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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용산]연복사탑중창비 우연히 발견...
    답사는 즐거워/문화재답사 2012. 2. 25. 10:00
    연복사탑중창비

     

    길을 가다가 우연히 비석이 보여서(귀부와 이수 부문) 무슨 비석인지 한번 확인해 보고 싶었는데 어느날 

    일부러 찾아가 봤다. 가보니 연복사탑중창지기(演福寺重창之記)라고 적혀있다.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어서 일단 사진만 찍고 인터넷에 들어와서 확인해 봤다.

    좀 오래된 문건이긴 하지만 몇군데 내용을 확인해보니 아직 비를 찾지못했다고 나오고 있어 혹시라도 

    참고가 될까해서 올린다. 내가 가입한 일그러진 근대역사의 흔적이라는 카페에 연복사탑중창비에 대한 

    내용이 있어서 일부 발췌하여 참고로 올립니다.


    연복사 [演福寺]   


    개성시 한천동에 있었던 고려시대의 사찰.

    광통보제사(廣通普濟寺)ㆍ보제사라고도 하였다. 창건연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1037년(정종 3)에 정종이 이 절에 거둥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전에 절이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따르면, 이 절의 정전(正殿)인 나한보전(羅漢寶殿)은 왕실보다 더 웅장하였다 하며, 그 안에는 석가모니불·문수보살·보현보살의 삼존불을 중심에 두고 주위에 500구의 나한상을 배치하였다고 한다. 나한전의 서쪽에는 높이 200척(약 60m)이 넘는 5층석탑이 있었고 뒤에는 법당을 배치하였다. 특히 연복사가 주목을 받는 것은 정전인 금당(金堂)과 탑은 직선 위에 건립하는 일반적인 가람배치 형식을 취하지 않고 동쪽에 금당(나한보전)을, 서쪽에 탑을 나란히 배치하는 동전서탑(東殿西塔)의 가람배치를 하였다는 점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법륭사(法隆寺)·법기사(法起寺)·법한사(法翰寺) 등 일본 사찰의 예를 들어 이러한 형태는 일본에만 있는 독특한 가람배치라고 주장하여왔다.

    이 절에는 특히 공민왕·공양왕이 관심을 기울여 문수회(文殊會)·담선회(談禪會) 등을 참관하기 위해 여러 차례 거둥하였다. 1391년에는 공양왕의 명으로 절의 중창 공사가 시작되었으나 공사비가 엄청나다는 정도전(鄭道傳) 등의 상소로 단청(丹靑) 공사만 남기고 중단되었다. 조선이 개국한 이듬해인 1393년(태조 2) 태조는 단청공사를 마치게 하고 탑의 위층에 불사리(佛舍利)를 봉안하였으며, 중간에는 대장경을 수장하게 하였다. 절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는 동안 폐허가 되었다.

    이 절의 유물로는 1346년(충목왕 2) 원나라의 공장(工匠)에 의해 조성된 연복사종과 1394년 권근(權近)이 지은 중창비이다. 이 가운데 중창비의 비신(碑身)은 없어지고 귀부(龜趺)만 남아 있는데, 네 마리의 용이 쌍으로 어우러져서 뒷발로 보주(寶珠)를 받치고 있는, 빼어난 작품이다. 한편 연복사종은 용·봉황·거북 등이 파도를 넘는 웅건한 모습을 조각한 것으로, 북한 보물급 문화재 제30호로 지정되어 있다.  

    <불교경전총론에서 인용>



    연복사탑중창비(演福寺塔重創碑, 4-16)


    소재지 : 개성직할시 연복사지

    시대 : 조선 태조 3년 (1394)

    크기 : 이수(이首) 높이 121.2cm, 폭 124.3cm, 제액(題額) 66.7X39.4 cm


    이 중창비는 원래 개성 연복사터에 있던 것을 1900년~1910년경 경성철도(京城鐵道)구락부로 일제가 옮겨온 것으로 현재는 소재불명이다. 비신(碑身)은 유실되어 있으나 비문(碑文)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금석총람(金石總覽)에 기재(記載)되어 있다.

