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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북 음성)장절공(壯節公) 반석평(潘碩枰) 묘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6. 10. 23. 17:00


    장절공(壯節公) 반석평(潘碩枰)


    음성지역 풍수답사는 반기문 유엔사무총장과 연관해서 생가, 조상묘를 둘러보기 위해 가는 곳이다. 이미 몇차례 다녀온 곳이라 이번 답사는 안가려 했으나 수강생 몇분이 가신다기에 함께 따라 나섰다. 광주 반씨 선영에는 반석평을 제외해 놓고는 언급하기 곤란할 정도로 큰 비중을 차지한다. 반기문 총장의 15대조인데 조선 중종 때 8도감사를 지낸 분이다.

    일생이 좀 부침이 많으신 분인데 아마도 서얼 출신에서 오는 시기와 투서 등으로 그랬을 것이다. 성품이 온화하고 청렴하여 위기를 슬기롭게 잘 극복한 것으로 나온다.

    묘는 원래 남양주 조안면에 있던 것을 음성 행치마을로 이장했으며 현재의 묘역이 조성되었다. 북서향의 묘역으로 바람이 가장 두려운 곳인데 청룡이 갈무리하지 못해 아쉽고 백호 또한 반견으로 물을 가두지 못해 재물이흩어지기 쉽다. 근자에 이장을 하였다하니 큰 의미를 두기는 어렵고 조상 묘를 한 곳으로 모아 충효를 다하고 있다는데 더 큰 의미가 있을듯 하다.



    장절공(壯節公) 반석평(潘碩枰)

     

    ?∼1540(중종 3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공문(公文), 호는 송애(松厓). 증조는 사덕(思德)이고, 할아버지는 강(崗)이며, 아버지는 서린(瑞麟)이다. 어떤 재상의 종이었으나 재상이 그의 재주와 성품을 사랑해 글을 가르치고 아들없는 부자집에 양자로 보내 공부에 힘쓰게 하였다. 조광조(趙光祖)·김식(金湜) 등과 교유하였다.

    1507년(중종 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어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이 되고 경차관(敬差官)으로 함경도에 파견되어 여진의 동정을 보고했으나 천얼 출신이라 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다. 1516년 안당(安塘)의 추천으로 종5품으로서 경흥부사가 되고, 1522년 만포진첨절제사(滿浦鎭僉節制使)를 거쳐 함경남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그러나 1524년 군기를 살피지 않고 도로 사정을 잘못 보고했다는 이유로 탄핵받아 파직되었다가 다시 병조참의에 임명되었다. 1527년에 함경북도병마절도사, 1530년에 경연특진관(經筵特進官)과 충청도관찰사를 거쳤다. 1531년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예조참판과 전라도·경상도 관찰사를 지냈다.

    1533년 다시 함경북도병마절도사로 임명되었으나 이미 한번 역임한 바 있고 또 문신이기 때문에 불가하다는 반대가 있어 부임하지 못하였다. 그 후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공조판서가 되었다. 그러나 시종(侍從)을 역임하지 않았다 하여 공조참판으로 고쳐 임명되었다.

    동지중추부사·형조참판·한성부판윤·형조판서 등을 지내고 이듬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뒤에 주인집 자손이 잔미(殘微)해 졌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 노상에서 만나면 반드시 예의를 차렸다 하며 청렴하고 겸공한 관리로 이름났다. 시호는 장절(壯節)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발췌>

     

    문화재지정 

    비지정

    문화재명칭

    장절공(壯節公) 반석평(潘碩枰) 묘

    소재지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하노리 산 4-1

    관리자(연락처)

    광주반씨 장정공파 행치파

     

