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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탈해왕릉
    풍수이야기/풍수이야기 2011. 2. 18. 11:40
     
    설화속의 인물 탈해왕

    신라국의 제 4대왕인 석탈해(昔脫解)는 이적(異蹟)이 많았던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그의 탄생과 내도(來到)와 관련된 설화가 삼국유사에 상세히 기록돼 있으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가락국(駕洛國)바다 가운데 한 배가 정박해 수로왕(首露王)이 백성들과 함께 나아가 맞아 머무르게 하려하자 날듯이 달아나 계림동쪽아래의 서지촌 아진포(西知村 阿珍浦)에 이르렀다.

    탈해왕을 향사하는 사당


    아진포 포구에 살던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는 노파가 들으니 바다가운데에서 까치들이 모여 울어대 이상히 여기고 배를 저어 나아가 찾아보니 한 배가 바다위에 떠있는데 그 배에 까치들이 모여 있고 배안에는 20자 길이에 13자폭의 큰 궤가 실려 있었는데 궤안에는 한동자와 시종들이 들어있었다.
    노파가 7일 동안 정성껏 음식을 대접하니 7일째 되는 날 동자가 비로소 말하기를 “나는 본래 용성국(龍城國)사람으로 부왕인 함달파(含達婆)가 적녀국왕(積女國王)의 딸을 맞아 왕비 로 삼았는데 오랫동안 아들이 없어 간절히 빌어 임신해 7년 후에 한 개의 알을 낳았는데 왕이 군신들을 모아놓고 사람이 알을 낳은 일은 고금에 없으니 길상이 아닐 것이라며 궤를 만 들어 자기를 넣고 칠보와 노비를 실은 뒤 띄워 보내면서 축원하기를 인연 있는 곳에 닿아 나라를 세우고 집안을 이루거라 하자 문득 붉은 용이 나타나서 배를 호위하여 이곳에 이르게 됐다”고 밝혔다.
    그 뒤 동자는 두 노비를 데리고 토함산(吐含山)에 올라 석총(石塚)을 만들고 7일 동안 머물면서 경주성안을 살펴보았는데 초승달처럼 생긴 낮은 산봉우리가 있는 땅이 좋은 길지임을 알고 내려와 알아보니 호공(瓠公)의 집이었다.
    이 집터를 송사(訟事)에 이겨 탈해가 차지하여 살게 됐다는 일화는 경주 반월성 편에서 기히 서술한 바 있기에 재론은 생략한다.
    당시 신라 2대왕인 남해(南解)가 이 소문을 듣고 탈해가 지혜로운 사람임을 짐작하고 장공주(長公主)로 아내를 삼게 해 부마가 되었다.
    하루는 탈해가 동악(東岳)에 올랐다 돌아오는 길에 종자인 백의(白衣)에게 마실 물을 떠오 게 했는데 백의가 먼저 그 물을 마시니 각배(角盃)가 입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커늘 탈해 가 꾸짖으니 백의가 앞으로는 결코 먼저 맛보지 않겠다고 맹세하니 비로소 각배가 입에서 떨어졌다하는데 그때 물을 떠온 우물이 요내정(遙乃井)이라 한다.
    또한 탈해를 석씨로 호칭하게 된 것은 까치로 인연해 궤를 열었으므로 까치작(鵲)자에서 조(鳥)자를 버리고 석(昔)으로 성을 삼았기 때문이며 유리왕(儒理王)의 뒤를 이어 62세 되던 해에 신라국 제4대왕에 오른 뒤 23년간 다스리다가 사망했다는 내용들이다.
    위 전설에서 초승달 같다는 터가 경주시 교동에 있는 반월성 터로서 이 성(城)은 제5대 파 사왕(破娑王)때에 축조했다.
    탈해왕은 등극 후 자기가 살던 반월성을 정궁(正宮)터로 삼았다하는데 근래의 발굴고증으로 사실임이 소명되고 있다한다.

    큰 묘자리 명당에 바르게 조성한 탈해왕릉

    탈해왕릉에 대한 풍수고증을 설시하겠다.
    탈해왕릉은 토함산 서북맥 진처(盡處)의 편평한 땅에 자리해 있는데 높이4.5m 길이 14.3m 규모의 아담한 봉토분(封土墳)으로 특별한 장식물은 설치돼 있지 않다.
    이 능은 사적 제174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능역 앞에는 쓰러졌던 소나무 한그루가 강한 생명력을 과시하듯 다시 살아나 옆으로 퍼져 괴기한 모습을 하고 있어 찾는 이의 눈길을 끌고 있다.

    경주시 탈해왕릉도형


    또한 이능의 남쪽에는 탈해왕을 향사하는 전각인 숭신전(崇信殿)이 있는데 본래 반월성에 있던 것을 1981년에 이곳으로 이전했다.
    탈해왕릉의 위치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각기 다른 기술을 하고 있으나 삼국사기의 성북양정(城北壤井)언덕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이 현 위치와 맞아 떨어져 사실로 인정되고 있다.

