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강원 삼척]삼척척주동해비및평수토찬비 (三陟陟州東海碑및平水土讚碑)
    답사는 즐거워/문화재답사 2020. 1. 20. 11:54


    삼척척주동해비및평수토찬비 (三陟陟州東海碑및平水土讚碑)


    삼척답사를 하는 이유는 준경묘가 있어서다. 그런데 그곳만 다녀오기는 뭐해서 항상 인근의 다른 묘를 함께 답사에 넣는데 이번에는 회원분 중에 한분이 미수 허목선생을 잘 아시는 분이 있어서 그 분과 연관된 유적지를 보자고 하셔서 척주동해비를 답사하게 되었다.

    삼척에 있지만 관심 없는 분들은 전혀 모르는 이 문화재를 오늘은 소개해 드린다. 벌써 오래 되었는데 해를 넘기고 한 겨울에 답사기를 올리려고 하니 기억도 잘 나지 않지만 더듬어 그 의미만을 올린다.

    답사 당일에 비가 많이 내려서 사진도 별로고 또한 척주동해비가 있는 육향산이 한창 발굴조사 중이어서 조금은 어수선한 상태였다. 한 여름의 모기는 아주 극성이어서 잠깐 다녀오는데도 여러 곳을 쏘고 흔적을 남기었다. 그 오묘함이 간직된 척주동해비를 보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면 소원이 성취된다고 하니 이 글을 보시는 분들에게도 효험이 미쳐 좋은 기운을 얻길 바랍니다.


    삼척척주동해비및평수토찬비 (三陟陟州東海碑및平水土讚碑)


    조선 현종 2년(1661) 때 삼척 부사를 지낸 허목(1595∼1682) 선생과 관련이 있는 2기의 비이다. 허목 선생은 성리학을 발전시켰으며 제자백가와 경서연구에 전념하였고 특히 예학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한다.

    척주동해비는 정상리 육향산에 자리하고 있다. 원래 정라진앞 만리도에 세워 놓았던 것을 비가 파손되자 숙종 36년(1710)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당시 이 지방은 파도가 심하여 바닷물이 마을까지 올라오고 홍수가 지면 주민의 피해가 극심하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허목이 신비한 뜻이 담긴 글을 손수 짓고 독특한 필체로 비문을 새겨 이 비를 세웠는데, 신기하게도 바다가 잠잠해지고 그후로 주민들의 피해도 없었다고 한다. 문장이 신비하면서 물리치는 능력도 지녔다 하여 ‘퇴조비’라고도 불리우며, 전서체(篆書體)에서 동방의 제1인자로 불리우는 허목 선생의 기묘한 서체로 인해 더욱 유명한 비이다.

    평수토찬비는 척주동해비와 조금 떨어져 있으며 동해비와 같은 의미로 세운 것이다. 중국 형산의 우제가 쓴 전자비(篆字碑)중 일부를 허목이 목판에 새겨 보관하던 것을, 고종 광무 8년(1904) 왕의 명에 의해 칙사 강홍대 ·삼척군수 정운석 등이 돌에 그대로 새겨 넣은 것이다.

    <문화재청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8호

    문화재명칭

    삼척척주동해비및평수토찬비 (三陟陟州東海碑및平水土讚碑)

    소재지

    강원도 삼척시 허목길 13-9 (정상동)

    관리자(연락처)

    삼척시청

     

    ▼ 삼척척주동해비및평수토찬비 (三陟陟州東海碑및平水土讚碑)가 있는 육향산 전경... 앞쪽은 발굴조사 중이다.

    ▼ 육향산 안내도

    ▼ 삼척척주동해비 및 평수토찬비 (三陟陟州東海碑및平水土讚碑) 안내판

    ▼ 육향산 입구에 있는 선정비

    ▼ 삼척포진성지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척주동해비는 정상리 육향산에 자리하고 있다. 원래 정라진앞 만리도에 세워 놓았던 것을 비가 파손되자 숙종 36년(1710)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당시 이 지방은 파도가 심하여 바닷물이 마을까지 올라오고 홍수가 지면 주민의 피해가 극심하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허목이 신비한 뜻이 담긴 글을 손수 짓고 독특한 필체로 비문을 새겨 이 비를 세웠는데, 신기하게도 바다가 잠잠해지고 그후로 주민들의 피해도 없었다고 한다. 문장이 신비하면서 물리치는 능력도 지녔다 하여 ‘퇴조비’라고도 불리며, 전서체(篆書體)에서 동방의 제1인자로 불리는 허목 선생의 기묘한 서체로 인해 더욱 유명한 비이다.

    1661년(현종 2) 삼척부사 허목(許穆)이 동해의 풍랑으로 바닷가에 사는 백성들이 피해를 입는 일이 많아 이를 막고자 동해를 칭송하는 글인 「동해송(東海頌)」을 짓고, 그의 독특한 전서체(篆書體)로 비문을 새겨 정라진 앞 만리도 바닷가에 세워서 풍랑을 진정시킨 비석이라 한다.

    이후 1708년(숙종 34년) 풍랑으로 비석이 부러져 바다에 잠겼던 것을 1709년(숙종 35년) 부사 홍만기가 문을 본떠서 다시 새겼으며, 1710년(숙종 36년)에 삼척부사 박내정(朴來貞)이 유실한 비석의 탁본으로 옛 비석과 같은 비석을 다시 만들어 죽관도 동쪽에 다시 건립하였다가 1969년 12월 6일 지금의 자리인 육향산 산정에 이건하였다.

    비각의 전면에 "척주동해 비각" 제액과 후면에 "동해비각" 제액이 게판되어 있다.

