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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광주]다시 찾은 안정복(安鼎福) 묘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20. 3. 29. 09:00


    다시 찾은 안정복(安鼎福) 묘


    안정복 묘를 같이 가자고 후배가 해서 따라 나섰는데 예전과 다르게 내가 몸이 말을 듣지 않아서 도저히 올라갈 엄두가 안난다. 그래서 꽤를 부려 후배더러 안정복 묘를 다녀오라 하고 나는 안정복 묘 안산에 돌혈 묘가 있어서 예전부터 다녀오려고 했던 묘를 갔다.

    이곳이나 그곳이나 숨이 턱밑까지 차는 것은 마찬가지... 다른 때 안보였던 묘역, 사격들이 조금 더 보여서 다행이었지만 묘 진입로 쪽 사당 부근은 급속하게 변화되고 있어서 다시 한번 글을 올리게 되었다. 안정복 묘역은 지난번 올린 것을 보시고 이번에는 오르면서 전시 되어 있는 안정복 시비들과 지난 번에 빠진 것 위주로 다루겠습니다. 


    안정복(安鼎福)


    우리나라의 역사를 중국사에 종속시켜 다루는 것을 반대하고 독자적인 영역으로 서술했으며, 봉건사회의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했다. 본관은 광주. 자는 백순(百順), 호는 순암(順菴)·한산병은(漢山病隱)·우이자(虞夷子)·상헌(橡軒).

    할아버지는 울산부사 서우(瑞雨)이고, 아버지는 극(極)이며, 어머니는 이익령(李益齡)의 딸이다. 그의 집안은 당시의 중앙정계로부터 소외되고 있었던 남인 계열로 아버지는 관직에 나간 적이 없었으며, 그 자신도 한번도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벼슬이 주로 외직이었던 까닭에 어려서부터 할아버지를 따라 제천·울산·영광·무주·한양 등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1736년(영조 12) 아버지를 따라 경기도 광주 경안면 덕곡리로 이주했다. 그뒤 이곳에 거주하면서 〈성리대전 性理大全〉을 분석하고 〈치통도 治統圖〉·〈도통도 道統圖〉 등을 저술하는 등 주자학 연구에 몰두했다. 1746년 이웃 고을인 안산에 살던 이익(李瀷)을 만나 경세치용의 학문을 배우게 되었다. 1748년 이익이 동몽교관으로 추천했으며, 이듬해 만녕전참봉으로 첫 벼슬에 올랐다. 1751년 의영고참사, 이어 정릉직장·귀후서별제·사헌부감찰 등을 지냈다. 45세 되던 해 〈동사강목 東史綱目〉을 쓰기 시작해 1759년에 초고를 완성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20여 년 간 이익·윤동규(尹東奎) 등과 의견을 교환하면서 수정·보완 작업을 계속했다. 1772년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를 보필하는 익위사익찬이 되었고, 4년 뒤 정조가 즉위하자 목천현감을 지냈다. 그뒤 돈녕부주부·첨지중추부사 등을 거쳐 1790년(정조 14) 동지중추부사에 오르고 광성군(廣成君)에 봉해졌으나, 그가 맡은 직위는 실질적인 권한을 갖는 것이 아니라 고령에 따른 예우로 받은 산직(散職)이었다.


    양란 이후의 조선 봉건사회의 동요는 역사인식의 분야에서도 종래의 전통적인 역사인식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인식경향을 낳았다. 특히 이익은 화이관에 입각한 중국 중심의 역사서술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영역으로서의 자국사를 서술할 것을 주장했다.

