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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포천]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성여완(成汝完), 영의정 성석린(成石璘) 묘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20. 2. 13. 17:54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성여완(成汝完), 영의정 성석린(成石璘) 묘


    영의정 성석린 묘는 몇 해 전부터 가려고 했는데 한 번 기회를 놓쳤더니 그 이후 계속 어긋나면서 이제사 찾았다. 지난 여름에 방문했더니 가는 길이 풀로 완전 뒤덮여 도저히 접근이 안돼 되돌아오고 그 인근 까지 갔다가 되돌아온 게 여러 번이다. 

    이번에는 맘먹고 이곳부터 찾았다. 이런 첩첩산중에 묘역을 조성한다는 게 이상했는데 성여완, 성석린 선생이 말년에 이곳 근처에서 여생을 보내고 이곳에 잠든 것으로 나와서 이해가 간다. 두분 다 당시로서는 장수인 80세를 훌쩍 넘기고 지내셨다. 이곳 묘역은 용이 앞쪽에서 들어와서 회룡고조형 지형으로 앞쪽 하늘봉을 조산(祖山)으로 시작된다. 안산이 가까워 발복은 빠르게 진행되겠다. 물은 우수도좌하여 수구는 잘 막아져 있다.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성여완(成汝完)


    조선 전기 포천 지역에 은거했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초명은 한생(漢生), 일명 광자(匡自), 호는 이헌(怡軒). 창녕 성씨(昌寧成氏) 시조인 성인보(成仁輔)의 현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문하시중 성송국(成松國)이다. 할아버지는 전객서 부령 성공필(成公弼)이며, 외할아버지는 삼사 좌윤 오천(吳蕆)이고, 아버지는 판도 총랑(版圖摠郞) 성군미(成君美)이다. 아들은 성석린(成石璘)[1338~1423] 등이 있고, 손자는 성발도(成發道)[?~1418] 등이 있다.

    성여완(成汝完)[1309~1397]은 1336년(충숙왕 복위 5) 문과에 급제하여 첨서밀직사사와 정당문학을 역임하였다. 1371년(공민왕 20) 민부상서로 있을 때 신돈(辛旽)이 처형당하자 그 당류로 지목되어 장류(杖流)를 당하였다. 1378년(우왕 4) 다시 정당문학 상의에 발탁되었다. 1389년(창왕 2)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정변에 아들 성석린(成石璘)이 참여하여 공신이 되었으나, 1392년(공양왕 4) 정몽주(鄭夢周)가 주살되고 공양왕이 폐위된 후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세우자 벼슬을 버리고 포천 왕방산 아래 계류촌[지금의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지역]에 은거하면서 스스로를 왕방 거사(王方居士)라 하였다.

    조선 태조가 고려 구신(舊臣)의 회유책으로 검교 문하시중, 창녕 부원군에 봉하였으나 고사하였다. 또 태조가 경회루에서 큰 잔치를 베풀고 초청하자 평복인 흰 옷을 입고 참석해 고려 충신의 절조를 나타냈다고 한다. 남양군(南陽君) 행촌(杏村) 홍주(洪澍), 금성군(錦城君) 월포(月浦) 나영걸(羅英傑), 남양후(南陽侯) 양파(陽坡) 홍언박(洪彥博) 등과 교유하였다. 묘는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고일 2리 산30번지에 있다.

    1397년(태조 6) 89세로 사망하자 조정에서 쌀과 콩 100석을 하사하여 장사를 돕도록 하였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개성에 3기의 유허비가 건립되었는데, 첫 번째는 1596년(선조 29) 7세손 유수 성수익(成壽益)이 세운 ‘창녕 부원군 문정공 성여완 유허(昌寧府院君文靖公成汝完遺墟)’이다. 두 번째는 첫 번에 세운 유허가 세월이 흘러 손상되자 1710년(숙종 36) 외예(外裔) 권상유(權尙游)[1656~1724]가 새로 세웠으며, 세 번째는 1752년(영조 28) 3월 14세손 행경력(行經歷) 성대열(成大烈)이 비각을 세웠다는 내용이다. 1810년(순조 10) 11월 24일과 29일 양주 유생 정산휘(鄭山輝) 등 252명이 정절사(旌節祠)에 추향(追享)하도록 요청하여 시행되었다.


