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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朝鮮王朝를 이끌어 낸 明堂들(4)
    풍수이야기/풍수이야기 2011. 2. 18. 11:29

     

    朝鮮王朝를 이끌어 낸 明堂들(4)
    조선왕조 2代를 더 잇게한 남연군묘(南延君墓)

    세도가 김좌근에게 옥(玉)벼루 바치고 이장
    해질녘의 황혼(黃昏)은 해뜰때의 동천홍(東天紅) 못지않게 화려한 장관을 이루게 마련이다.
    조선왕조가 막을 내리려할 즈음 열화와 같은 투지로 통쾌한 개혁을 단행해 국내ㆍ외에 걸출한 면모를 크게 들어 내보인 흥선대원군 이하응(興宣大院君 李昰應 : 1820~1898)은 정치 못지않게 행적(行蹟)면에서도 많은 일화를 남긴 인물이다.

    남연군묘 안내표지판


    일찍 조실부모한 이하응의 소년시절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던 것 같으나 비상한 두뇌의 소유자이면서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불굴의 의지력을 발휘한 정략가로도 정평이 나있다.
    그는 영조(英朝)의 현손인 남연군 이구(南延君 李球)의 아들로 태어나 추사 김정희(金正喜)로부터 서예와 문인화를 사사(師事)했으며 특히 노근란(露根蘭)그림에 일가를 이루었다는 평판을 받았다.
    당시는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세도가 등등해 종친들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던 시기로 흥선군은 살아남기 위해 시정잡배(市井雜輩)들과 어울려 다니며 파락호(破落戶)행세를 하면서 기회를 기다렸다.
    일찍이 풍수지리학에도 큰 관심을 갖고 연구해 이 방면에서도 조예가 남달랐던 그는 대권(大權)에 대한 야망을 이루기 위해 자기 부친을 대길지(大吉地)에 이장(移葬)한다.
    평소 친분이 있던 지사(地師)인 정만인(鄭萬仁)으로부터 충남 예산군 상가리 가야산(伽倻山)기슭에 큰 명당이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확인한 뒤 이장을 결심하게 된다.
    그러나 이 묘자리는 당시 충청도의 큰절인 가야사 금당뒤 땅으로 고려 말 나옹대사(懶翁大師)가 세운 5층 석탑이 있어 사실상 이장이 불가능한 자리였다.
    전설에 의하면 흥선군은 가산을 정리한 돈으로 이 절의 주지를 매수하는 한편 평소 친밀한 교우관계가 있던 대제학 김병학(金炳學)을 찾아가 청나라 진품(珍品)인 옥벼루를 빌려 당시의 세도 주역이었던 영의정 김좌근(金左根)에 바치고 이장(移葬)에 제반 편의를 봐주라는 충청감사(忠淸監事)에게 보내는 청편지를 받아 전달했다한다.
    그 뒤 가야사 주지가 절에 불을 질러 소진시키게 한 후 석탑을 헐어내고 1845년 4월에 연천에 있던 남연군묘를 이곳으로 이장한다.

    남연군묘와 후면산세


    김병학은 족숙(族叔)인 김좌근 집에서 자기가 소지하고 있던 것과 똑같은 옥벼루를 발견하게 되는데 김좌근이 자랑삼아 흥선군으로부터 선물 받았다는 설명을 듣고 벼루 돌려받기를 단념했다한다.
    김병학은 후일 흥선대원군 집권 후 이 벼루 덕을 톡톡히 보게 되는데 안동김씨 일문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 와중에서도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라 큰 영화를 누리게 된다.
    상가리의 남연군묘는 1868년 4월에 있었던 오페르트 도굴사건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는데 위 오페르트는 두 차례에 걸친 우리나라와의 통상교섭이 실패하자 우리나라 천주교도인 최 일선의 제의를 받아들여 독일, 프랑스인들과 합작하여 도굴을 시도했으나 원체 묘역이 견고하게 조성돼 실패로 끝난 사건이다.
    당초 남연군묘를 조성할 때 도굴의 위험이 있다는 정만인의 의견이 있어 생석회 300포를 흙에 섞어 조성해 조난을 면했다하며 이 도굴사건 이후 천주교도들에 대한 대원군의 대대적인 숙청이 이어졌음은 물론 그의 쇄국정책에 크게 일조(一助)한 큰 사건으로 기록되게 됐다.

    남연군묘 비석


    흥선대원군은 고종즉위 후 가야사와 5층 석탑을 헐어내고 자기 부친을 이장한 은혜를 잊지 않고 상가리에 보덕사(報德寺)를 새로이 건립했다고 전해온다.
    어떻든 위 남연군묘를 이장한 7년 뒤에 이재황(李載晃 : 뒷날의 高宗)이 출생했으며 재황은 1863년 12월에 후사 없이 승하한 철종(哲宗)의 뒤를 이어 조선왕조 제26대 왕으로 등극하고 흥선대원군이 된 이하응은 왕의 섭정으로 대권을 거머쥐고 또 다른 형태의 세도정치를 펴나가게 된다.

