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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크랩] 조선왕릉 2 (태강릉)
    답사는 즐거워/지난답사글 2011. 2. 22.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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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강릉(泰康陵)


    이번엔 태강릉을 소개할까 합니다.
    태릉(泰陵)은 중종(中宗)의 제2계비인 문정왕후 윤씨
    (文定王后 尹氏 : 1501-1565)의 릉으로 명종(明宗)의 강릉(康陵)과 함께
    태강릉(泰康陵)으로 불리우면서 주변의 태릉 푸른동산, 태릉선수촌 등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곳입니다.
    재위 1년을 못넘긴 인종(仁宗)을 이어 13대 명종(明宗)이 즉위하면서
    명종의 생모(生母)였던 문정 왕후가 권력을 장악했었기 때문에 사후(死後)의
    능역 조성 역시 웅장하고 화려하게 이루어 졌습니다.
    유난하게 거대한 석인(石人,문인석과 무인석)의 얼굴과 봉분의 병풍석(屛風石)에
    구름 문양과 십이지신상(十二支身像) 등은 당대 권력의 힘을 느끼게 합니다.
    앞서 선정릉에서도 잠깐 언급을 했지만 중종(1488-1544, 재위39년)의 정릉이
    현 위치인 성종(成宗)의 선릉(宣陵)에 인접한 곳에 위치하기 까지는
    많은 우여곡절(迂餘曲折)이 있었습니다.
    또한 왕비(王妃)가 3명이나 되었으면서도 같은 곳에 능이 조성되지 못했는데,
    그것은 세 번째 왕비였던 명종(明宗)의 생모(生母)인 제2 계비(繼妃)
    문정왕후(文定王后) 때문입니다.
    처음 중종 승하 후 제1계비였던 장경왕후(章敬王后) 능인 희릉(禧陵;서삼릉 소재)
    옆에 조성되었으나, 1562년[명종 17년]에 당시 권력을 움직였던 문정왕후에 의해
    현 위치로 옮겨진 것입니다.
    겉으로는 풍수지리(風水地理)를 따라 옮겼다고 했지만, 오히려 지대가 낮아
    자주 침수(沈水)되었기에 결국 중종의 옆에 같이 잠들고 싶었던 문정왕후는
    자신의 능을 다른 곳{태릉}으로 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 중종의 정릉(靖陵)을 잘못 옮김으로 인해 그 다음 해에
    명종(明宗)의 세자인 순회세자(順懷世子)가 서거하고, 2년 뒤에는 문정왕후 자신,
    또 2년 뒤에는 명종(明宗)이 승하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결국 임진왜란 당시에
    왜적(倭賊)에게 도굴까지 당하게 되는 비운의 능이 됩니다.

    한편으로 야사에 의하면 인종도 문정왕후가 준 독약이 든 떡을 먹고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인종은 얼마나 효자였던지 계모인 문정왕후에게 효를 다했으며
    사후에도 능의 이름을 효릉이라고 불리웁니다.

    文定王后 약사(略史) : 문정왕후 윤씨는 1501년(연산군 7년)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윤지임(尹之任)의 딸로 태어나 17세{중종 12년}에 왕비에 책봉되었고,
    중종(中宗)과의 슬하에 명종(明宗)과 네 공주를 두었습니다.
    문정왕후는 일생이 아주 화려해서 자신이 왕비(王妃)에 오른 것도 중종의
    제1계비(繼妃)였던 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 尹氏)가 인종(仁宗) 출산 후
    승하해서 이루어졌고, 아들 명종(明宗) 역시 인종(仁宗)의 요절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천운(天運)이 작용한 것 같다는 속설(俗說) 전해오는데,
    더욱이 12세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명종(明宗)을 대신해 8년간이나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했기에 권력의 정상에 오른 것입니다.
    인종(仁宗)의 외척 세력을 제거했던 을사사화(乙巳士禍;1545년) 이후
    권력의 정상에 군림했던 문정 왕후가 생애의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은
    바로 중종(中宗)의 옆에 묻히지 못한 것입니다.