    영의정 성석린(成石璘)


    고려 말 조선 전기 포천 출신의 학자이자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자수(自修), 호는 독곡(獨谷). 아버지는 부원군 성여완(成汝完)이다.

    성석린(成石璘)[1338~1423]은 1357년(공민왕 6) 과거에 급제하여 국자 학유(國子學諭)에 제수되었다.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이제현(李齊賢)이 국사를 편수하면서 그의 재능을 인정하여 항상 글을 짓게 하였다. 예문관의 공봉(供奉), 삼사(三司)의 도사, 전의시의 주부 등을 지냈다. 공민왕도 그를 중용하여 차자방(箚子房)[뒤의 상서원(尙瑞院)]의 필도치(必闍赤)로 등용하였다. 전교시 부령, 지인 상서(知印尙書), 예부 총랑 등을 역임하였다. 신돈(辛旽)의 미움을 사서 외관으로 밀려 해주 목사가 되기도 하였으나,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성균관 사성·삼사 좌윤·밀직사 좌부대언·지신사·제학 등을 지냈다.

    1380년(우왕 6) 여름 왜구가 승천부(昇天府)에 침입하자 원수(元帥)가 되어 부장 양백연(楊伯淵)과 나아가 싸웠다. 여러 장수가 왜적의 기세에 눌려 후퇴하려 하자,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것을 주장하여 적을 무찔렀다. 그 해 가을 양백연의 옥사에 연루되어 함안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부름을 받아 창원군(昌原君)에 봉해지고 정당문학에 올랐다. 외직으로 양광도 관찰사가 되어 주·군에 의창(義倉)의 설치를 건의하여 조정에서 모든 도에서 행하도록 하였다. 이후 문하부 평리와 대사헌이 되었다.

    이성계(李成桂)의 조선 건국에 참여하여 단성보절찬화공신(端誠保節贊化功臣)의 녹권이 내려지고, 창성군 충의군(昌成郡忠義君)에 봉해졌다. 조선 태조가 즉위하자 문하시랑 찬성사가 되었고, 1392년(태조 1) 개성부 판사를 거쳐 한성부 판사를 지냈으며, 원종공신이 되어 노비 세 명과 토지 30결을 하사 받았다. 1395년(태조 4)에는 고려의 명당 가운데 한 곳으로 알려진 부소(扶蘇)를 도읍으로 정하라고 건의하였다. 정종이 즉위하여 외직으로 서북면 도순찰사와 서북면 도절제사, 평양 부윤을 지내고 내직으로 문하시랑 찬성사를 지냈다. 익대공신(翊戴功臣)의 녹권이 내려지고, 문하 우정승에 올랐다가 좌정승이 되었다.

    태종이 즉위해서는 좌명공신이 되고, 창녕 부원군에 봉해졌다. 1403년(태종 3)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통감강목(通鑑綱目)』과 『십팔사략(十八史略)』을 가지고 돌아왔다. 우의정에 이어 1407년(태종 7) 좌의정을 지냈으며, 이어 영의정 부사로 국방 대책 등의 ‘시무 20조’를 진달한 상서를 올렸다. 이 해 원단(圜壇)에서 왕을 대신하여 기우제를 올리기도 하였다.

    1408년(태종 8) 하륜과 함께 세자의 사부가 되었고, 1411년(태종 11) 사직을 원했으나 허락되지 않고 1414년(태종 14) 부원군으로 휴직하였다.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태조가 함흥으로 행차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태종이 태조의 환궁을 위해 중신 가운데 문안사를 차출하여 보냈으나 태조는 꿈쩍하지 않았다. 이에 태종은 영의정으로 태조와 친분이 두터웠던 성석린을 문안사로 지명하여 보내니 태조가 크게 반가워했다고 한다. 이에 태조의 옛 친구로서 조용히 인륜의 변고를 처리하는 도리를 진술하여 태조와 태종이 화합하게 되었다. 1415년(태종 15) 영의정이 되었으나 다시 부원군으로 물러났다. 1421년(세종 3) 노신으로서 왕에게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검소한 생활을 즐겼다고 전한다.

