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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제천]배론성지 최양업 신부, 지학순 주교 묘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1. 10. 13. 10:00
배론성지
배론성지 는 한국 천주교 전파의 진원지로서, 천주교사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성지이다. 배론이란 지명은 골짜기가 배밑바닥 같다하여 한자 새김으로 주론(舟論) 또는 음대로 배론(排論)이라고도 한다. 1801년 신유박해때 많은 천주교인이 배론 산골로 숨어들어 살았는데 그들은 옹기 장사로 생계를 유지하였고 황사영이 당시의 박해상황과 교회의 재건방안을 호소하는 백서를 중국 교주에게 보고하기 위해 토굴속에 숨어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1855년부터 1866년까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성요셉 신학교가 소재했던 지역이고, 우리나라 최초의 유학생이며 김대건 신부에 이어 두 번째 신부가 된 최양업의 분묘가 소재한 지역이다. 일요일에는 전국에서 천주교인들의 성지순례가 끊이지 않고 있다..<다음 백과사전에서 인용>
최양업(崔良業)
1821년(순조 21)∼1861년(철종 12). 천주교 신부. 본관은 경주(慶州). 충청도 홍주(洪州) 다락골(지금의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출생.
1. 가정환경과 신부수업
아버지는 경환(京煥)이고, 어머니는 이성례(李聖禮)이다. 초창기 대부분의 천주교 신자들처럼 그의 아버지도 박해를 피하여 자주 이사를 다니다가 경기도 과천 수리산에 정착하여 산간생활을 하였으며, 그는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서 독실한 신앙생활의 영향을 받고 성장하였다.
1836년초 조선 입국에 성공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모방(Maubant, R.) 신부에 의하여 김대건(金大建)·최방제(崔方濟)와 함께 조선인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1837년 6월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마카오 도착 1년 만에 최방제가 풍토병으로 사망하고 두 사람은 1842년까지 신부수업을 받다가 갑자기 귀국길에 올랐다.
중국과 조선에 이권을 찾고 있던 프랑스는 세실(Ce'cille) 제독으로 하여금 조선원정계획을 수립하게 하였고, 세실은 조선인 신학생을 통역으로 동행시켜줄 것을 신학교에 요청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난징조약(南京條約)이 체결되자 세실은 이 계획을 포기하였고, 최양업과 김대건은 각기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
2. 귀국 후의 포교활동
당시 조선은 1839년의 기해박해가 있었던 직후라 천주교도들에 대한 검문검색이 심하였고, 특히 사군란(私窘亂)이라 불리던 사사로운 박해가 심하였던 시기라 조선입국이 여의치 못하였다. 최초의 조선인 신부인 김대건은 입국에 성공하여 활약하다가 1846년에 순교하였다.
이 무렵 최양업은 수차례 입국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한 뒤 1849년 4월 상해의 강남교구장 마레스카(Maresca) 주교에 의하여 사제품을 받고, 김대건에 이어 두번째 조선인 신부가 되어 그해 12월 조선입국에 성공하였다.
유일한 조선인 신부였던 그는 천주교가 다소 묵인되던 철종 연간에 놀라운 전교활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박해 때문에 신자들의 고백성사가 밀려 있었고, 산간의 여러 공소에서는 신부가 오기를 고대하고 있었으며, 그런데도 신부수는 절대부족하였던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지나치게 전교에 힘쓰다가 과로로 쓰러졌고 설상가상으로 식중독이 겹쳐 1861년 6월에 사망하였다. 그의 장례식은 배론신학교에서 베르뇌(Berneux, S. F.) 주교에 의하여 거행되었다.
3. 업적 및 평가
초기의 두 조선인 신부인 김대건과 그는 ‘피의 증거자(순교)’와 ‘땀의 증거자(순직)’로 지칭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12년에 걸친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전교활동은 한국천주교회사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활동과 업적은 그동안 김대건의 순교에 가려 크게 조명되지 못하다가 최근에 이르러 활발히 연구되고 있는 실정이다. 우선 그는 한국천주교회사연구에 중요한 자료가치가 있는 19통의 라틴어 편지를 남기고 있다.
또한, 자기 부모의 순교사적을 비롯하여 순교에 관한 증언과 자료들을 수집하였는데, 다블뤼(Daveluy, M. N. A) 보좌주교는 이 자료들을 자신의 비망록에 수록하였고, 교회사가 달레(Dallet, C. C)는 《한국천주교회사》에 수록하였다.
그리고 그는 1864년 목판본으로 《성교요리문답》을 간행하였고, 〈천주성교공과〉 기도서를 번역, 간행하였으며, 〈사향가〉·〈사심판가〉·〈공심판가〉 등의 천주가사(天主歌辭)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그의 라틴어 편지에는 당시 조선사회에 대한 그의 입장과 아울러 천주교의 전파가 효율적으로 이룩되기 위해서는 올바른 선교정책의 수립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는데 이는 정확한 판단으로 평가되고 있다.