    방형의 지대석 위에 추력(追力) 없는 귀부(龜趺)를 설치하고 그 위에 비신을 갖추었으나 현존 비신은 유실(流失)되고 이수만 현존하여 있다. 이수는 경주 태종무열왕릉의 석비 이수와 같이 4마리의 용이 몸체를 서로 엉켜서 용두(龍頭)를 아래로 향하고, 비신을 들어 올리는 듯한 당(唐)나라 석비의 이수양식을 따르고 잇다. 좌우대칭(左右對稱) 되게 배치한 용체(龍體)의 공간(空間)에 규형(圭形)의 제액(題額)을 설정하고 전서체로 '演福寺塔重創碑'라 명기(銘記)한 고려말의 석비이며, 특히 귀부는 원각사탑비(圓覺寺塔碑)의 귀부와 동일하다.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725면에 전문기재(全文記載))

    정선종, "고려말 석비의 변화에 대하여 : 양식과 재료를 중심으로" <문화사학> 제11,12,13호 (한국문화사학회, 1999년 12월)(595~596쪽) 


    3. 연복사탑중창비(演福寺塔重創碑, 사진 8~10)


    개성의 연복사에 있던 것을 1900~1910년경에 용산철도 구락부로 옮겨놓았는데 현재는 소재불명이다. (이 비에 대한 사항과 사진과 도판해설을 참고하였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북한문화재해설집 I>, 1997, pp.199~200참조) 귀부는 사각의 지대석 위에 있는데 몸체에 비하여 머리가 너무 크다. 머리는 수평으로 길게 내밀었으며 목에는 몇줄의 주름이 있다. 눈은 작고 동그랗게 조각하였고, 다문 입술 사이로 삼각형으로 도식화된 이빨이 노출되어 사납게 느껴진다. 발은 무릎을 굽혀 바닥에 대호 있으며 발에도 부정형의 귀갑이 표현되어 있다. 앞발과 뒷발의 몸체에는 '十'자 모양의 띠를 표시하고 띠가 만나는 부분에는 꽃무늬를 새겼다. 귀갑의 가장자리에는 만자문대를 돌리고, 등의 중앙에는 넓고 낮은 비좌를 마련하였다.

    비신은 이수와 한돌로 만들었는데 비신은 결실되었다. 이수의 앞면에는 중앙에 규형(圭形)의 비액이 있고 비액 주위에는 서로 얽혀있는 두 마리의 용을 조각하였다. 두 개의 뿔이 길고 갈기가 있는 용은 측면에서 비신의 상단 모서리를 입으로 물고, 비액 바로 옆에서 길고 날카로운 세 개의 발톱으로 비신의 상단을 움켜쥐고 비신을 들어올리는 형상을 하고 잇다. 다른 발은 비액 경사면과 나란히 올라가 뾰족한 정상부에서 동그란 보주를 좌우의 용이 같이 움켜쥐고 있다. 이수의 정상에는 보주에서 나온 서기(瑞氣)가 동그랗게 새겨져 있는데 화염무늬와 같은 것으로 장식하였다. 이수는 전체적으로 보아 좌우가 대칭으로 기본 도상이 용암사지 흥자국통비와 같지만 뒷모습은 알 수 없다.

    앞면의 비액에는 '演福寺塔重創碑'가 2행 종서의 전서(篆書)로 쓰여있다. 고유섭(高裕燮) 선생은 이수만은 무열왕릉비(武烈王陵碑)의 이수를 제법 복구시킨 것으로 우아한 맛이 있으나 귀부(龜趺)는 매우 형식화하고 평판화(平板化)하여 미적 가치가 조금도 없다고 평하였다. (고유섭, <송도의 고적>, 열화당, 1979, p.92) 이 비는 태조의 명으로 권근(權近)이 짓고 성석린(成石璘)이 글씨를 써 1394년(태조 3년)에 세웠다. 석재의 종류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진에 나타난 질감으로는 입자가 매우 치밀한 석재이다. 이수의 높이 4척, 폭 4척 1촌이다. 

    (정리 : 2006.11.12, 이순우, http://cafe.daum.net/distorted) 

    <카페:일그러진 근대역사의 흔적에서 인용>


    연복사탑중창비 


    [경기도 개성에 있는 연복사의 탑을 중창한 기록으로 태조 3년(1394년)에 권근(權近)이 지었다. 개성 도성 안에 있던 천 여 간의 대찰 연복사에 오층탑이 있었는데 언젠가 허물어져 공민왕이 중건하려다 못하고 공양왕이 1391년에 중창을 시작하여 하부 6간의 오층탑을 만들다가 다시 중단되었다. 조선 태조 원년(1392년)에 완성하여 이듬해 단청을 입혀 준공하였다. 탑의 위쪽에는 사리를 봉안하고 중간에는 대장경, 아래에는 비로자나불상을 봉안한 구조였음을 중창기에서 밝히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도 수록되어 있는데 비문 중간 일부는 전하지 않는다.]

