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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념표석](종로107)장예원 터( 掌隸院址)
    여행등산/기념표석답사 2014. 12. 13. 13:30

    표 석 명

    장예원 터( 掌隸院址)

    임시관리번호

    종로107

    설치연도

    2001

    표석문안

    장예원은 조선시대 공사(公私) 노비 문서를 관리하고 노비 소송을 담당하던 관청이다. 장예원은 육조의 하나인 형조 아래에 설치되었으며 조선 후기에 들어와 신분제 해체 현상으로 업무가 축소되다가 영조40년(1764)에 실질적으로 폐지되었다.

    표석위치(주소)

    서울 종로구 당주동11

    찾아가는 길

    5호선 광화문역 8번출구-->10m 지하철 엘리베이터 옆

    관계되는 내용

    장예원(掌隷院)

     

    조선시대 공사노비 문서의 관리 및 노비소송을 관장하였던 관서.
    조선시대 노비는 주인에게 신공(身貢)이나 노동력을 제공했으므로 국가(공노비)나 양반지배층(사노비)에게 중요한 재산이 되었다. 따라서, 노비쟁탈전, 도망노비의 추쇄(推刷 : 노비나 병역·부역을 기피한 사람을 붙잡아 돌려보내던 일), 양민의 노비화 등 많은 사회문제를 야기시켰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려 말부터 여러 차례 노비변정도감(奴婢辨定都監)이 설치되었다.
    1401년(태종 1)에는 노비변정도감을 혁파하고 형조도관(形曹都官)을 설치했다가 1466년(세조 12)변정원(辨定院)으로 개칭하였다. 이듬 해 단순히 노비를 변정한다는 의미보다 8만여 명의 공노비를 관장한다는 의미가 내포된 장례원으로 고쳤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구성원은 판결사(判決事, 정3품) 1인, 사의(司議, 정5품) 3인, 사평(司評, 정6품) 4인을 두고, 업무가 복잡할 때에는 겸판결사(兼判決事) 1인을 더 두기도 하였다. 뒤에 『속대전』 편찬 당시에는 장례원의 업무가 축소됨에 따라 사의 2인, 사평 2인이 감원되었다.
    장례원의 주된 업무는 노비쟁송의 판결, 노비문서 보관과 더불어 국가소유 노비인 공노비의 확보·관리였다. 그래서 임진왜란 당시 이들 문서들이 노비들에 의해 불태워지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국가의 노비정책은 노비층의 광범한 도망, 신분상승 및 양인층 확보의 필요성 때문에 종모법(從母法 : 어머니가 양인이면 그 소생도 양인)을 채택하게 되었다. 또한 공노비추쇄를 폐지했으며, 1764년(영조 40) 7월에는 비총제(比摠制 : 각도에 공노비수를 미리 정해 신공을 받아들임.)를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장례원의 업무는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노비들의 소송도 장례원 관리들의 수탈을 피해 형조나 한성부에 주로 청원하게 되자, 장례원은 유명무실해져 그 임무를 형조에 이관시켰다. 그리고 1764년 11월 보민사(保民司)로 개칭되면서 실질적으로 폐지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장예원 터(掌隷院址) 표석 

    ▼ 장예원 터(掌隷院址) 표석은 5호선 광화문역 8번출구 지하철역 엘리베이터 앞에 있다.

    ▼ 장예원 터(掌隷院址) 표석 위치..<다음 로드뷰에서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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