즉, 양반제도의 폐지를 주장하고 있는데 이 제도는 악의 근원으로 교회에서는 분열을 초래하고 국가로 볼 때는 인재등용을 제한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고 조선에 파견되는 선교사들은 파견되기 전에 조선의 실정과 풍습을 익힐 것을 주장하였고, 조선에서의 자유로운 선교를 위해서는 종교의 자유가 획득되어야 하며 이를 위하여 프랑스 정부가 조선 정부에 대하여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펴도록 촉구하고 있다.<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 최양업 신부 상
▼ 베론성지 안내판
▼ 베론성당
▼ 베론성지의 단풍
▼ 최양업 신부 묘소 오르는 길...
▼ 최양업 신부 동상
▼ 최양업 신부 상 근영..
▼ 최양업 신부 동상에 새겨진 사향가...
▼ 최양업 신부 동상 뒷편에 새겨진 약력..
▼ 최양업 신부 묘소 가는길에 있는 성직자 묘소
▼ 양기섭 신부 묘
지학순(池學淳)
1921년∼1993년. 주교·인권운동가. 세례명은 다니엘(Daniel). 평안남도 중화 출생.
1934년 중화공립보통학교 재학중에 중화본당의 신부 콜먼(Coleman, J.)에게서 영세하였고, 이듬해 동성상업학교(東星商業學校) 을조(乙組, 小神學校)에 입학하였으나 1940년 병으로 중퇴한 뒤 1943년 함경남도 덕원신학교(德源神學校)로 편입하였다.
1949년 북한 공산정권에 의해 덕원신학교가 폐쇄되자 월남을 시도했다가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른 뒤, 그해 말 동료 윤공희(尹恭熙)와 함께 월남에 성공, 다시 성신대학(聖神大學 : 현 가톨릭대학교의 전신)으로 편입하였다.
6·25 때 국군에 자원 입대하였다가 1952년 2월 횡성(橫城)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제대하였다.
그 뒤 성신대학에 복학하여 1952년 사제로 서품되었다. 거제도포로수용소 군종신부, 청주 북문로본당(北門路本堂)보좌신부를 역임하고 1956년 로마 프로파간다(Propaganda)대학에 유학, 이곳에서 교회법 석사·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59년 귀국하였다.
청주교구장 비서, 1962년 부산 초장동본당(草場洞本堂)주임을 거쳐 1965년 원주교구(原州敎區)가 설립됨과 동시에 초대교구장에 임명되었고, 이해 6월 주교로 성성(成聖)되었다.
이후 원주교구의 교세 신장과 발전에 주력하는 동시에 여러 교육·복지 기관들을 설립, 사회봉사활동에 노력하였고, 신용협동조합운동을 도입하였으며, 1969년에는 한국 군종후원회(軍宗後援會) 초대총재주교에 추대되었다.
또 1972년 8월 교구내에 재해대책사업위원회를 설치하여 재해민 구제에 힘쓰는 한편, 한국의 사회·정의·인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국제사면위원회 한국위원회 위원장, 정의평화위원회 총재, 한국노동교육 협의회 회장,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하여 1974년 내란선동과 긴급조치1·4호 위반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았다가 이듬해 구속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이 사건은 당시 교회 안팎으로 큰 영향을 주었고,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결성되는 데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후에도 1975년 4월 주교회의 인성회 총재주교, 1986년 11월 한국천주교사회복지협의회 총재 주교, 1988년 2월 주교회의 평신도위원회 위원장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으며, 1985년 9월 남북한 이산가족 고향방문단의 일원으로 북한을 방문하여 휴전 후 북한에서 최초로 공식 미사를 봉헌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90년 11월 지병으로 인해 교구의 모든 행정을 부주교 김지석(金智錫)에게 위임 한 뒤 휴양중에 죽었다.
주요 저서로는 《내가 겪은 공산주의》·《정의가 강물처럼》 등이 있다...<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 지학순 주교 묘
▼ 성직자묘소에 모셔진 신부님들 묘
▼ 최양업 신부 묘 전경
▼ 최양업 신부 묘 근경
▼ 최양업 신부 묘
▼ 최양업 신부 묘비..
▼ 최양업 신부 묘비의 이름이 정구로 되어있는 이유...
▼ 최양업 신부 묘 앞에서 내려다 본 전경..
▼ 최양업 신부 묘 좌측..
▼ 최양업 신부 묘 우측
▼ 최양업 신부 묘 청룡쪽이 깎여있다.. 좋게 안본다..
▼ 최양업 신부 묘 전경... 앞쪽에 신도 한분이 자리를 비켜주지않아 후경을 찍지 못했다..
▼ 최양업 신부 묘 입수...
▼ 최양업 신부 묘 입수처..
▼ 건물 뒤로 배론 성당이 보인다.
▼ 첫 신학교인 배론 신학교
▼ 황사영이 백서를 쓴 토굴..
▼ 황사영이 비단에 쓴 백서 복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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