    경주시의 석탈해 왕릉


    탈해왕릉의 지세를 개관하면 낙동정맥(洛東正脈)의 큰 한가닥이 치술령에서 대단과협(大斷 過峽)하고 동진(東進)한 후 다시 북진(北進), 토함산(吐含山)을 탁립(卓立)시킨 뒤 북쪽으로 흐르다가 서진(西進)한 귀맥(貴脈)은 수차의 개병장 과협(開屛障 過峽)후 소금강산(小金剛 山)을 일으켜 세울 때 한 가지가 홀연 남쪽으로 떨어져 아담한 주봉인 동산을 돈립시킨 뒤 큰 기가 멎는 평지에 탈해왕릉이 조성돼 있다. 후룡(後龍)은 굴곡기복(屈曲起伏)하여 생기 충만한 모습이고 주봉에서 능까지의 입수맥(入首脈)에는 드문드문 바위를 세워 놓아 간기(幹氣)가 머물렀음을 증명하고 있고 혈장(穴場)은 넓고 왕기충일(旺氣充溢)하니 우선대룡(右旋大龍)의 맥진처(脈盡處)답다.
    수세(水勢)를 살피면 보문호 쪽에서 흘러드는 북천(北川)과 토함산에서 출원한 남천(南川)은 경주시가지를 크게 좌선(左旋)한 후 치술령쪽에서 발원한 조수(朝水)인 형산강 본류와 합류한 뒤 소금강산 뒤쪽을 휘돌아 포항의 영일만으로 사라지니 우선룡 좌선수의 전형이라 할만하다.
    내용·호(內龍?虎)는 단회(短回)하여 취기(聚氣)하였는데 특히 내백호는 박 바위가 야무지게 매듭지어 상서롭다.
    외청룡은 3중으로 장회(長回)하였고 외백호는 신라중학교 뒷동산이 낮게 회포해 마감했다.
    이 능의 팔방은 탈살 탈진(脫殺 脫盡)한 여러 산들이 순치되고 아름다운자태로 포진하여 화려강산을 이루어 만화방창(萬化方暢)한 모습이다.
    탈해왕릉의 남쪽 들판에는 낭산과 반월성이 금상·옥인(金箱·玉印)모습으로 점점이 늘어서 있고 멀리 벽도산(碧桃山) 줄기에서 뻗어 내린 달덩이 같은 망산(望山)은 안산(案山)이 됐다.

    탈해왕릉 입수처(入首處) -튼튼한 바위로 되어 있다


    태조산인 토함산은 동동남쪽(乙方)에서 암공(暗供)하였고 불꽃이 타오르는 모습의 남산은 정남쪽(午方)을 굳건히 지키고 있으며 형제봉은 동쪽(卯方), 옥녀봉은 서쪽(兌方), 둥근 선도산은 서서남쪽(申方)에 늘어서 있고 주산(主山)인 소금강산은 북북서쪽(亥方)에 수성체로 생기 충만하게 서있으니 정말 훌륭한 산세이다.
    이같이 큰 명당자리에 바르게 탈해왕의 능묘를 조성했으니 그 후손들의 번영은 당연한 일로 필자는 이 때문에 탈해왕의 후손 중에 여러 명의 왕이 배출됐다고 사료한다.
    삼국유사와 기타 기록들을 고증해 보면 탈해왕은 크게 지혜로운 인물로 특히 지리(地理)에 밝았다고 전해온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중국의 풍수지리학이 전래되지 않았을 것임에도 반월성의 천하대양기명당(天下大陽基明堂)터에 자신의 집을 마련해 신라국 주궁(主宮)터가 되게 했으며 그의 묘지도 생전에 특대음택명당자리에 미리 잡아놓았다고 추정된다.
    뿐만 아니라 신라국 시조임금인 박혁거세(朴赫居世)의 탄생지로 알려진 경주시 탑동의 나정(蘿井)터는 준특대양기명당(準特大陽基明堂)자리로서 이곳에 사당을 짓고 사계절 제사를 지내왔다 하는데 그 자리에 세웠던 8각정 건물 터가 근래에 발굴돼 학계를 놀라게 했으며 그의 능으로 전래되는 오릉(五陵)중 중앙의 능묘가 좋은 명당 터에 바르게 조성된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비슷한 시대로 추정되는 가락국의 김수로왕릉도 좋은 길지에 자리해 있고 직접 가서 확인해보지는 못했으나 지도와 사진을 참고할 때 북한 땅에 있는 고구려 시조인 동명성왕릉(東 明聖王陵)도 좋은 명당자리에 바르게 조성됐다고 사료되니 2000년 전에도 우리나라 상류층에서는 자생풍수(自生風水)기법이 활용됐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출처:아시아투데이 서광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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