    준특대음택명당(準特大陰宅明堂)에 바르게 조성된 남연군묘

    남연군묘소의 소조산(少祖山)인 가야산(伽倻山)부터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
    속리산 천황봉(俗離山 天皇峰)에서 발맥(發脈)한 금북정맥(錦北正脈 : 車嶺山脈)은 충북 진천과 충남의 천안, 공주를 거쳐 청양의 백월산(白月山)에서 전신(轉身)북진한 후 오서산(烏棲山)을 탁립(卓立)시키고 평지로 수 십리를 달려 바람에 휘날리는 깃발모양의 파군대성(破軍大星)인 가야산(伽倻山)을 준립(峻立)시킨다.
    이 가야산은 가야봉(伽倻峰), 석문봉(石門峰), 옥양봉(玉洋峰)등의 세 봉우리로 이룩돼 있는데 파군삼태(破軍三台)의 아주 귀한 모습을 한 명산으로 이 산줄기에서 북진하여 흘러간 좌보성(左輔星)맥 끝에는 지구상에서 가장 큰 음택자미원국(陰宅紫微垣局)명당이 맺어져 있다.

    충남 가야산 남연군묘 도형


    이 까닭에 예로부터 중국의 고명한 수많은 풍수지리학자들이 이 자리를 찾기 위해 내방했다고 전래돼 오고 있으나 지금까지 혈처(穴處)는 오리무중인데 풍수지리학에 정통하지 않고 이 명혈(明穴)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필자의 견해로는 위 자미원국 외에도 이 가야산 서쪽 석문봉 기슭에는 수 십대 황제(皇帝)를 출현시킬 대원국길지(大垣局吉地)가 또 맺어졌다고 본다.
    이같이 큰 많은 명당을 맺게 한 가야산은 이 지상의 많은 명산 가운데에서도 최고의 명산으로 평가함이 마땅하다고 보지만 이 가야산과 그 줄기에 맺어진 길지들에 대한 기술은 후일을 기약하기로 한다.
    상가리의 남연군묘는 이 가야산 중심봉인 석문봉에서 동쪽으로 떨어진 산가지 끝에 자리해 있는데 위 묘에서 바라다보면 주봉인 석문봉과 천을ㆍ태을봉(天乙ㆍ太乙峰)인 가야봉, 옥양봉이 횡으로 늘어서서 귀한 병장(屛障)을 했다.
    이 묘 터의 내맥(來脈)은 생기 충만하게 좌우로 달리면서 기복(起伏)하였으며 동쪽으로 흐르다가 동남쪽으로 머리를 돌려 입수(入首)한 뒤 밝고 넓직한 혈장(穴場)을 마련했는데 묘 우측 앞에는 바위로 된 귀한 옥인사(玉印砂)까지 마련해 놓았다.
    혈장 좌우의 청룡(靑龍)과 백호(白虎)는 마치 옥대(玉帶)와 같은 모습으로 중첩 회포하여 길기를 취적(聚積)시켰고 동ㆍ북ㆍ남쪽에는 귀인 모양의 산(貴人砂)들이 줄줄이 늘어섰으며 안산(案山)은 금상자(金箱)같고 선인(仙人)모양의 조산(朝山)인 봉수산(鳳首山)은 장중하며 옥련(玉輦)은 북쪽에 드높이 서 있으니 전래돼 온대로 상제봉조(上帝奉朝)형 명당이 적실하다.
    또한 내당(內堂)의 여러 냇물들은 안산 앞에 모여 호수를 이루었으니 더욱 가상하다.
    이러한 좋은 조건을 두루 갖추었으니 2대 군왕이 나올 만한 준특대명당(準特大明堂)이 확실하다.

    남연군묘 청룡쪽


    정만인은 이 곳을 2대 천자(天子)가 날 자리라하였다는데 조선조 말 청나라로부터의 예속에서 벗어나게 한다하여 고종과 순종을 황제로 호칭한바 있으나 이는 모두 외세(外勢)에 의한 표방일 뿐 실제는 황제다운 황제였다 할 수 없고 이 명당에 취적된 기(氣)의 양대로 두 사람의 군왕을 냈을 뿐이라 사료한다.
    그러나 이 남연군묘 덕에 조선왕조가 두 사람의 군왕을 더 내게 됐으니 전주이씨들의 복록을 더 잇게 한 큰 길지인 것만은 확실하다.
    이 묘 터의 흠결로 지적되는 것은 주변 산들이 지나치게 높고 혈장은 낮아 균형이 잘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신하가 주인을 압도하는 형세이고 가야산의 주맥이 아닌 곁가지에 매달린 명당으로 큰 기를 함축시키지 못한 연고로 좋은 운세도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고 판단한다.

    남연군묘 백호쪽 (옥인석이 있다.)


    부연하면 이 남연군묘의 내룡지상(來龍之上)에 또 하나의 준특대명당이 있어 활용될 날을 기다리고 있지만 기술한 바와 같이 가야산의 큰 기운은 동측이 아닌 서측에 집적돼 있어 남연군묘보다 월등히 큰 황제지지(皇帝之地)가 석문봉 서록에 맺어졌음을 밝혀둔다.

     <서광석 논설위원>

     

    <아시아투데이에서 퍼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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