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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王朝를 이끌어 낸 明堂들(1)풍수이야기/풍수이야기 2011. 2. 18. 11:10
朝鮮王朝를 이끌어 낸 明堂들(1) 準特大 明堂이상이라야 極貴人 出現
풍수지리학의 견지에서 볼 때 좋은 에너지(氣)가 취적된 곳을 길지(吉地) 또는 명당(明堂) 이라 일컫는데 길한 기운이 집적된 양을 기준 하여 가장 큰 터는 원국길지(四大垣局: 紫微 垣局, 天市垣局, 太微垣局, 天苑局)라 부르며 그 다음으로 큰 터는 천하대명당(天下大明堂), 특대명당(特大明堂)등 순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본다.
필자의 견해로는 음ㆍ양택(陰ㆍ陽宅)을 막론하고 원국 명당은 기(氣)의 집적 량이 90기(氣) 이상으로 일개황조(一個皇朝)를 출현시킬 만한 터전이고, 천하대명당은 60기(氣)이상으로 일 개왕조(一個王朝)를 탄생시킬 만하며, 특대명당은 통상 30기(氣)를 넘는 큰 명당으로 유구한 세월동안 한 가문을 크게 번창시키거나 몇 명의 극귀인(極貴人)을 출현시킬 만한 자리로 평가한다.
전주시 덕진동에 있는 전주이씨 시조묘역 전경
또한 특대명당은 되지 못하나 이에 준하는 큰 명당으로 26기(氣)이상일 경우 극귀인을 출 현 시키는 사례를 더러 보았다.
우리나라에는 많은 음ㆍ양택 원국 길지가 맺어져 있는데 그 동안 용운(用運)이 도래치 아 니 하여 우리 민족이 대성(大成)을 이루지 못했다고 보며 근래에 와서야 적지 않은 원국길 지와 천하대명당들이 때를 맞이하였으니 향후 우리 민족의 큰 성운을 예단케 한다.
필자가 답사한 바에 의하면 기 활용한 큰 명당들을 다음과 같이 거시할 수 있다고 사료한 다.
원국명당으로는 명태조 주원장明太祖 朱元璋)의 조부묘로 알려진 춘천시 우두산에 있는 소슬묘로서 17대 황제를 낼만한 자리이며 천하대명당으로는 평양에 있는 단군왕검릉, 함흥 에 있는 이성계의 고조부묘인 덕릉(德陵), 신라왕국의 주궁(主宮) 터였던 반월성터 등으로 수십 명의 군왕을 배출 시켰으며 종교시설로는 양산 통도사 금강 계단 터 등이 있다.
그 외 고구려나 백제, 고려 왕국이 활용한 천하대명당급 음택명당이 각기 있었을 것으로 예견 되지만 아직 확인을 하지 못한 상태이다.
기활용 했거나 현재 활용되고 있는 특대명당급의 큰 길지로는 조선왕조의 주궁 터였던 경 복궁 근정전, 창덕궁 인정전과 고려왕조의 왕궁이 있었던 만월대 궁궐터 등이 있다.
전주이씨 시조묘 입수맥
그 외에 양기명당으로는 성균관 명륜당터, 백제 왕궁 터로 추정되는 부여 구박물관터, 대전 둔산 정부 제3청사터, 계룡대터, 불국사터, 해인사터, 마곡사터, 수덕사터, 송광사터, 선암사 터, 경 기도청터, 충남도청터와 고려대학교 본관터등 을 들수 있다. 음택명당으로는 이성계 의 5대 조인 준경묘(濬慶墓: 일명 活耆陵), 전주이씨시조로 이성계 태조의 21대조인 이한(李 翰)묘, 신라국 4대왕묘인 석탈해릉(昔脫解陵), 동래 정 씨 2세인 정문도(鄭文道)묘, 청주 한 씨 중시조인 한란(韓闌)묘, 노태우 전대통령의 선조인 노문로(盧文老)묘 등이라고 본다.
특히 조선왕조가 활용한 큰 길지는 전주시에 있는 이한묘, 삼척시에 있는 준경묘, 함흥에 있는 덕릉, 구리시에 있는 이성계 묘(健元陵)와 예산에 있는 고종조부묘인 남연군(南延君)묘 등인데 이중에서 왕을 낸 길지는 준경묘, 덕릉, 남연군묘로서 덕릉은 천하대명당, 준경묘는 특대명당, 남연군묘는 준특대명당에 해당된다고 사료한다.
조선왕조의 근원이 됐다고 판단되는 이한묘와 준경묘, 덕릉, 남연군묘, 건원릉 등을 서술하 고 동왕조의 주궁 터였던 경복궁과 창덕궁에 대해서도 논평하겠다.
全州 肇慶壇안 特大明堂에 묻힌 李翰
전주시는 먼 옛날로부터 산세가 빼어난 호남지방의 요충지로 알려져 왔다.
원래 이 곳은 마한(馬韓) 땅이었는데 백제국 영토가 된 뒤 완산(完山)으로 명명되었으며 신 라국 경덕왕 때부터 전주(全州)로 호칭하여 왔다.