    ▼ 장절공(壯節公) 반석평(潘碩枰) 묘역 전경

    ▼ 장절공(壯節公) 반석평(潘碩枰) 묘 전경

    ▼ 장절공(壯節公) 반석평(潘碩枰) 묘비

    ▼ 장절공(壯節公) 반석평(潘碩枰) 옛 묘비

    ▼ 장절공(壯節公) 반석평(潘碩枰) 묘 청룡쪽 석물

    ▼ 장절공(壯節公) 반석평(潘碩枰) 묘 백호쪽 석물

    ▼ 장절공(壯節公) 반석평(潘碩枰) 묘갈


    반석평 묘갈명 전문 [潘碩枰 墓碣銘 全文]


    判書潘公墓碣銘 (篆額)

    有明朝鮮國資憲大夫刑曹判書兼五衛都摠府都摠管 贈謚 潘公墓碣銘 幷序

    嘉善大夫行掌隷院判決事 鄭士龍 撰

    通德郞守議政府舍人兼春秋館編修官世子侍講院弼善 金魯 書幷篆額


    吾執友司冠潘公父氏寢疾始吾候視日一至焉其篤也再至三至竟不起吾哭之慟越辛丑夏練且有日其庶子士渾用趙夫人命?銘將表諸墓道嗚呼吾尙?不?之文使公行迹不顯於後耶公諱碩枰公父其字系出海陽卽今光州有諱思德忠武副護軍 贈兵曹參議諱岡鏡城判官 贈戶曹參判諱瑞鱗忠佐副司果贈吏曹判書皆以公貴也判書配卽忠武副護軍張智之女公生于成化壬辰幼挺?不群稍長學日進游于上庠以聲譽服輩行正德丙寅 聖上改玉翌年大比釋褐卽選補藝文館檢閱居史局者五閱寒暑陞司憲府監察工曹佐郞公素長射御多權略朝議欲試邊地除咸鏡北道評事告滿遷司諫院正言歷戶刑禮三曹正郞時棟▨將無出公右擢超三級授慶興府使公推心?職大爲民夷所頌連收五最內遷承文院參校轉內資正復超四級秩通政慶源府使未上任?疾就醫于京滿浦僉使缺公用廷薦出鎭居數年復以疾還除公州牧使癸未 朝廷用師西北驅逐近塞夷落特拜公咸鏡南道節度使未幾坐事遞任俄授兵曹參議在中兵凡五年贊務輸盡時論歸多竟擢拜咸鏡北道節度使階嘉善公久於戎事曉達夷情條說??隱然有推?之望朝議不復煩以摠練之任進試方岳歷按忠淸全羅平安咸鏡黃海五道自始政至報?皆用勤謹爲理復遍爲春省地官冬曹貳卿京兆亞尹初備參僚復充上介兩遭朝燕擧無愆效竟用久次望屬陞秩 特超資憲拜漢城判尹遷刑曹判書兼都摠管及屬疾?閒移知樞府公自筮仕至易?實三十四年歷任中外皆有聲績性周敏裁決事務案無留牘慮定應卒事多辦治待人御下皆得?心律身簡約終始不懈而展用未究議者嗟惜公凡三娶初配朴氏生員桂亨之女繼配李氏府使檣之女三聘趙氏士人龜齡之女卒無嗣而李趙皆封貞夫人庶出子曰士渾女嫁參判崔璡子士淸公卒于嘉靖庚子五月十九日春秋周甲有九用治命偶葬李夫人于廣州龍津里寔是年八月初一日 銘曰


    朝務擇人 人自重身 世官多? 孤進易伸 公携束書 有名稷下 不事沽衒 躍于大治 收聲珥筆 取最戎馬 由卑至鉅 罔非己致 棠?卿曹 五憩三貳 謙福衛蹟 孰我敢? 逮判京兆 又長秋部 倚任方殷 胡嗇其壽 業家雖微 慮深必達 我銘孔厚 以微裔末


    嘉靖二十年辛丑十月 日樹


    반석평 묘갈명 해설


    판서 반공(潘公) 묘갈명 (전액)

    유명조선국 자헌대부 형조판서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증시 반공묘갈명 서문을 아울러 쓰다.

