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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천 강화]강화도라서 강화조약이 채결된 곳일까?
    답사는 즐거워/문화재답사 2011. 6. 30. 10:00

    강화산성(江華山城) (사적  제132호)

     

     

    강화읍을 에워싸고 있는 고려시대의 산성이다.

    몽골의 침입으로 백성과 국토가 수난을 당하자, 당시 실권자인 최우는 1232년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다. 왕궁과 성·관아 시설은 1234년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 때 개경의 궁궐과 비슷하게 지어 산의 이름도 송악이라 지었다.

    성은 흙으로 쌓았고,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내성은 주위 약 1,200m로 지금의 강화성이다. 중성은 내성을 지키기 위해 쌓았으며, 외성은 1233년 강화 동쪽해안을 따라 쌓았다. 이 외성은 몽골군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지 못하게 한 가장 중요한 방어시설이자, 정부가 39년간 육지로부터 물자를 지원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고려 원종 11년(1270) 개경으로 수도를 다시 옮기면서 몽골과 강화조약의 조건으로 성을 모두 헐게 되었다. 조선 전기에 내성이었던 강화성을 축소하여 다시 지었다. 1637년 병자호란 때 청군에 의해 다시 파괴당하였고, 숙종 3년(1677)에 성을 보수하면서 모두 돌로 쌓고 넓혀 지었다.

    .<문화재청 자료에서 인용>

     

     ▼ 남쪽으로 길게 이어지는 강화산성

     ▼ 강화산성 서문쪽...길을 만드느라 잘렸다..  

    ▼ 강화석수문(유형문화재 제30호)  

     

    ▼ 이 수문은 강화산성의 내성에 연결되어 강화읍을 통하여 흐르는 동락천을 가로지르는 수문

    으로서 조선 숙종 37년에 축조되었다. 3개의 무지개 모양을 한 홍예문으로 재질은 화강암이며,

    길이는 18.2m이고 높이는 2.7m, 폭 4.7m이고, 홍예의 높이는 1.7m, 폭은 3m이다. 1910년 갑곳리

    동락천 입구의 다리로 사용되었다가, 1972년 하수문 자리로 옮겨졌던 것을 1992년 원 위치에

    옮겨 복원하였다. 

     

    ▼ 연무당 옛터

     

    연무당옛터

    역사는 간단 없이 흘러가되 교훈은 남는 것이니 연무당은 그 역사의 교훈을 듣는데다, 일찍이 여기에서 강호부의 군사들을 훈련 했었고 최근세 1876년 고종 13년 2월 26일 이른 바 병자년 한일 수호조약을 체결했던 집이다. 이미 그 전년에 일본의 군함 운양호가 들어와 침략적인 야욕을 품고 초지진 포대를 공격하고 영종도에 내려 살육과 약탈을 자행하고 갔었다. 이듬해 봄 다시 군함과 수송선을 이끌고 와서 한국과 일본이 수호조약을 체결하자고 강요하자 우리는 거기 따라 부산 원산 인천을 개항하여 그로인해 서구문명을 받아 들이기는 했지마는 실상은 도둑에게 문을 열어주었던 것과 같아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침략이 시작되어 마침내 망국의 쓰린 역사를 맛보고야 말았었다. 1976년 박정희 대통령께서 친히 돌아보시고 이 연무당터야말로 민족의 역사적 시련장이며 자주적 역량만이 사는 길임을 보여준 곳이므로 이곳을 길이 보존하도록 하라는 분부를 내려 문화공보부와 경기도가 그 깊은 뜻을 받아들어서 페허를 쓸고 깨끗하게 꾸며 놓았거니와 우리는 여기에 와서 스스로 깨닫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오직 제 힘을 키우고 기른 다음에 라야 어떤 고난이든지 능히 이길 수 있는 것이기에 그 뜻을 돌에새겨 자손 만대에 길이 전한다. 1977년 8월 이은상 짓고 김충현 쓰다. <연무당옛터 비문내용>

     

     

     

    강화산성(江華山城) (사적  제132호)

     고려가 대몽항쟁을 위해 고종19년(1232년)에 도읍을 강화로 옮기고 궁궐을 지을 때 도성도 함께 쌓았는데, 개성의 성곽과 비슷하게 내성, 중성, 외성으로 이루어졌으며 1232년부터 축조되었다.
    이중 내성에 해당하는 것이 현재의 강화산성이다. 원래는 흙으로 쌓았으나 숙종3년(1677년)에 현재와 같은 석성을 이루었다. 성의 주위 길이는 7122m이며 4개의 대문, 4개소의 암문, 2개소의 수문, 2개소의 성문장청이 있었다. 남문은 안파루, 북문은 진송루, 동문은 망한루, 서문은 첨화루이다.  

     <강화산성 안내판 내용>

     

     

    ▼ 강화산성 서문 첨화루

    ▼ 강화산성 서문 전경

    ▼ 강화산성 돌 한켠 한켠이 예술이다..

    ▼ 강화산성 서문에 그려진 호랑이... 좌청룡, 우백호에서 보이듯 호랑이는 서쪽을 상징한다...

    ▼ 강화산성 서문 첨화루... 산성 안쪽에서 바라본 모습

    ▼ 강화산성 동문...

     

    강화산성은 수많은 침략과 전투, 강화조약 등 역사의 산증인인냥 1000년 가까운 세월을 그자리에 

    버티고서서 조상들의 혼과 정신을 후세에 가르쳐 주고 있다.

    괜한 뜬금없는 생각을 해본다.

     

    땅의 운명은 이름따라 간다고 했다. 가마솥 부(釜)자나 따뜻할 온(溫)자가 들어가면 온천수가

    나오고, 청주공항의 비상리, 비하리가 그렇고, 영종도(永宗島: 길영 마루종 섬도, 이곳은 긴마루

    즉 활주로가 길게 늘어선 인천 국제 공항이 들어 서 있다)도 이름따라 간 것이라 한다.

     

    혹시나 강화도라서 강화조약(講和條約)이 채결되는 그런 장소는 아닐런지...

    물론 강화도(江華島)라는 한자는 전혀 다른 의미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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