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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朝鮮王朝를 이끌어 낸 明堂들(2)
    풍수이야기/풍수이야기 2011. 2. 18. 11:23

    朝鮮王朝를 이끌어 낸 明堂들(2)
    백우금관(百牛金棺)의 전설 얽힌 준경묘(濬慶墓)

    어떤 사연에서인지는 모르나 이태조의 5대조인 이양무때에는 그들의 연원지인 전주에서 살고 있었고 그의 아들인 이안사(李安社)가 전주부(全州府)에서 관직을 맡았었는데 산성별감 환영연회에서 안사의 사랑을 받던 애기(愛妓)라는 관기(官妓)를 놓고 산성별감과 이안사 간에 큰 시비가 벌어졌으며 지주사(知州事)는 이 일을 계기로 이양무를 크

    게 처벌하려하자 그는 부친 이양무와
    가족들을 이끌고 강원도 삼척 땅으로 피난해 미로면 활기리에 정착해 살게 됐다한다.
    세종조때 간행된 용비어천가에 따르면 이안사의 위세는 상당했던 모양으로 피난 시 그를 따라 삼척으로 이주해 온 주민이 170여 호에 달했다고 한다.
    이양무의 묘(濬慶墓) 조성과 관련된 설화가 다음과 같이 전래돼 오고 있다.

     


    피난 생활의 간고 중에 이양무가 별세했으나 마땅한 매장처가 없어 고민하던 이안사가 여러 곳을 물색하며 답사하던 중 지쳐 현재 준경묘를 조성한 자리에 누워 잠시 잠이 들었을 때 꿈결에 들리는 말에 “허허! 대지(大地)로다! 이곳에 묘를 쓰면 5대 후에 왕이 나겠구나.” 하는 소리가 들려 깜짝 놀라 깨어 주변을 살펴보니 낯선 도승(道僧)과 동자가 지나가며 한 말임을 알게 되었다.

    삼척시 준경묘(일명활기릉)도형


    쫓아가 도승에게 간곡히 부탁하니 그가 누워 잠잤던 곳이 큰 길지(吉地)임을 알려 주면서 이 땅은 원체 큰 명당이기 때문에 장사 시에 꼭 지켜야 할 몇 가지 조건이 있다고 말했다.
    개토제(開土祭)때 백 마리의 소를 잡아 제사 지내야하고 관은 금관(金棺)을 써야하며 술 백 동이를 준비하여 잔치를 벌이라 당부하고 오늘밤 이 자리에 계란 1개를 묻고 지켜보면 크게 깨우치는 바가 있을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표연히 사라졌다는 것이다.
    도승이 당부한대로 그 묘 자리에 계란을 묻고 기다려 자정(子正)이 넘으니 난데없이 수탉이 나타나 홰를 치며 크게 울어 심산유곡을 흔들어 놓으니 큰 명당임을 알게 됐다는 얘기이다.

    삼척시에 있는 준경묘(특대 음택 명당에 안장됐다)


    위와 같은 경로로 부친의 묘를 쓸 길지(吉地)는 얻었으나 당시 그의 형편으로는 소 백마리와 금관을 준비할 길이 없어 큰 고민에 빠져 있던 중 자기처가에 흰소(白牛)가 있는 것을 생각해내 이를 얻어 대용키로 하고 금관은 귀리 짚을 엮어 사용키로 하였으며 술 백동이를 준비하여 같이 이주해온 170여 호의 근속들과 함께 서기 1231년에 장례를 맞추었는데 도승의 예언대로 5대 손인 이성계가 162년 후에 조선조 태조로 등극했다는 설화이다.
    그 후 옛날 전주 지주사(知州事)로 있던 이가 다시 강원도 안렴사(道伯)로 부임하니 이안사는 그를 피해 일족을 이끌고 함경도 땅으로 다시 피난하니 준경묘는 실전 되다시피 됐다가 조선조 개창 후 다시 찾았다하며 정철(鄭澈)이 관동 관찰사(關東觀察使)로 있을 때 이 곳의 도면을 그려 올리고 묘의 수축을 건의한 바 있으며 그 후 허목(許穆)이 삼척부사(三陟府使)로 있을 때 주지서문(州誌序文)에 상세한 묘소 기록을 해 놓았다한다.

