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념표석](종로124)종침교 터(琮琛橋址)여행등산/기념표석답사 2015. 1. 9. 11:00
표 석 명
종침교 터(琮琛橋址)
임시관리번호
종로124
설치연도
1998
표석문안
조선조 성종때 우의정을 지낸 허종(許琮)과 허침(許琛) 형제가 갑자사화의 화를 면한 일화가 얽혀있는 경복궁 입구 다리터
표석위치(주소)
서울 종로구 내자동 223
찾아가는 길
3호선 경복궁역 7번 출구-->40m 우회전 서울지방경찰청 직진-->170m 서울지방경찰청 사거리 좌회전-->50m 세양빌딩(외환은행 내자동지점 앞 인도변)
관계되는 내용
종침교 터(琮琛橋址)
세종문화회관 뒤쪽 종로구 내수동 종교교회에서 서울 경찰청 가는 길목에 눈에 잘 띄지 않는 표석이 하나 있다. 표석에는 ‘종침교’(琮琛橋)라는 글씨가 희미하게 보인다.
옛날 이곳에 청계천 상류에 해당하는 개울이 있었고, 종침교라 불린 다리가 있었음을 증언해 주는 표석이다. 종침교라는 다리 이름이 생기게 된 사연은 허종(許琮: 세조때 함길도 절도사를 지내고, 성종때 북정 도원수를 지낸 무인) 허침(許琛)형제 및 ‘갑자사화’와 관련이 있다.
허종 허침 형제는 조정에서 오랫동안 벼슬해 온 터라 큰 일이 있으면 항상 임금의 부름을 받아 의논을 함께 했다. 훗날 갑자사화의 원인이 되는 성종 임금 때의 윤비(연산군의 생모) 폐비논의 때도 두 형제는 부름을 받았다.
윤비는 질투가 심해 남편인 성종 임금의 얼굴에 생채기를 내고 말았다. 이에 성종의 노여움을 쌌고, 신하들도 윤비를 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허종과 허침 형제는 평소부터 이런 논의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있던 터였으나, 결국 부름을 받아 폐비논의에 가담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런데 허종과 허침에게는 아주 지혜로운 누님이 있었다. ‘친정 아우들을 구한 허부인’으로 이름을 남기게 되는 누님은 일찍부터 경서와 사서를 많이 읽어 정치의 흐름과 사리에 밝은 분이었다. 소식을 들은 그녀는 사람을 보내 허종 허침 형제에게 일렀다. 윤비의 아들이 이미 세자(훗날 연산군)가 되어 있는데, 윤비 폐비에 가담했다간 훗날 반드시 화를 입는 다는 것이었다. 이에 허종 허침 형제는 말을 타고 가다가 개울가 다리에서 떨어져 다쳤다는 핑계를 대며, 궁궐에 들어가지 않았다.
과연 훗날 임금이 된 연산군은 임사홍(任士洪)의 밀고로 어머니 윤비폐비사건의 전모를 알게 되었고,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을 펼쳤다. 바로 ‘갑자사화’였다. 연산은 윤비 폐비를 주장했거나 방조 및 침묵한 대신들까지 찾아내 죽였다. 그러나 누님의 조언을 듣고, 일부러 다리에서 떨어져 논의에 불참했던 허종 허침 형제는 피바람을 피할 수 있었다. 이후로 사람들은 두 형제가 말위에서 떨어져 목숨을 구한 다리 이름을 형제의 이름을 따 ‘종침교’라 불렀다고 한다.<종로구청 역사문화관광사이트에서 인용-이능화의 ‘逸世遺事’ 참조>
▼ 종침교 터(琮琛橋址) 표석
▼ 종침교 터(琮琛橋址) 표석... 앞쪽으로 보이는 건물이 경희궁의 아침 오피스텔..
▼ 종침교 터(琮琛橋址) 표석... 외환은행 내자동 지점 앞 인도변에 위치<다음 로드뷰에서 옮겨옴>
▼ 종침교 터(琮琛橋址) 표석... <다음 로드뷰에서 옮겨옴>
'여행등산 > 기념표석답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념표석](종로126)죽동궁 터(竹洞宮址) (0) 2015.01.09 [기념표석](종로125)좌포도청 터(左捕盜廳址) (0) 2015.01.09 [기념표석](종로123)종친부 터(宗親府址)-철거됨 (0) 2015.01.09 [기념표석](종로122)종부시 터(宗簿寺址)-철거됨 (0) 2015.01.08 [기념표석](종로121)조지서 터(造紙署址) (0) 2015.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