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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도 마음 편히 쉬지 못하는 곳, 강화도 연미정
    답사는 즐거워/문화재답사 2011. 6. 28. 10:00

    연미정(燕尾亭)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4호)

     

    자연경관을 보며 풍류를 즐기거나 학문을 공부하던 정자이다. 한강과 임진강의 합해진 물줄기가 하나는 서해로, 또 하나는 강화해협으로 흐르는데, 이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 같다고 해서 정자 이름을 연미정이라 지었다고 한다. 언제 처음 지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나 고려 고종(재위 1213∼1259)이 사립교육기관인 구재(九齋)의 학생들을 이곳에 모아놓고 공부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조선 중종 5년(1510) 삼포왜란 때 큰 공을 세운 황형에게 이 정자를 주었다고 한다. 인조 5년(1627) 정묘호란 때에는 강화조약을 체결했던 곳이기도 하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연미정은 강화십경의 하나로서 뛰어난 경치를 이루고 있으나, 현재 민간인통제구역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문화재청 자료에서 인용> ==>현재 강화나들길 1코스에 속해있으며 민간에 개방되어있다. 문화재청 자료를 수정해야 할 것 같다.

     

     

     

     

     

     

     

     

     

     

     

     

     

     

     

     

     

     

     

     

     

     

     

     

     

     

     

    ▼ 연미정은 장무공 황형 장군과 연관이 깊은 곳이다. 중종에 의해 이 정자가 황형 장군에게

    하사되었고 또한 이곳에 세워져 있는 비석의 내용으로 보아 황형 장군이 낙향하여 살았던 

    집터라 한다. 이날 비가 온 관계로 사진이 흐릿하다. 

    ▼ 장무공황형장군택지비  

    ▼ 연미정안내문 

     

    ▼ 연미정은 월곳돈대 안에 있다.(월곳은 강화도에서는 월곶으로 쓰는것 같은데 문화재청은 월곳

    이라 쓰고 있다.)  

    ▼ 월곳돈대의 모습.. 

    ▼ 월곳돈대가 있는 곳은 민통선지역이라 강쪽으로는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 월곳돈대 입구에서 바라본 연미정  

     

    정묘호란 때는 오랑캐 나라(후금)에게 전쟁에서 패하여 조선 인조왕이 후금과 형제국의

    관계를 맺었던 치욕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후에 다시 강화조약을 무시하고 청에 대항하려다

    병자호란을 불러들여 삼전도에서 청과 군신관계를 맺게 된다. 즉 두번의 전쟁으로 오랑캐-->

    형제관계-->군신관계로 위상이 급전하 하였던 것이다.

    연미정은 다른 정자와 달리 돌기둥이 상당히 높다. 10개의 돌기둥 가운데 남서쪽 돌기둥은 6.25

     때 부셔진 것을 붙여서 그 위에 정자를 다시 세웠다고 한다.  

    ▼ 연미정안내판

    ▼ 연미정 앞에 있는 옛날 택지비..  

    ▼ 연미정 양쪽으로 500년된 느티나무 두그루가 있다.  

    ▼ 연미정은 팔작지붕으로 정면3칸, 측면 2칸으로 되어있다. 

    ▼ 연미정 내부... 

    ▼ 6월의 빛이 감도는 연미정... 넓은 그늘이 좋다.

    ▼ 연미정 뒤로 넓게 서해바다가 펼쳐진다.

     

    ▼ 연미정에서 바라본 입구쪽  

    ▼ 연미정에서 바라본 주위풍경... 남쪽  

     

    ▼ 연미정에서 바라본 풍경.. 북쪽, 보이는 물이 한강에서 강화해협으로 흐르는 물이다. 

    ▼ 연미정에서 바라본 한강하구.. 서해바다로 이어져있다.  

    ▼ 연미정은 강화나들길 제1코스의 끝지점이다... (연장코스도 있지만..)

     

    강화도 연미정은 한양으로 뱃길이 드나들던 곳이지만 물살이 급해서 쉽게 접근이 안되는 곳이었다.

    그런데 조선조에 들어와 황형 장군이 낙향하여 택지로 사용하여 아름다운 풍광을 즐겼겠지만 인조

    때에 정묘호란으로 치욕을 얻었고 조선말엽에는 수난의 역사를 고스란히 바라보면서 이어지다가

    6.25 전쟁을 겪으며 파괴되어 근자에 다시 복원하기까지... 그렇지만 지금도 남북 대치의 현장이란

    특수한 환경으로 아직도 편하게 정자에서 쉴 수 없는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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