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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문화답사(사직단~청와대~칠궁)-2007.01
    답사는 즐거워/지난답사글 2011. 7. 29. 13:13

    2007년도에 다녀온 곳을 참고로 올려봅니다.

     

    사직단(공원)과 청와대, 칠궁을 다녀왔습니다...

     

    사직단은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태조가 한양에

    수도를 정하고 궁궐과 종묘를 지을 때 함게 만들어졌다.

     

    사직단 정문(보물 177호)

     

    종묘와 사직은 종묘사직이란 이름으로 또는 종사란 이름으로 쓰여 왕조를

    대신하여 쓰인다. 사직단은 방형의 담을 쌓고 그 안쪽에 두 개의 방형 제단

    즉 국사단(토지의 신에게 제사)과 국직단(곡식의 신에게 제사)을 나란히

    배치하였다. 제사는 1년에 3회 올렸으나 지금은 매년 9월 첫째 일요일에

    한차례 올린다.

     

    사직단 홍살문

     

    사직단 국사단과 국직단

     

    사직단이나 선농, 선잠단 등은 농업이 주된 산업이었던 당시에 국왕이

    백성과 함께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던 나라의 상징이었다.

    지금의 판단으로 하면 종묘는 정치적이요, 사직은 경제적인 두 축으로

    생각된다.

     

    바깥 담장에서 바라본 홍살문과 사직단

     

    밖에서 바라본 사직단

     

    사직단 위쪽에는 단군성전이 자리잡고 있다. 단군성전에는 정부표준

    단군영정이 모셔져 있고 역대 우리나라 국가 시조들의 위폐가 모셔져

    있다.

     

    단군성전 내외삼문

     

    단군성전...

     

     

    안쪽에 정부표준 단군영정과 단군상이 봉안되어 있다.

     

    황학정(黃鶴亭)은 궁술연습을 하던 사정(활터에 있는 정자)으로 고종 광무

    2년(1898년)에 지어졌으며 원래 경희궁 회상전 북쪽에 있던 것을 1922년

    일제에 의해 경희궁이 헐리면서 이곳 등과정(활터인 오사정의 하나)이 있던

    자리로 옮겨 지었다.

     

    누각은 정면 4칸의 팔작지붕 형태인데 특이하게 동쪽 1칸은 한단 높게

    누마루를 꾸몄다.

     

    황학정 전경...

     

    지금도 국궁을 사랑하시는 분들이 무시로 드나드는 곳이다...

    활을 쏘는 사람은 오장육부가 튼실해야 과녘을 맞출 수 있다고 한다.

    그만큼 정자세와 정상의 심신이 갖춰져야 한다는 말일게다....

     

    습사무언(習射無言)이라...활을 쏘는 중에는 정신통일하여 일절 말을 하질

    않는다는 말일게다... 도를 닦는 기분으로... 언젠가 궁술을 배워보고 싶어

    진다.

     

    배화여고로 향한다...  배화여고는 1898년에 개교를 했다고 하니 역사가

    참으로 오랜 학교다. 고 육영수 여사의 모교로 더 유명해진 학교다..

     

    배화여고 생활관(등록문화재 93호)

     

    경사로를 올라 보니 배화학당 설립자이신 조세핀 필 캠벨 여사상이 보이고

    그 뒤로 생활관의 지붕이 보인다. 서양식 건물에 지붕은 팔작지붕을 한 것이

    당시의 문화적 융화를 이루려는 의도로 보여져 그 깊은 뜻이 전해진다.


    배화여고 별관 뒤로 돌아가니 백사 이항복(선조 때 문신, 오성과 한음으로

    더 유명함)의 집터가 있다. 바위에 필운대(필운대)라고 새겨져 있는데 필운

    (弼雲)은 이항복의 호이다.

     

    바위 중간에 필운대를 소개한 글은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이 쓴 글

    이며 그 오른쪽에는 공사를 했던 사람들의 명단이 있다. 이유원은 당대의

    명필로 유명했는데 그의 필체를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같은 계유년이지만 이유원이 쓴 글은 1873년, 아래 공사명단에 나오는

    계유년은 1813년으로 보고있다...

     

    필운대 전경


     

    배화여고를 나와 선희궁지로 향한다... 출출해진 배를 채울겸해서 조금

    일찍 일행을 떠나 골목을 지나자니 인심 좋게 생기신 할머님이 하시는

    떡볶이집이 있어 아들과 함께 들어가 요기를 하고 일행을 뒤쫒는다.

    다른 사람 모르게 먹다보니 기다려달라고 할 수도 없고... 하마터면

    일행을 놓칠뻔 했다...ㅎㅎ

     

    선희궁지는 조선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지내던 왕실의 사묘인 선희궁이 있던 자리이다.

