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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횡성]경원군(慶原君) 이반계(李攀桂) 묘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20. 3. 25. 09:00
경원군(慶原君) 이반계(李攀桂)
이반계(李攀桂, ? - 1392)는 이알평의 후손으로 고려시대 말기,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이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조선 건국에 반대하여 절의를 지켰다. 호(號)는 송헌(松軒)이며 작위는 경원군이다. 고려왕조에서 예부상서(조선시대의 예조판서에 해당)를 지냈고, 조선왕조에서 태종 이방원이 그의 절개를 높이 사서 영의정을 추증(사후 작위나 벼슬을 내리는 일)하였다. 운곡 원천석(耘谷 元天錫)의 문인이다. 시호는 충절(忠節)이다.
운곡 원천석(耘谷 元天錫)과는 친구사이이며, 예부상서 시절에는 이방원을 제자로 가르쳤다.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여러 벼슬을 지내고 전의교위(殿毅校尉), 신호위영중랑장(神虎衛嶺中郞將)과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역임하였다. 1392년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공양왕을 몰아내고 조선을 개국하자 벼슬을 버리고 운곡 원천석(耘谷 元天錫)과 함께 강원도 원주 치악산에 내려가 사전리에 들어갔다. 이후 은거하며 고려의 운이 다하고 이씨의 세상이 됨에 차라리 굶어죽을지라도 이씨의 신하는 되지않겠다고 맹세하고 나오지 않았다.
이후 단식 7일 만에 죽으니 후에 태종 이방원이 그의 절의를 가상히 여겨 경원군(慶原君)에 추봉하고 증직으로 영의정에 추증하였다. 경현사(景賢祠)에 배향되었고 충절(忠節)의 시호가 추서되었다.
이반계를 新원주이씨의 중시조로 삼고 있다
그의 맏아들은 이이(李耳) 자는 안지(安之), 호는 송우(松愚), 시호는 문열(文烈), 이이는 정몽주의 문하생이었다. 정주학에 정통했으며, 조선이 개국한 후 태종이 대제학의 벼슬을 내렸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교지(敎旨)를 받지 않았다. 당시 34세의 나이로 아버지의 뒤를이어 충절을 지키기 위해 자결하였음
둘째 아들은 이견(李肩) 자는 우오(友吾), 호는 운촌(雲村), 고려말 문과에 급제, 조선조초 병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이를 거절하여 정산현감으로 강송되었으며, 임기만 마치고 병을 핑계로 은거하였음 고을 백성들이 그의 치적을 기리는 영사철비를 세웠고,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운촌리는 그의 호를 따서 부르고 있다
셋째 아들은 이요(李腰 또는 이오) 고려말 승지를 지냈으며, 조선조 초 참의에 제수되었으나, 거절하여 파주목사로 강송되었음
넷째 아들은 이족(李足) 조선조 초 선무랑에 제수되었으나, 거절하여 산음현감으로 강송됨
<위키백과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미지정
문화재명칭
경원군(慶原君) 이반계(李攀桂) 묘
소재지
강원 횡성군 횡성읍 정암리 산 46
관리자(연락처)
원주이씨
▼경원군(慶原君) 이반계(李攀桂) 신도비
▼경원군(慶原君) 이반계(李攀桂) 신도비
▼경원군(慶原君) 이반계(李攀桂) 묘 오르는 길
▼경원군(慶原君) 이반계(李攀桂) 묘 전경
▼경원군(慶原君) 이반계(李攀桂) 묘갈
▼경원군(慶原君) 이반계(李攀桂) 구 묘표
▼경원군(慶原君) 이반계(李攀桂) 묘 석물... 근자에 설치한 석물들인데 망주석 위치도 맞지 않고 무인석을 배치한거라든지 뭔가 어수선하다.
▼경원군(慶原君) 이반계(李攀桂) 묘 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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