    가선대부 행장례원판결사 정사룡(鄭士龍)이 글을 짓고,

    통덕랑 수(守)의정부사인 겸춘추관편수관 세자시강원필선 김로(金魯)가 글씨를 쓰고 아울러 전액을 한다.


    나의 벗 형조판서 반공보(潘公父)씨가 병에 걸리자 처음에는 내가 문병한 것에 하루에 한번 갔고 위독해짐에 두 번, 세 번도 갔었는데 필경은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으니 내가 슬피 곡하였다. 해를 넘겨 신축년(1541, 중종 36))에 소상이 끝나고 며칠 뒤 그 서자 사혼(士渾)이 조부인(趙夫人)의 명을 받고 명(銘)을 청해 묘에 표식을 하고자 하였다. 아아! 내가 차마 변변치 못한 글을 아껴서 공의 행적을 후세에 드러내지 못하게 하겠는가? 공의 이름은 석평(碩枰), 공보(公父)는 그 자이니 세계는 해양(海陽)에서 나왔는데 바로 지금의 광주(光州)이다. 사덕(思德)이라는 분은 충무위부호군을 지내고 병조참의에 증직되었으며 강(岡)은 경성판관을 지내고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서린(瑞鱗)은 충좌위 부사과를 지내고 이조판서에 증직되었으니 모두 공이 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판서의 부인은 즉 충무위부호군 장지(張智)의 따님이다. 공은 성화 임진년(1472, 성종 3))에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우뚝하게 빼어나 무리 중에서 뛰어났으며 점차 장성하며 학문이 날로 진보되었다.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는 훌륭한 명성으로 동년배들을 감복시켰다. 정덕 병인년(1506)에 중종이 반정을 하고 다음해의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곧 예문관검열에 보임되었다. 사국(史局)에서 5년을 지내고 사헌부감찰, 공조좌랑에 승진하였다. 공은 평소 활쏘기와 마술에 능하고 책략이 많으니 조정의 논의가 변방에서 공을 한번 써보고자 하여 함경북도 평사(評事)에 임명하였다. 임기가 차서 사간원정언으로 전임되고 호조, 형조, 예조 등 삼조의 정랑을 역임하였다. 당시 유장(儒將: 문신으로 장수에 임용되는 것)을 뽑는데 공보다 나은 사람이 없으니 발탁하여 세 품계를 올려서 경흥부사에 제수하였다. 공은 진심을 다해 직책에 임하니 백성과 오랑캐들이 크게 칭송하였고 인사고과에서 연이어 다섯 번 최우수를 받았다. 내직으로 승문원참교에 전임되었다가 내자시정으로 옮겼다. 다시 네 등급을 넘어 통정대부의 품계로 경원부사가 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병에 걸려 서울로 와서 의원에게 갔다. 만포첨사의 자리가 비자 공은 조정의 천거로 만포진에 나갔다. 몇 년을 지내고 다시 병으로 돌아와 공주목사에 임명되었다. 계미년(1523, 중종 18)에 조정에서는 서북에 군사를 일으켜 요새 근처의 오랑캐부락을 쫓아내고자 하여 특별히 공을 함경남도절도사에 임명하였다. 얼마 안 되어 일에 휘말려 체임되었으나 곧 병조참의에 임명되었다. 병조에 재임한 것이 5년인데 업무를 도와 극진히 하니 당시의 여론이 많이 쏠렸다. 마침내 함경북도절도사에 발탁되어 임명되니 품계는 가선대부이다. 공은 군사의 일에 오래 종사하여 오랑캐의 사정을 정통하게 알고 조목조목 힘써 개진하여 은연중 장수의 명망이 있었기에, 조정의 논의가 군사를 감독하고 조련하는 직임 때문에 다시 번거롭지 않았다. 관찰사로 등용이 되어 충청, 전라, 평안, 함경, 황해 등 다섯 도의 관찰사를 역임하였는데, 처음 정사를 볼 때부터 임기가 만료될 때까지 모두 부지런하고 공경히 함을 법도로 삼았다. 다시 두루 예조와 호조, 공조의 참판, 한성부의 차관을 지냈다. 처음에는 막료로서, 두 번째는 상사(上使)로 두 번 명나라에 갔는데 일을 거행함에 어긋남이 없어 마침내 효과가 있었다. 오래도록 승진하지 못하다가 명망이 모아지자 승진하여 특별히 자헌대부에 올라 한성판윤에 임명되었으며 형조판서로 전임하여 도총관을 겸하였는데 병에 걸리자 한가한 직책을 구하여 지중추부사로 옮겼다. 공이 벼슬을 시작해서 별세할 때까지 실로 34년이니 내외의 직책을 역임하여 모두 훌륭한 업적이 있었다. 성품은 빈틈이 없고 민첩하니 사무를 재결함에 책상에는 지체된 서류가 없었으며, 숙고해서 결정하고 갑작스러운 일에 대응하니 많은 일이 처리되었다. 사람을 대하고 부하를 다스림에 모두 환심을 얻고, 자기 몸을 간약(簡約)하게 지켜 시종 게으르지 않았으나 뜻을 펼치는 것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공은 세 번 장가갔는데 첫 부인 박씨는 생원 계형(桂亨)의 딸이고 둘째부인 이씨는 부사 장(檣)의 딸이며 셋째부인 조씨는 선비 구령(龜齡)의 딸인데 끝내 후사가 없다. 이부인과 조부인은 모두 정부인에 봉해졌다. 서출의 아들은 사혼(士渾)이고 딸은 참판 최진(崔璡)의 아들 사청(士淸)에게 시집갔다. 공은 가정 경자년(1540, 중종 35) 5월 19일에 별세하니 춘추는 69세이고 유언에 따라 광주(廣州) 용진리(龍津里)에 이부인과 함께 장사지냈으니 즉 이해 8월 1일이다. 명하노니,