    준경묘 비각


    이양무 사 후 얼마 되지 않아 그의 부인이 이어 사망하니 긴 장마 때에 이안사 집에서 장기간 머물면서 환대를 받은 바 있는 노승(老僧)의 인도로 활기리 이웃동리인 동산리(東山里)에 그녀의 묘(永慶墓)를 조성했는데 이 자리도 준 특대명당자리이니 한 왕조를 이룩할 때에는 하늘이 여러 기(基)의 명당을 내려 주는 것 같다.
    준경묘에 대한 풍수적 검증을 설시해 보겠다.
    조선왕조의 근원이 됐다고 보여 지는 준경묘(濬慶墓: 일명 活耆陵)는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에 자리해 있다.
    백두대간(白頭大幹)이 대관령을 지나 남하하면서 석병산(石屛山)과 자병산(紫屛山)을 거쳐 청옥산(靑玉山)으로 이어진 뒤 동쪽으로 뚝 떨어져 장엄한 두타산(頭陀山:1.350m)을 돈립시키고 다시 남행(南行)하여 덕항산(德項山)으로 흘러가는 중간지점에 장토성체(長土星體)인 1.059고지에서 동락 후 위이기복(逶迆起伏)하고 한껏 기를 모아 마련된 큰 혈장(穴場)이 있는데 이 곳에 준경묘를 바르게 조성했다.

    준경묘 청룡


    주봉(主峰)은 삼태(三台)형상이며 혈장(穴場)은 천심맥(穿心脈)끝에 맺어졌는데 이 귀맥진처(貴脈盡處)의 와(窩)처에 바람 한점 들어올 수 없는 완벽한 장풍혈(藏風穴)로 맺어져 수명의 왕을 출현시킨 큰 특대명당이다.
    혈장에서 보이지는 않지만 두타산은 북북서쪽(亥方)에 충천하듯 장려(壯麗)한 자태로 우뚝 서서 위용을 자랑하고 있고 내청룡인 간봉(艮峰)과 내백호인 손봉(巽峰)은 하늘을 가리우듯 드높고 수려하게 서있으며 안산(案山)은 이 거대한 용ㆍ호산(龍ㆍ虎山)들로 가리워져 보이지 않는다.
    내당(內堂)은 그림과 같이 완벽하게 감싸 큰 기를 취적(聚積)시켰고 내당수는 구비치며 흘러가 오른쪽에서 유입되는 오십천과 만나 북진한 뒤 삼척시에서 동해로 유입된다.
    외국(外局)은 두타산과 덕항산에서 뻗어 내린 여러 산줄기가 중중회포(重重回抱)했고 덕항산은 남남서쪽(丁方), 두리봉(頭理峰)은 남남동쪽(巽方), 삿갓봉은 동동남쪽(乙方), 근산(近山)은 동동북쪽(艮方)에 도열하여 넓게 외호(外護)하니 정말 장관이다.

    준경묘 백호


    또한 외당에서 합수 된 오십천은 많은 골짝을 이루어 좁은 수구(水口)를 만들면서 흘러가 진기(眞氣) 누설을 막아주고 있으니 과연 큰 명당다운 작국(作局)이다.
    이 묘자리의 형상을 놓고 맹호출림형(猛虎出林形)이라고도 하고 혹자는 선인취회형(仙人聚會形)이라고도 하나 필자가 보기에는 엎드린 호랑이 (伏虎)가 두 앞발을 번쩍 쳐들고 뛰어오르고자 하는 모습의 맹호거족형(猛虎擧足形)같다.
    어떻든 이 묘 덕에 조선왕조가 개창되었을 것이니 전주이씨들의 홍복이라 생각되며 이 묘의 후룡(後龍)중에 일개왕조(王朝)를 이룰만한 이 묘보다 월등히 더 큰 명당이 숨어 있으나 근래에야 기운(起運)되었는데 준경묘를 점지해준 도승이 그 사실도 알았는지……,

    <서광석 논설위원 cca4491@yahoo.co.kr cca4491@yahoo.co.kr>

     

    <아시아투데이에서 퍼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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