번호

    종로42

    설치연도

    1994

    표석문안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이에 분격하여 자결한 충정공(忠正公) 민영환 집 터(조계사 경내)

    표석위치(주소)

    서울 종로구 견지동 38-2

    찾아가는 길

    3호선 안국역 6번 출구-->150m 안국동사거리-->120m 조계사 일주문 앞

    관계되는 내용

    민영환(閔泳煥)

     

    1861(철종 12)∼1905.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문약(文若), 호는 계정(桂庭). 서울 출신. 호조 판서 겸호(謙鎬)의 아들이다. 1877년(고종 14)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었으며, 이듬해 문과에 급제한 뒤 홍문관 정자(正字)·검열·설서(說書)·수찬(修撰)·검상(檢詳)·사인(舍人) 등을 역임하였다.
    1881년 동부승지, 이듬해 성균관 대사성에 발탁되었다. 그러나 이해 6월 군제 개혁으로 인한 구식군대의 불만과 대원군의 재집권욕 등이 복합적으로 이뤄져 1882년 폭발한 임오군란의 발발로 아버지 겸호가 살해되자 사직하였다.
    1884년 이조 참의에 임명된 뒤 도승지·전환국 총판(典圜局總辦)·홍문관 부제학·이조 참판·내무 협판·개성 유수·해방 총관(海防總管)·친군연해 방어사(親軍沿海防禦使)·한성 우윤(漢城右尹)·기기국 총판(機器局總辦) 등을 역임하였다.
    1887년 상리국 총판(商理局總辦)·친군전영사(親軍前營使)·호조 판서가 되었다. 그리고 1888년과 1890년 두 차례 병조 판서를 역임하였고, 1893년 형조 판서·한성 부윤, 1894년 독판 내무부사·형조 판서가 되었으며, 1895년 8월 주미 전권대사에 임명되었다.
    당시 일제는 한국에서의 세력 우위를 점하고자 1894년 도발한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청나라의 요동반도(遼東半島)를 점유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가 독일·프랑스와 연합하여 삼국간섭으로 뜻이 좌절되면서 조선에서 일본 세력이 약화되었다.
    이에 일제가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1895년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키자, 그는 주미전권대사에 부임하지 않고 고향에 내려갔으며, 때때로 입궐하여 고종에게 간언을 올렸다.
    <중략>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하자, 원임의정대신 조병세(趙秉世)를 소두(疏頭)로 백관들과 연소(聯疏)를 올려 조약에 찬동한 5적의 처형과 조약의 파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황제의 비답(批答)이 있기도 전에 일본 헌병에 의해 조병세는 구금되고 백관들이 해산당하자, 자신이 소두가 되어 다시 백관들을 거느리고 두 차례나 상소를 올리고 궁중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이에 일제의 협박에 의한 왕명 거역죄로 구속되어 평리원(平理院: 재판소)에 가서 대죄한 뒤 풀려났다.
    그러나 이들은 다시 종로 백목전도가(白木廛都家 : 육의전)에 모여 소청(疏廳)을 설치하고 항쟁할 것을 의론하였으나 국운이 이미 기울어졌음을 깨닫고 죽음으로 항거하여 국민을 각성하게 할 것을 결심, 본가에서 자결하였다.
    세통의 유서가 나왔는데, 한통은 국민에게 각성을 요망하는 내용이었고, 다른 한통은 재경 외국사절들에게 일본의 침략을 바로 보고 한국을 구해줄 것을 바라는 내용이었다. 또 다른 한통은 황제에게 올리는 글이었다.
    그의 자결 소식이 전해지자, 원임대신 조병세를 비롯한 전참판 홍만식(洪萬植), 학부 주사 이상철(李相喆), 평양대(平壤隊) 일등병 김봉학(金奉學) 등 많은 인사들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의 인력거꾼도 목숨을 끊어 일제 침략에 항거하였다.
    그의 충절을 기려 나라에서 후하게 예장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대신(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大臣)의 최고 관작이 추증되었으며, 의절의 정문도 세워졌다. 유해는 경기도 용인에 예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으며, 동상은 안국동 로터리에서 와룡동 비원 앞으로 옮겨졌다(현재는 체신기념관 뒤편에 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민영환집 터(閔泳煥家址) 표석

    민영환은 고등학교 때 창덕궁 앞에 동상이 세워져 있어서 그곳이 자결한 곳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뒤에 동상이 없어져서 어디로 옮겼나 확인해봤더니 우정국건물(체신기념관)뒤편에 잘 보이지도 않은 곳에 있었다. 왜 이곳에 있는지도 설명이 없었다. 우연히 이곳 조계사 경내가 민영환의 집터였다는 것을 알았다. 이 집에서 자결을 한 것이다. 나라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어찌 할 수가 없었으니 자결이라도 한 것일까? 그의 용감한 행동을 뒤따라 많은 인사들이 자결을 했다고 한다. 그의 집터에 우리나라 불교의 총본산이 들어서 있으니 극락왕생은 하셨을 것으로 보인다.

    ▼ 민영환집 터(閔泳煥家址) 표석 위치... 앞쪽 계단이 조계사 일주문...

    ▼ 민영환집 터(閔泳煥家址) 표석

    ▼ 민영환집 터(閔泳煥家址) 표석은 조계사 일주문 앞 조금 못미치는 곳에 있다.

    ▼ 민영환집 터(閔泳煥家址) 표석 위치

    ▼ 민영환집 터(閔泳煥家址) 표석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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