    조정에서 사람을 선발함에 힘쓰니 사람마다 자중하는구나.

    대대로 벼슬길 실패 많은데 외로이 나아가 쉽게 능력 펼치네.

    공은 책 보따리 항상 가지고 다니며 직하(稷下: 제선왕이 학궁을 세운 곳, 성균관을 이름)에서 명성 얻었으나

    명예를 구하거나 자신을 드러내면서 크게 쓰이기를 일삼지 않았다.

    명성 거두어져 한원에서 붓을 잡았고 군사의 일에 가장 뛰어났구나.

    미관을 거쳐 높은 자리에 이르도록 지극하지 않은 것이 없었네.

    지방관이 되고 중앙의 대신을 지내니 다섯 곳의 관찰사가 되고 삼조의 참판이 되었다.

    겸손함에 복을 받고 그 자취 지키니 누가 감히 나를 막겠는가?

    경조의 판윤이 되고 또 형조판서가 되어

    의지하는 책임 바야흐로 성대한데 어찌 그 수명에 인색하였는가?

    집안은 비록 미미하나 원려 깊으니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내가 매우 간절히 명을 써서 후손에게 밝히노라.


    가정 20년 신축년(1541, 중종 36) 10월 일에 세우다.

    <인터넷 블로그 화암의 세상만사에서 발췌>


    ▼ 장절공(壯節公) 반석평(潘碩枰) 묘 후경


    ▼ 장절공(壯節公) 반석평(潘碩枰) 묘 위에 최근에 이장한 부친 반서린 묘


    ▼ 장절공(壯節公) 반석평(潘碩枰) 묘 아래에 있는 반사렴 묘

    ▼ 장절공(壯節公) 반석평(潘碩枰) 양자인 반사렴 묘비


    ▼ 장절공(壯節公) 반석평(潘碩枰) 증손인 반충익 묘비

    ▼ 장절공(壯節公) 반석평(潘碩枰) 증손 반충익 묘 후경...

    ▼ 반충익 묘 뒤에는 큰 암반이 박혀있다. 이런 곳은 일반적으로 피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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