    현재 영빈의 신주는 육상궁에 모시고 있는데 융희 2년(1908년)에 옮긴

    것이다.

     

    선희궁지 사당... 예전 사진을 보면 학교건물에 바짝 붙어있었는데 지금은

    앞이 훤히 트였다.

     

     

    사당의 옆 모습...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1층 건물로 맞배지붕집이고

    벽은 벽돌로 쌓았다.

     

    오늘의 하이라이트 청와대와 칠궁을 가기위해 경복궁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상쾌하다... 인왕산과 북악산(백악산)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정말 즐거웠다.

     

     

    선희궁터에서 경복궁 주차장(청와대 방문객 집결지)을 가기위해서는
    청와대 정문쪽으로 돌아 경복궁의 영추문(서쪽문)쪽 담을 타고 가야한다.

    청와대 정문 옆의 분수대 앞은 북악산을 보기 가장 좋은 곳이다. 아름다운
    목형산의 북악산이 우측에 험한 바위가 튀어 나온 모습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는 곳이다. 천하제일지지인 곳에 건물이 들어섰지만 퇴임 후의 역대
    대통령들의 말년이 좋지 못한 것이 이 바위 때문이라고들 한다. 

    목형산의 북악산... 그러나 우측 바위가 보기 흉하다...


    분수대 앞쪽으로 신문고가 설치되어 있다. 억울한 백성들의 소리를 귀담아
    듣는다고 하는데 청와대 앞에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백성들이 이 추위에도
    서성이고 있다.


    억울함을 호소하며 이 추위에도 청와대 앞에서 시위하는 민원인...


    경복궁의 서쪽문인 영추문... 東은 春(建春門)이요 西는 秋라...조화로움..


    경복궁을 들어서니 궁금했던 탑이 보인다...
    법천사지에 아름다운 탑비만 덩그마니 남아있던 지광국사의 현묘탑이다.
    6.25 때 파괴되어 무려 만여 조각으로 흩어져 있던 것을 이승만대통령의
    지시로 복원했다는 그 탑이다.
    파란 만장한 운명을 타고 났는지 경복궁에 와서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중앙박물관이 용산으로 갔는데도 같이 가지 못하고 여기 눌러 앉아 있으니
    무생물인 탑에도 타고난 운명이라는 것이 있는가보다...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국보 101호)


    그 옆에 최근에 일본으로부터 반송 받은 정문부 장군의 북관대첩비
    복제비가 서있다. 정문부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함경도 길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병을 격파했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가 북관대첩비였다.
    100년만에 반환 받아 원래의 비는 북한에 인도하고 복제비를 세운 것이다.

    북관대첩비 복제비...


    북관대첩비 이수 부분...


    경복궁을 수시로 드나들면서 서쪽에서 들어오기는 처음인 것 같다. 그만큼
    일상의 틀을 깬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새삼 느낀다.

    인왕산을 가까이에서 보고 사진에 담아보는 것도 처음이고....


    서쪽에서 흥례문 사진을 찍는 것도 처음이다...
    왜 틀을 깨지 못하는 걸까...?


    청와대 방문객들의 집결지인 경복궁 주차장에 도착해서 신분 확인 절차를
    걸쳐 셔틀버스를 타고 춘추관으로 들어섰다.
    이곳은 사진 촬영이 여의치 않아 사진이 별로 없다. DJ시절에 와보고
    참여정부 시절에는 처음인데 예전 그 모습 그대로인데 헬기장에서 보이던
    단경왕후 신씨의 치마바위가 신축 비서실 건물에 가려 보이질 않는다.
    더구나 안개까지 끼어 정확한 위치도 확인이 잘 안되었다.

    청와대 녹지원... 응달에 잔설이 쌓여있다.


    봄이면 아름답게 꽃이 피는 곳인데 겨울이라 녹지원 한가운데 늠름하게
    서있는 반송을 제외하고는 별로 볼게 없다. 마침 영부인 권양숙 여사께서
    관저로 들어가시다 우리를 보고 차창을 열고 손을 흔들어 주신다...

    관저 앞에는 옛날 본관 건물터가 남아 있는데 예전에 그곳에 천하제일명당
    이라는 표석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보이지 않고 대신 관저 암벽에
    새겨져 있다는 천하제일복지라는 글자를 복제해서 새웠다고 안내원이
    말한다. 이 글자는 관저 공사중에 우연히 발견되었다고 한다.

    구 본관을 지나 노무현 대통령이 집무를 보시는 본관으로 향한다. 본관
    현관을 지나 소연병장을 돌아 정문 앞에서 설명도 듣고 사진 촬영도 하는데
    모두들 신이났다. 세상이 엄청 좋아졌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청와대가 아닌가 싶다.

    청와대 본관 앞...



