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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朝鮮王朝를 이끌어 낸 明堂들(3)
    풍수이야기/풍수이야기 2011. 2. 18. 11:25

     

    朝鮮王朝를 이끌어 낸 明堂들(3)
    천하대음택명당 자리에 조성된 함흥의 덕릉(德陵)

    필자가 그간 서술한 명당들은 모두 현지답사 후 쓴 글들이다.
    그러나 조선왕조 500년을 있게 한 명당들을 서술하는 마당에 그 대종(大宗)을 이루었다고 사료되는 덕릉(德陵)을 빼놓을 수가 없고 이 덕릉은 찾아가 확인 할 수 없는 북한 함흥 근처에 자리해 있어 난감한 입장이 돼 글 쓰는 일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필자가 그동안 오랜 세월동안 애써 닦아온 독도법(讀圖法)을 통해 서술하기로 작심하였는데 얼핏 모험과 같이 생각될 수 있으나 지도는 항공사진을 축소 재현한 것으로 이를 참고할 때 실제 방문하는 것과 같은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으며 그간의 경험에 따르면 명당이 자리한 지점과 크기, 용운(用運)의 도래 여부 등에서 착오를 일으킨 일이 거의 없었으니 이점 먼저 독자들의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우리 남한의 경우처럼 상세한 1 : 5.000 지도가 없어 유감스럽지만 아쉬운 대로 1 : 50.000 북한 지도를 참고하면 함흥 북쪽 오로리(五老里)편 능리에 덕릉이 소재하는 것으로 표기가 돼있다.
    이 덕릉에 대한 기술인 동북면제능영사지기(東北面諸陵塋四至記)를 보면 이태조 부친인 이자춘의 릉은 함주(咸州) 동을산 둔덕, 태조조부인 이춘(度祖)의 릉(義陵)은 함주 동쪽 14리, 증조부(翼祖)의 릉(智陵)은 안변 서쪽 38리 서곡현, 고조부인 이안사(穆祖)의 릉(德陵)은 함주 서북쪽 60리에 있다고 기술돼 있다.
    또한 월사 이정귀(李廷龜)가 세운 추존4대조신도비(追尊四代祖神道碑)를 보면 태종 때인 서기 1410년에 경흥성남(慶興城南)에 있었던 이안사묘를 현재의 위치인 함주 북쪽 능리로 천장(遷葬)했다는 기록이 보이고 왕흥지지(王興之地)라 하였으며 증보문헌 비고에서도 이 덕릉을 왕이 배출될 자리로 서술하고 있다.
    목조대왕고실(穆祖大王故實)에 의하면 원래 이안사는 출중한 인물로 위에서 서술한 바와같이 강원도 삼척 땅에서 함경도 덕원부 용주리(德源府 龍珠里)로 피난 이거(移居)해와 원(元)나라에 귀화한 뒤 5천호를 다스리는 지방장관(達魯花赤) 벼슬을 지냈으며 이후 이태조 부친인 이자춘 때까지 4대동안 원나라 벼슬을 하다가 자춘이 큰 공을 세우고 고려 국에 귀환하였으니 이 4대 동안에 조선왕조의 기틀이 굳건히 닦여졌다고 말한다.

    북한 함흥 북쪽에 위치한 덕릉일대 지도


    지도를 참고하면 덕릉은 백두산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산가지 하나가 위 오로리 북쪽 대바우산(992m)에서 동쪽으로 토성개병장(土星開屛障)하고 그 중심에서 다시 동남쪽으로 기복(起伏)하며 흘러온 산가지가 다시 토성횡장(土星橫障)한 뒤 남남서쪽(丁方)으로 떨어진 천심맥(穿心脈)끝 언덕에 위치해 있다.
    내청룡은 능거리 쪽으로 짧고 빈약하게 뻗어 내렸고 외청룡은 주산(主山)에서 동남쪽으로 길게 내려온 이향사(離鄕砂)로 되었다.
    내백호는 대바우산에서 남쪽으로 길게 직락(直落)한 산가지가 덕릉 앞에 와서 힘차게 휘돌아 이룩됐으며 그 중 한가지는 외수구(外水口)까지 장회(長回)하고 마감했다.
    또한 외백호는 제법 큰 산맥이 길고 힘차게 여러 겹을 중중회포(重重回抱)한 뒤 드높은 외수구산(外水口山)을 세우고 끝을 맺는다.
    내당수(內堂水)는 우선(右旋)한 뒤 능리에서 성천강과 합류 후 남진(南進)하여 동해로 유입되니 제반조건을 구비한 큰 명당임이 적실하다.
    특히 소조산(少祖山)인 대바우산은 북북서쪽(亥方)에 장려하게 펼쳐서있고 북북동쪽(癸方), 서서북쪽(辛方), 서쪽(兌方), 서서남쪽(坤方)에는 웅장한 산봉우리들이 포진하였으며 안산(案山)은 백호가닥이 돌아 이루어졌고 조산(朝山) 역시 외백호에서 떨어진 큰 산자락으로 이룩됐다.
    총평하면 중중토성개장(重重土星開障)한 중심맥 끝 대간룡결작(大幹龍結作)이니 산세(山勢)는장원하며 동북쪽에서 성천강이 흘러내리니 수세(水勢)또한 길하여 20대 내외의 왕들이 배출할 천하대명당(天下大明堂)임이 확실하다고 본다.
    다만 조선조 500년의 주궁(主宮)이었던 경복궁과 창덕궁처럼 덕릉도 청룡세는 빈약하고 백호세는 태강(太强)하여 장손승계(長孫承繼)가 어렵고 지손대창(支孫大昌)할 자리이며, 청룡쪽의 이향사(離鄕砂) 때문에 타향에 나가 대성할 자리로 판단되니 조선왕조의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하겠다.

     

    <서광석 논설위원>

     

    <아시아투데이에서 퍼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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