    한편 문정왕후는 불교(佛敎)에 심취하여 봉은사에 보우(普雨)를 주지(住持)로 두고
    승려인 보우를 병조판서에 임명하는 등 전횡을 하면서 왕실에서의
    불교부흥에 많은 작업을 했지만, 문정왕후 사후(死後) 보우는 제일먼저
    탄핵되어 유배지에서 죽고 불교는 다시 배척당하게 됩니다.
    선릉 답사시에 봉은사에 잠깐 들렀더니 '보우선사 기념비 건립'이라고
    커다란 플랭카드가 걸린걸 보니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明宗(1534-1567, 재위 22년)과 비(妃) 인순왕후 심씨(仁順王后 沈氏; 1532-1575)의
    강릉은 현재 원형보존을 위해 비공개 능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명종의 생모 문정왕후(文定王后;중종의 제2계비)의 태릉(泰陵)과 함께
    능 위치나 의미에 많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 만큼 태릉 입구에라도
    강릉(康陵)에 대한 보다 자세한 안내나 설명이 아쉽습니다.
    사료(史料)에 의하면 선조 4년[1571년]에 강릉(康陵)의 정자각(丁字閣)에
    화재가 나자 임금과 세자가 의복을 갈아입고 풍악(風樂)을 금하며 반찬 수를
    줄이는 등 근신(謹愼)의 예를 다했다고 합니다.

    이를 들여다 보면 선조의 특이한 탄생 배경입니다.
    선조는 중종의 후궁 창빈 안씨의 아들인 덕흥부원군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명종의 사랑을 받다가 명종 승하후 후사가 없어 명종비인 인순왕후에 의해
    1567년 조선 제14대 왕으로 즉위했습니다.
    명종은 생전에 여러 조카들 중 선조를 가장 사랑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선조부터 적자가 아닌 서자 임금시대가 열리는 것입니다.
    허준 드라마에서도 명나라로 부터 왕 인증을 받지 못한 이야기가
    계속나오기도 하고 또한 본인의 출생배경 때문에 서자인 광해군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적자인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고자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죽게되어 나중 인조반정의 빌미를 제공하게 됩니다.
    이런 선조이다 보니 선왕인 명종은 은인일 수 밖에 없어 명종의 강릉에
    겨우 화재가 난것을 가지고 근신의 예까지 갖추게 된 것입니다.

    명종(明宗)은 12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이 권력을 움직일 수 없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곧 생모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섭정(攝政)은 외척(外戚)의 전횡(專橫)이라는
    비리를 양산하게 되고 국정의 혼란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또한 이복형제(異服兄弟)의 왕위 계승이 이어진 것도 권력 암투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으로 조정의 대세는 윤원형 일파에게 돌아갔습니다.
    윤원형은 을사사화를 통해 윤임을 사사케하고, 양재역벽서사건을 일으켜
    정적을 제거한후 권력을 독점하자 애첩 정난정과 공모하여 정실부인 김씨를
    독살하고 노비출신인 그녀를 정경부인의 자리에 올려 놓았습니다.
    명종대의 권력의 문란함은 내외의 혼란을 야기시켜 밖으로는 '을묘왜변(乙卯倭變)',
    안으로는 임꺽정(林巨正) 같은 군도(群盜)의 만연 등 국가의 기강이 흔들리는
    사건들이 이어지게 됩니다.

    인순왕후 심씨는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심강(沈鋼)의 딸로 태어나
    명종과의 슬하에 순회세자 (順懷世子)를 두었으나 세자가 어린 나이에
    요절하게 되어 슬하의 자식으로 역시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게 됩니다.
    결국 명종(明宗) 승하 후 중종(中宗)의 일곱 번째 아들이었던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셋째 아들{선조(宣祖)}이 14대 왕위에 즉위하게 됩니다.

    태강릉은 서울에 가까이 있어 자주 찾는 곳입니다만 강릉은 관람할 수 없고
    태릉은 가서 놀기 바쁘다보니 릉을 제대로 관람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앞에서도 나왔듯이 태릉의 문인석과 무인석의 얼굴은 다른 릉과 비교해 볼때
    크기가 훨씬 크고 웅장합니다.
    가까이 다가가진 못하지만 멀리서도 확연히 느낄수 있습니다.
    당대의 문정왕후의 세력이 짐작이 갑니다.
    출처 : 불혹전후
    글쓴이 : 소올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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