    청와대를 나와 가장 가보고 싶었던 육상궁으로 향한다. 육상궁은 칠궁
    이라고도 한다. 칠궁은 육상궁, 저경궁, 대빈궁, 연호궁, 선희궁, 경우궁,
    덕안궁을 일컫는데 조선왕조 역대 왕들의 생모로서 정비에 오르지 못한
    일곱분 후궁들의 신위를 모셔 제사지내는 곳이다.

    칠궁 외삼문...


    영조가 어머니의 제삿날에 나와서 몸을 깨끗이 하고 정성을 가다듬어
    제사를 준비하던 냉천정이라는 건물이 있으며 뒤쪽에 우물인 냉천이 있고
    앞쪽에는 연못이 있는데 가운데 부분에 자연(紫淵)이라고 각자가 새겨져
    있다.

    냉천정의 우물...


    냉천정 앞의 연못...가운데 약간 하얀 부분에 자연이라는 각자가 있다.


    저경궁(儲慶宮)은 선조의 후궁이며, 죽은 후 왕의 칭호를 받은 원종을 낳은
    인빈 김씨의 신위를 모신 궁이다. 원종은 선조의 다섯째 아들로서 인조가
    왕위에 오른 후 왕의 칭호를 받았다.


    대빈궁(大嬪宮)은 숙종의 후궁으로 경종을 낳은 희빈 장씨의 신위를 모신
    궁이다. 숙종 27년(1701)에 희빈이 사망한 후 신위를 정동에 있는 집에
    모셨다가 경종 2년(1722)에 희빈에게 옥산대부인의 칭호를 내리면서
    사당을 현재의 교동인 경행방에 세웠다. 대빈궁은 고종 7년(1870)에 다시
    돌아갔고, 1908년에 다른 궁들과 함께 다시 육상궁 안으로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경우궁(景祐宮)은 정조의 후궁으로 순조를 낳은 수빈 박씨의 신위를 모신
    궁이다. 수빈은 순조 20년(1820)에 세상을 떠났고, 이듬 해 신주를 창경궁
    안에 모시고 현사궁이라 이름 지었다. 이후 현재의 종로구 계동의 양덕방에
    따로 묘를 세우고 이름을 경우궁으로 지어 신주를 모셨다.

    경우궁과 같은 건물에 선희궁이 있다. 선희궁은 사도세자(추존 장조)를
    낳은 영빈 이씨의 신위를 모신 궁이다. 선희궁지에서 본 바로 그 선희궁이다. 


    덕안궁(德安宮)은 고종의 후궁으로 영왕을 낳은 순헌 귀비 엄씨의 신주를
    모신 궁이다. 광무 원년(1897)에 엄비가 아들을 낳으면서 경운궁 안에
    거처할 궁을 세워 그 궁을 경선궁이라 불렀고, 엄귀비가 세상을 떠나자
    덕안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13년에는 육상궁 안으로 옮겨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연호궁(延祜宮)은 영조의 후궁이며, 효장세자(추존 진종)를 낳은 정빈
    이씨의 신주를 모신 궁이다. 진종은 정빈에게서 태어나 세자로 정해졌지만
    10세에 세상을 떠났다. 정조는 즉위 후, 진종에게 왕의 칭호를 주고 정빈을
    위해 정조 2년(1778)에 경복궁 서북쪽에 사당을 세우게 하고 연호궁이라
    이름 지었다. 연호궁은 고종 7년(1870)에 육상궁 안으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연호궁 건물에 육상궁이 같이 있다.
    육상궁(毓祥宮)은 영조의 생모이며 숙종의 후궁인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영조 원년(1724)에 세워 숙빈묘라 했으나 영조 29년(1753)에
    승격시켜 육상궁이라 고쳐 불렀다. 고종 19년(1882) 화재를 당하여 다음해에
    복구했다. 육상궁은 칠궁이라고도 부르는데 그것은 1908년에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는 7개의 궁들을 이곳에 옮겼기 때문이다.


    칠궁을 답사하는데 주위의 따가운 시선들(청와대 경계초소) 때문에 맘놓고
    사진을 찍지 못해 제대로 된 사진이 없다. 그래도 보고 싶은 칠궁을 봤으니
    오늘 답사는 매우 흡족하다. 인왕산 주위의 서울문화유산 답사를 하면서
    새삼 느낀 것은 세상이 많이 바뀌었으며 역사는 돌고 돈다는 사실과 답사에서
    중요한 것은 역사적 사실과 함께 다가오는 느낌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한많은 후궁들의 사당에서 그 자식 왕들의 마음은 어땠을까를 생각해보고,
    사직단이나 필운대나 선희궁지나...별로 볼 거리조차 미미한 곳에서 무엇을
    느끼는가..?

    북악산 너머로 보이는 하늘이 오늘따라 유난히 파랗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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