한때 후백제국 견훤왕(甄萱王)이 도읍을 삼은 일이 있었고 나주(羅州)와 함께 호남의 대처 (大處)가 돼 호남지방을 전라도(全羅道)로 일컫게 한 내력을 가진 도시이다.
그뿐 아니라 신라국 사공 이한(司公 李翰)때부터 조선조 태조의 오대조(五代祖)인 이양무 (李陽茂) 때까지 조선조 이씨 왕가의 선조들이 세거(世居)해 온 전주 이씨 발상지로서 조선 조의 역대 임금들이 이 고장을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관리해 온 곳이기도 하다.
이런 연고로 조선조 태조는 이 곳을 유수부(留守府)로 삼았었으며 태종은 현재의 전북대학 교 근처에 있는 조경단 부지에 경기전을 세웠다.
또한 영조는 이한공의 위패를 이 곳에 봉안하였고 고종은 대한조경단비(大韓肇慶壇碑)의 비문을 써 보내 큰 비석을 세우게 하고 비각을 설치하기도 했다.
전주시 조경단비
어떤 사유에서인지 이한묘의 봉분이 멸실 됐기 때문에 영조는 이 조경단 일대를 샅샅이 검 증 했으나 확증을 얻지 못하자 그럴싸한 자리에 가봉분을 조성했다고 전래 돼 온다.
속설에 따르면 이한이 묻힌 자리는 큰 명당인 까닭에 도굴 방지를 위하여 일부러 봉분을 마련치 않았다는 설도 있다.
어떻든 이 조경단 어느 곳인 가에는 천년을 두고 크게 번창할 큰 길지가 숨어 있다고 전래 돼 왔음이 사실이다.
이 묘 터의 산세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전주시 조경단 모습
이 길지의 태조산(太祖山)은 남덕유산에서 떨어져 마이산을 거쳐 북진해 온 운장산으로 보 며 소조산(少祖山)은 전주시 동남쪽에 첨수(尖秀)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는 기린봉 (麒麟峰)이다.
이 기린봉에서 북쪽으로 뚝 떨어져 흘러내린 유연한 귀맥(貴脈)은 10리를 기복위이(起伏逶迤)하면서 평지를 달린 뒤 태음금성(太陰金星)과 태양금성(太陽金星)의 우미한 두 봉우리를 이어 세우고 서쪽으로 몸을 틀어 생기 충만한 입수맥(入首脈)이 끝나는 아래 지점에 특대명 당의 큰 혈장(穴場)을 마련해 놓았다.
이 용맥의 흐름은 마치 상서로운 용이 네발로 바다를 헤엄쳐 가는 모습의 전형적인 출양룡 (出洋龍)격이다.
혈장은 겸형(鉗形)과 유형(乳形)을 겸한 모양으로 탐방자의 눈에는 왕기 넘치는 기린봉의 주혈장(主穴場)이 확연히 감지되지만 도굴 방지를 위해 봉분까지 설치하지 않았다는 천기 (天機)를 굳이 밝혀 소명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어떻든 현재 봉분을 만들어 놓은 곳은 진혈장(眞穴場)이 아니라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이 특대명당의 주변 산세를 살펴보면 단엄(端嚴)한 주산(主山)인 기린봉은 남남동쪽(巽方)에 탁립하였고 혈뇌(穴腦)에서 뻗어 내린 좌우 두 가닥의 날개와 내용ㆍ호(內龍ㆍ虎)는 혈장을 아름답게 감쌌으며 안산(案山)은 미인의 눈썹 같은 아미사(娥眉砂) 모양으로 단아하다.
그 바깥쪽은 서산과 천마산이 긴밀히 회포(回抱)해 내응하고 있고 그 너머로는 홍산, 모악 산, 경각산, 고덕산, 묵방산, 종남산, 봉실산, 용화산, 미륵산 등 각기 특색을 가진 명산들이 넓게 포진하여 이 귀한 혈장을 겹겹이 호위하고 있는 형상이다.
조경단을 기준할 때 가까이 있는 낮은 산부터 차례로 층을 이루면서 백리 밖까지 기라성 같이 중첩해 늘어서서 백화(百花)가 만발한 모습으로 만화방창(萬和方暢)하여 조물주의 신 공(神功)에 저절로 깊은 찬사를 드리게 한다.
일부 풍수지리 학자들은 이런 대 길지의 모습을 보고 조선왕조를 탄생케 한 군왕지지(君王 之地)로 평가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로는 전주 이씨들을 대성케 한 만대영화지지(萬代榮華之地)인 것만은 확실하지만 주산(主山)과 혈장(穴場), 사격(砂格)등을 검토할 때 왕조를 낼 자리는 아니라고 평가한다.
어떻든 이 같은 대 길지에 시조를 안장한 덕으로 조선왕조를 구축할 기반을 굳건히 한 것 은 틀림이 없고 전주 이씨들이 대창 하게 하였으니 그 후손들은 큰 복을 탔다고 평가한다.<아시아투데이에서 퍼온 글> 서광석 논설위원(아시아투데이) '풍수이야기 > 풍수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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