    문장이 신비하면서 물리치는 능력도 지녔다 하여 ‘퇴조비’라고도 불리며, 전서체(篆書體)에서 동방의 제1인자로 불리는 허목 선생의 기묘한 서체로 인해 더욱 유명한 비이다.

    조선 영조 때 학자인 홍양호(洪良浩)는 “지금 동해비를 보니 그 문사(文辭)의 크기가 큰 바다와 같고, 그 소리가 노도와 같아 만약 바다에 신령이 있다면 그 글씨에 황홀해질 것이니, 허목이 아니면 누가 다시 이 글과 글씨를 썼겠는가.” 하고 감탄하였다 한다.

    척주동해비의 원고로는 허목수필동해비첩(許穆手筆東海碑帖)과 허목수고본금석운부(許穆手稿本金石韻府)가 있다. 이 서첩들은 강원도 삼척에 있는 비석 ‘척주동해비’의 제작에 쓰인 원본으로, 허목의 글씨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해일의 피해가 극심했던 강원도 삼척에 부사로 부임한 허목은 바다를 잠재우기 위해 ‘동해송東海頌’이라는 시를 짓고 이를 비석으로 만들어 세웠다. 허목許穆(1595~1682)은 조선 중기의 유학자이며 정치가, 예술가로, 전서篆書를 깊이 연구하여 미수체眉?體라는 자신의 글씨체를 이루었다. 그의 전서체는 고전古篆을 바탕으로 하여 독특한 형상과 변화가 큰 날카로운 필치로써 개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 원고본은 바로 이러한 허목 글씨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본문은 비석 원고라는 점을 바탕으로 구성했기에 전체적으로 자간字間과 행간行間 배열의 정연한 조화에 신경 썼으며, 글씨 또한 전서의 기본적 포치로 잘 구성하였다. 중복된 글자는 자형字形 변형으로 변화를 주었지만 이는 철저한 고증을 근거로 한 것으로, 허목의 고문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심미안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에는 글씨가 괴이하다 하여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옛 한문자를 깊이 연구하여 자신의 글씨체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조선시대 17세기의 개성 있는 글씨체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위키백과에서 인용>


    ▼ 삼척척주동해비 (三陟陟州東海碑) 안내판

    ▼ 삼척척주동해비각 (三陟陟州東海碑閣) 

    ▼ 척주동해비 (陟州東海碑) 전면

    ▼ 삼척척주동해비 (三陟陟州東海碑) 후면

    ▼ 삼척척주동해비 (三陟陟州東海碑)(비석사진: 증산도 홈페이지 문화정보란에서 옮겨옴)(비석글씨: 다음사이트 이미지에서 인용)

    ▼ 삼척척주동해비 (三陟陟州東海碑)탁본(이택용의 e야기에서 인용)

    ▼ 삼척척주동해비각 원경 


    평수토찬비 (平水土讚碑)


    평수토찬비 비문 역시 삼척 부사 허목이 짓고 쓴 것이며 동해비와 같은 의미로 세운 것이다. 중국 형산비(衡山碑)의 대우수전(大禹手篆) 77자 가운데 48자를 가려서 새긴 것으로, 임금의 은총과 수령으로서 자신의 치적을 기린 글이다. 현종 원년(1661) 목판에 새기어 읍사(邑司)에 보관되어 오다가 240여년 후인 광무 8년(1904) 칙사(勅使) 강홍대와 삼척군수 정운철 등이 왕명에 의해 석각하여 죽관도에 건립하였다. 비의 높이는 145cm, 폭 72cm, 두께 22cm이며, 비각의 전면에 "우전각(禹篆閣)" 제액이 게판되어 있다.

    당초 세운 비석은 유실되고 현재의 비석은 다시 세운 비석으로 전면에 해서(楷書)로 ‘大韓平水土贊碑(대한평수토찬비)’라 새기고 측면에는 고종 41년(1904) 비석을 옮겨 세운다는 기록이 있다.

    <위키백과에서 인용>


    대한평수토찬비 내용


    久旅忘家(구여망가) 오래도록 자기 집을 잊어버리고

    翼輔承帝(익보승제) 임금의 뜻을 보좌하였네.

    勞心營知(노심영지) 마음을 쓰고 지혜를 써서

    衰事與制(쇠사여제) 사업을 모으고 제도를 흥성하게 하니

    泰華之定(태와지정) 온 세상이 안정되고

    池凟其平(지독기평) 바다와 하천 모두 평온하구나.

    處水奔麓(처수분록) 물에 처하여 산록은 구불구불

    魚獸發形(어수발형) 고기와 짐승이 모습을 나타낸다네.

    而岡弗亨(이강불형) 형통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伸鬱疏塞(신울소색) 답답한 것이 해결되고 막힌 것이 뚫리리니

    明門與庭(명문여정) 밝은 문과 뜰에서

    永食萬國(영식만국) 만국의 백성이 길이 먹고 살리라.

    (월간개벽 2019년 1월)


    ▼ 대한평수토찬비 (大韓平水土讚碑) 안내판

    ▼ 대한평수토찬비 (大韓平水土讚碑)를 보관한 우전각

    ▼ 대한평수토찬비 (大韓平水土讚碑)

    ▼ 대한평수토찬비 (大韓平水土讚碑) 후면

    ▼ 평수토찬비(平水土讚碑)(비석사진: 증산도 홈페이지 문화정보란에서 옮겨옴)(비석글씨: 다음사이트 이미지에서 인용)

    ▼ 육향산 정상에 있는 육향정기

    ▼ 육향정(六香亭)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