    초서를 잘 쓰고 시를 잘 지었다. 저서로 『독곡집(獨谷集)』이 있다. 말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지내면서 쉬는 곳에 항상 한 나무 궤를 놓아두고 앉아 ‘양화(養和)’라고 이름 하였다. 왕명으로 ‘태조 건원릉 비문(太祖健元陵碑文)’을 썼고, 정도전의 문집인 『삼봉집(三峰集)』 편찬에 참여하였다.

    묘는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고일 2리 산30번지에 있다.

    1423년(세종 5) 86세로 별세하자 왕이 제문을 내리고 부의(賻儀)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1790년(정조 14) 2월 지방관에게 명하여 묘소에 제사할 것을 청하는 건의가 있었고, 1799년(정조 23) 9월에는 태종 때 좌명공신에 책록된 서른여덟 명의 맏손자 명단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충훈부의 요청에 따라 유학(幼學) 성유완(成有完)의 명단이 올라가기도 하였다.

    <디지털포천문화대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포천시 향토유적 21호, 22호

    문화재명칭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성여완(成汝完), 영의정 성석린(成石璘) 묘

    소재지

    경기 포천시 신북면 고일리 산 24

    관리자(연락처)

    창녕성씨

     

    ▼ 창녕성씨(昌寧成氏) 묘소입구... 성여완(成汝完), 성석린(成石璘) 신도비가 있다.

    ▼ 창녕성씨(昌寧成氏) 묘소입구에 세워진 공덕비...

    ▼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성여완(成汝完) 신도비...

    ▼ 영의정 성석린(成石璘) 신도비

    ▼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문정공(文靖公) 성여완(成汝完) 유허비


    ▼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성여완(成汝完), 영의정 성석린(成石璘) 묘 위치도


    ▼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성여완(成汝完) 묘 안내판

    ▼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성여완(成汝完) 묘 원경

    ▼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성여완(成汝完) 묘

    ▼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성여완(成汝完) 묘 전경

    ▼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성여완(成汝完) 묘 특이한 장명등...

    ▼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성여완(成汝完) 묘갈명

    ▼ 성여완(成汝完) 묘표

    ▼ 성여완(成汝完) 배위 경안택주 금성나씨 묘표

    ▼ 성여완(成汝完) 묘표와 석물...

    ▼ 성여완(成汝完) 배위 묘표와 석물...

    ▼ 성여완(成汝完) 묘 청룡쪽 석물...

    ▼ 성여완(成汝完) 묘 백호쪽 석물...

    ▼ 성여완(成汝完) 묘 측경...

    ▼ 성여완(成汝完) 묘 입수도두...

    ▼ 성여완(成汝完) 묘 도두...

    ▼ 성여완(成汝完) 묘 후경...


    ▼ 영의정 성석린(成石璘) 묘 안내판

    ▼ 영의정 성석린(成石璘) 묘 원경

    ▼ 영의정 성석린(成石璘) 묘 전경... 묘역 전순이 좁아서 전체 사진을 찍기 어렵다.

    ▼ 영의정 성석린(成石璘) 묘는 청룡쪽으로 올라간다.

    ▼ 영의정 성석린(成石璘) 묘 전경

    ▼ 영의정 성석린(成石璘) 묘표

    ▼ 영의정 성석린(成石璘) 배위 화숙택주(和肅宅主) 순홍군 안씨 묘표

    ▼ 영의정 성석린(成石璘) 묘 청룡쪽 석물

    ▼ 영의정 성석린(成石璘) 묘 백호쪽 석물

    ▼ 영의정 성석린(成石璘) 묘 측경

    ▼ 영의정 성석린(成石璘) 묘 입수도두

    ▼ 영의정 성석린(成石璘) 묘 후경

    ▼ 영의정 성석린(成石璘) 묘 인증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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