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또 많이 자주 지나치면서도 가보지 못하는
왕릉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은 요즘 한창 인기있는 드라마 "여인천하"에 등장하는 중종과
문정왕후에 대해 소개할까 합니다.
참고로 이 글은 인터넷에 나와있는 조선왕릉에 대한 글과 조선왕조실록에
나와있는 글을 모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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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릉(宣靖陵)
선정릉은 무역센터 옆 선릉역 있는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조선 제 9대 왕 성종대왕과 제 11대 중종대왕을 모신 곳입니다.
성종은 조선왕조의 기틀을 반석위에 올려놨다고 할 정도로 재위기간중
많은 치적을 쌓았고 이름 그대로 왕조의 틀을 완성시킨 왕입니다.
몇해전에 드라마 "왕과비"에서 잘 나왔지만 성종은 어렵게 왕위에 오릅니다.
세조의 큰아들이 일찍 죽게되자 예종이 뒤를 이어 대통을 이어받습니다.
그런데 예종이 병약하여 1년여 만에 승하하자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은
간난아이였고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은 병약해서 결국 성종이 왕위에
오른 것입니다.
이 과정은 세조의 대비 정희대비와 첫째며느리인 소혜왕후가 전례없이
당일에 왕권을 장자의 둘째아들 자을산군에게 넘긴다는 령을 내려
당일에 취임을 하게 됩니다.
이는 당시 최고 권력자인 한명회등과 정희왕후와의 정권유지차원의
결탁에 의한 것입니다. 즉 자을산군(성종)의 장인이 바로 한명회로서
월산대군을 추대하려는 종친과 신하들의 반대를 원천적으로 방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성종은 많은 치적에도 불구하고 폐비 윤씨사건으로 인해 연산군이라는
폭군을 탄생시켜 끝은 별로 좋지를 못했습니다.
선릉은 찾아가기에 편하고 또한 여러 왕릉에서 관람을 금지시키는
릉원까지 올라갈수 있어 릉원의 구조와 석물들을 자세하게 관람할 수 있
습니다.
성종의 릉은 세조의 명과 다르게 봉분에 병풍석을 둘러 십이지신상을
조각한것이 특이합니다. 한편으로는 도시화가 너무 가까이까지 진행되어
오른쪽으로는 빌딩들에 둘러쌓여있어 고요하고 무게있는 왕릉 본연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어 안타까울 뿐입니다.
정릉(靖陵)은 중종대왕의 릉입니다. (성북구 정릉동에 있는 정릉(貞陵)은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릉입니다)
중종은 성종의 적자로 태어났지만 연산군의 집권과 정권의 소용돌이 속에
서 여러번 죽을 위기를 면하고 중종반정으로 왕이 됩니다.
후에 일어나는 인조반정과의 큰 차이는 중종반정은 신하들이 반정을
성공시키고 왕으로 추대하여 성립된 것이고 인조반정은 인조가
직접 쿠데타를 실행한 것이 다릅니다.
아무튼 중종은 왕이 되면서 부터 여러 사건으로 얼룩지워집니다.
여기서는 3명의 왕비에 대해서만 간단히 소개할까 합니다.
중종의 부원군이였고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이 중종반정 당시 반정군에
비협조로 살해되자 첫째왕비(단경왕후)를 폐위시키게 됩니다.
두번째 왕비인 장경왕후는 왕자(인종)를 낳았지만 산후부작용으로 곧 승
하하고 세번째 왕비인 문정왕후가 등장하여 왕자(명종)을 낳아 나중에 정권을 잡고 흔드는 문정왕후 윤씨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문정왕후에 대해서는 태릉을 소개할때 자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중종은 사후에도 여러가지 정권싸움에 휘말려 왕릉이 천장 당하는
수모를 겪게 됩니다.
중종은 최초 서삼릉(희릉)에 두번째 왕비와 함께 뭍혔으나 문정왕후가
자신이 중종 곁으로 들어가고자 왕릉을 지금의 선정릉으로 옮기게 되지
만 그 자신도 결국에는 중종곁으로 가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왕릉의 조성은 당대 왕의 치적보다는 다음 왕이 누구였나가
더 중요시 됩니다. 다음왕이 적자이거나 무난히 왕권이 이양 된때는
선조 왕릉의 규모나 석물들이 확연히 다르고 어렵게 왕위에 오른
왕들은 선조 왕릉에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은 것이 현실이었던 것 같습
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이지요.
정릉에 가보면 도시화로 왕릉의 웅장함은 이미 사라져 버리고
또한 석물(문인석,무인석)들의 코는 누가 그리 다 베어가 버렸는지
흉물스럽게 변해있습니다.
실패한 조광조의 개혁정치를 보는것 같아 안타까울 뿐 입니다.
참으로 아들을 낳고 싶으면 그 옆에 있는 산부인과에나 그렇게 열심히
다니는게 더 나았을텐데.....
출처 : 불혹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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