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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도봉]함열남궁씨 묘역(남궁숙, 남궁제 묘)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1. 12. 1. 10:00

    함열남궁씨 묘역(남궁숙, 남궁제 묘)

     

    풍수답사 시 옆에 함께하신 지인이 도봉구 무수골에 영해군 묘 근처에 좋은 자리가 있다고 해서 함께 답사하기로 정하고아침에 출발하려하니 비가 억수로 내린다. 옷차림도 대충하고 나왔는데 추위에 온 몸이 떨려올 정도다.도봉역에 도착해서 기다리는데 도저히 추워서 견딜 수 없다. 근처 식당에 들어가서 요기를 좀 하고 기다리다 만나서 무수골을 함께 올랐다. 비가 계속해서 내리는 바람에 카메라를 꺼내지도 못하고 그냥 답사를 계속했다. 먼저 미리 봐두었다는 명당 생지(묘를 쓰지 않은 곳)를 돌아보는데 나하고는 의견이 맞지않았지만 자리는 좋아보였다. 마지막 향을어디로 둘 것인지 서로 의견이 달랐다. 비가 내려서 일단 영해군 묘는 지나치고 계속 윗쪽으로 올랐더니 함열 남궁씨 선영이 보였다. 능선마다 여러 기의 묘가 있었는데 그 즈음에도 좋은 자리를 봐 두었다고 함께 올라 이리저리 잡목을 해치며돌아다녔다. 좋은 자리는 이미 한 분이 차지하고 있었고 괜찮은 자리 한군데는 비어있었다. 나머지 좋은 자리라고 추천한곳은 내 취향이 아니다. 전반적으로 함열 남궁씨 묘역은 아기자기하면서 용이 힘차게 돌아 생기가 살아 숨쉬고, 지세가첨세한 것이 없이 후부하고 두툼하여 자리가 여러개가 나왔다. 입수 절을 공부하려면 이곳이 제격이었다. 함열 남궁씨 묘역 입구에 남궁숙선생의 신도비가 있어서 다른 분들의 묘역을 다 올라갔지만 비 때문에 사진을 못찍고 남궁숙 선생의 묘만 찍을 작정이었는데 묘를 거의 다 돌아다녔는데도 선생의 묘가 보이지 않는다. 하는 수없이 입구로 나와반대 방향으로 올랐는데 아까 갔었던 묘를 다시 만났다. 이즈음에는 영감을 써먹을 때가 된 것이다. 감으로 이곳이다 하고 옆길로 올랐더니 과연 그곳에 남궁숙 선생의 묘가 있고 건너 능선에 남궁제선생의 묘가 있었다. 나중에 집에와서확인하니 남궁제선생은 남궁숙선생의 아드님이었다.빗줄기는 멈추질 않고 카메라랜즈에 자꾸 빗물이 튀기어 어차피 촬영이 안되겠기에 부랴부랴 정리하고 산을 내려왔다.비오는 날의 촬영은 똑따기 카메라가 최고다.. 망가진 똑따기 카메라를 수리해야 될 모양이다...ㅎㅎ

     

     

    남궁숙(南宮淑)
     
    1491년(성종 22)∼1553년(명종 8).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함열(咸悅). 자는 숙부(淑夫). 아버지는 강원도관찰사 남궁찬(南宮璨)이다.
    1533년(중종 28)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박사에 보임되었다가 승문원도제조가 무단으로 보임시켰다는 대간의 논란을 받고 승문원에서 나와야만 하였다.
    1536년 홍문관부정자, 이후 지평을 역임하였다.
    1544년 안산군수(安山郡守)로 재직중 청렴근면하고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다는 경기도관찰사 홍섬(洪暹)의 장계에 따라 가자되었다.
    1547년(명종 2) 승정원좌부승지로 발탁되고, 같은해 진위사로 임명되었다가 신병으로 교체되어 곧 상호군에 제수되었다.
    1548년 황해도관찰사, 이듬해 해주교생(海州校生) 안세복(安世福) 등이 선정을 베풀었으니 계속 근무하게 해달라는 상소를 올려 한 계(階)가 가자되면서 유임하도록 되었다.
    그러나 유생의 상소가 실정과는 다르다는 것이 판명되면서 가자가 취소되고 상호군이 되었다가 같은해 전라도관찰사로 임명되었다.
    1551년 한성부우윤을 거쳐, 함경도관찰사가 되었는데, 이때 탐학이 심하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고 동지중추부사에 체직되었다. 자질이 용렬하고 고집이 세고 학식이 얕아 명리를 탐취하였지만, 직무에는 근면하여 세인으로부터는 능리(能吏)라고 인식되었다, 특히 활쏘기에 능하였다.


    남궁제(南宮梯)
     
    1626년(인조 4)∼미상. 본관은 함열(咸悅). 자는 자거(子居), 거경(居卿), 호는 동강(東岡).
    부제학 남궁찬(南宮璨)의 후손이다.
    1669년(현종 10) 기유(己酉)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 60위에 합격하였다.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문에 능히 통달하였다. 아홉 살에 모친상을 당하여 예를 지극하게 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그의 효성을 칭송하였다.
    1832년(순조 32)에 효자로 지평(持平)을 추증받고, 전라북도 김제시 성덕면(聖德面) 남산서원(南山書院)에 배향되었다. 남산서원은 병자호란 때 척화파(斥和派)로 활약한 유지화(柳志和)의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1574년(선조 7)에 창건되었고, 1870년(고종 7)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폐되었다가, 1970년에 다시 중건되었다.<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미지정
    문화재명칭 함열남궁씨 묘역(남궁숙, 남궁제 묘)
    소재지 서울시 도봉구 도봉동 산86-2(국립공원 통제소 부근 윗무수골)
    관리자(연락처) 함열 남궁씨

     

     

    ▼ 남궁 숙 선생 신도비.. 

     

     

    ▼ 남궁 숙 선생 묘 전경

     

    ▼ 남궁 숙 선생 묘비... 배위가 두분인데... 입구 쪽에 첫부인 또다른 완산이씨가 있어 총 세분이다..

     

    ▼ 남궁 숙 선생 묘 석물

     

     

     

    ▼ 남궁 숙 선생 묘 입수처... 턱을 지게 깎은게 마음에 걸린다...

     

    ▼ 남궁 숙 선생 묘 후경...

     

    ▼ 남궁 숙 선생 첫째부인인 완산이씨... 후사가 없다..

     

     

    ▼ 남궁 숙 선생 첫째부인 묘 후경..

     

     

    ▼ 남궁 숙 선생 조카이신(남궁 순 아들) 남궁 제 선생 묘 원경

     

    ▼ 남궁 제 선생 묘 전경

     

     

    ▼ 남궁 제 선생 묘비

     

     

    ▼ 남궁 제 선생 묘 석물...

     

     

    ▼ 남궁 제 선생 묘 후경...

     

    ▼ 함열 남궁씨 제실.. 만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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