    안정복은 〈동사강목〉·〈동사문답 東史問答〉·〈열조통기 列朝通紀〉 등의 역사서를 통해 이익의 사론을 구체화시켰다. 그는 조선의 역사를 중국사에 종속시켜 세가로 서술하는 종래의 편찬태도를 비판하고 본기로서 독자적으로 다룰 것을 주장했다. 한편 단군조선을 우리나라 정통왕조의 시작으로 설정하여 국사의 상한을 중국과 대등하게 끌어올렸으며, 종래 역사가들이 중국문헌이라면 별다른 검토 없이 믿어온 태도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또한 가능한 모든 사료를 수집하여 이를 철저히 고증하는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한편으로는 주자학적 대의명분론에 입각하여 우리나라의 역사를 정리하여 전통적인 역사인식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점은 그의 대표적인 역사서 〈동사강목〉이 주자의 〈자치통감강목〉의 체제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1801년(순조 1) 좌참찬에 추증되고, 1871년(고종 8) 문숙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다음백과에서 발췌>

     

    문화재지정 

    사당 : 광주시 향토문화유산 제5호

    문화재명칭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묘(사당 이택재)

    소재지

    경기 광주시 중대동 산 15-1(이택재: 중대동 197-2)

    관리자(연락처)

    광주안씨광양군파종중

     

    ▼ 광주안씨 신도비군... 예전에 마을 입구쪽에 있던 것을 최근에 이택재 앞으로 옮겨왔다.

    ▼ 광주안씨 유래비...

    ▼ 사간공 안성 신도비...

    ▼ 익헌공 안윤덕 신도비

    ▼ 증형조판서안공신도비명... 누구것인지는 자료를 확인하지 못했다.

    ▼ 광양군 안황 신도비...

    ▼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사당 이택재... 

    ▼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사당 이택재 앞에 세워진 안정복의 좌우명비...

    ▼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사당 이택재 안내판... 문화재 안내판들이 하나같이 맘에 들지 않는다. 왜 그렇게 못만들까? 일부러 그렇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생각도 든다. 한번에 제대로 만들어서 보수가 필요 없도록 못 만드는 건지 안 만드는 건지 글쎄...

    ▼ 이택재 안내석도 빛이 비춰 사진에는 영 아니다...

    ▼ 이택재 정문 영장문...

    ▼ 문숙공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선생 숭모비...

    ▼ 순암선생 시비

    ▼ 문숙공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묘소 오르는 길...

    ▼ 문숙공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묘소 오르는 길 왼편으로 안정복선생 시비들이 세워져 있다.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시비... 봄비...

    ▼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시비... 구름낀 산

    ▼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선생 탄신300주년 기념 한시 공모전 장원시...

    ▼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시비... 분국(盆菊)

    ▼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묘 오르는 계단...

    ▼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묘

    ▼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묘 전경

    ▼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묘 석물...

    ▼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돌혈일 때는 바람을 막아주는 사격이 필수적인데 허허로운 풍광이 마음을 싸하게 한다.

    ▼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묘갈

    ▼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묘 후경

    ▼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묘 입수룡... 아래쪽 결인처에서 비룡으로 입수한다.

    ▼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묘 곡장... 뒷쪽은 곡장으로 바람을 막고 있다.

    ▼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묘 아래쪽으로 등을 대고 빙고(憑高)를 취하고 있다.

    ▼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묘 아래로 낮으막한 봉우리가 있는데 그곳에 증조부 안신행 묘가 있다. 돌형혈인데 안정복 묘 보다는 안정감이 있다.


    ▼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증조부 안신행(安信行) 묘 입수룡... 비룡으로 돌형혈을 맺고 있다.

    안신행(安信行) 묘 입수처에서 바라본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묘

    ▼ 안신행(安信行) 묘에서 바라본 입수룡...

    ▼ 안신행(安信行) 묘 후경... 입수룡을 따라 들어가다보니 후경을 먼저 보게 된다.

    ▼ 안신행(安信行) 묘 전경


    ▼ 안신행(安信行) 묘갈...


    ▼ 안신행(安信行) 묘 아래에는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의 손자 안철중(安喆重) 묘가 있다.


    ▼ 안철중(安喆重) 묘표... 안철중 묘에 합장된 진천송씨, 또 옆에 숙인동복오씨 묘가 있는 것으로 봐서 배위로 보인다.

    ▼ 안철중(安喆重) 묘 앞쪽에는 익찬공 후부인 숙인 전주이씨 묘가 있는 것으로 봐서 안철중의 또다른 배위로 보인다.

    ▼ 안철중(安喆重) 묘 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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