    <한국금석문종합정보시스템에서 인용>


    연복사탑중창비문-권근(權近)지음 


    부처의 도(道)는 자비와 희사를 덕으로 하고, 인과응보가 틀리지 않는 것을 징험으로 삼는다. 부처의 말은 지극히 크고 넓어 번역되어 중국에 전해지고, 사해에 파급되어 천년을 끊임없이 이어 왔다. 오래될수록 더욱 성하여 위로는 왕공 대신(王公大臣)으로부터 아래로는 필부필부의 어리석은 자에 이르기까지 복리를 희구하여, 높여 신앙하지 않는 이가 없다. 사원과 탑과 사당의 건설이 우뚝우뚝 높이 솟아 서로 바라다 보이는 것이 천하에 가득하다. 우리 나라는 신라의 말기로부터 부처를 받들어 섬김이 더욱 삼가하였다. 성중의 사찰이 민가보다 더 많았으며, 그중에도 크고 웅장하며 높고 특출한 전각은 지금까지 오히려 그대로 남아 있으니, 그 당시의 존숭함이 지극하였던 것을 상상할 수 있다. 고려는 왕씨(王氏)가 나라를 통합하던 당초부터 신라의 정책을 그냥 사용하고 고치지 아니하여, 신비한 도움이 있기를 기원하여 중앙과 지방에 절을 많이 설치하였으니, 소위 돕는다라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연복사는 실로 도성 안의 시가(市街)의 곁에 자리잡고 있는데 본래의 이름은 당사(唐寺)이다. 방언에 당(唐)과 대(大)는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당사는 또한 대사(大寺)라고도 부른다. 집이 가장 커서 천여 칸이 넘는다. 안에 3개의 연못과 아홉 개의 우물을 팠으며 그 남쪽에 또 5층의 탑을 세워서 풍수설에 맞추었다. 그 풍수설은 옛 서적에 자세히 실려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덧붙이지 않는다. 왕씨가 나라를 향유한 5백년 동안에는 여러 번 전란과 변고를 겪어서 이 절의 흥폐도 한두 번만이 아니었으니, 이 탑이 파괴된 것이 정확하게 어느 때인지는 알 수 없다. 공민왕 때에 이르러 조성하려 하였으나 성취하지 못하였으며, 뒤에 광승(狂僧) 장원심(長遠心)이라는 자가 있어서 권력 있는 자와 귀한 사람들에게 연줄을 대어 백성을 번거롭게 하여 재목을 베곤 하였으나 마침내는 이루지 못하였다. 공양군(恭讓君)이 장수와 재상의 힘을 입어 조종(祖宗)의 왕업을 회복하고 즉위한 뒤부터는 부처 섬기기를 더욱 힘쓰더니 이에 중 천규(天珪) 등에게 명하여 공인과 장인을 모집하여 공사를 일으키게 하였다. 신미년 2월에 일을 시작하였으니 옛터를 파헤치고 나무와 돌을 메워서 그 기초부터 견고하게 하였다. 겨울가지 가로 세로 여섯 칸을 세우니 크고도 넓었다. 여러 번 걸쳐서 5층에 이르고 평평한 돌로 지붕을 덮었다. 장차 준공하려 하는데 헌신(憲臣)의 간언이 있어서 중지하려 하였다. 그 때 우리 주상 전하(이성계를 가리킴)께서는 모든 조정의 관원을 통솔하는 지위에 계시면서 공사의 준공을 청하였다. 오래지 않아 공양왕이 임금의 도(道)를 실추하고 스스로 손위(遜位)하니 대명(大命 천명)이 전하에게 모이었다. 이하는 글이 없어졌다.

    삼가 생각하건대 주상 전하께서는 신무(神武)한 자질로써 하늘과 인심의 호응을 얻고, 문득 왕위에 올라 크게 인민과 사직을 주재하니 지극한 어진 마음은 살리기를 좋아하고, 큰 덕은 만물을 육성하며 여러 어진 이들이 힘써 보필하니 다스리는 도는 밝고 높아 모든 구폐(舊弊)는 개혁되고 온갖 교화는 모두 새로워졌다.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백성에게 은혜를 줄 수 있는 정사는 하지 않는 것이 없다. 불도의 자비롭게 만물을 사랑하는 것이 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숭상하는 법을 그냥 지키고 폐지하지 아니하였다. 그것은 창업의 벽두에 훌륭한 법을 세우고, 자손을 위한 계책을 남겨 후손에게 전한 것이 크고도 갖추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이에 공사를 더욱 부지런하게 독려하여 드디어 공사의 완성을 보게 되었으니, 실로 임신년 12월이었다. 계유년 봄에 단청을 장식하니 집의 아름답고 훌륭함이 구름 밖에 날아가는 것 같고, 새가 하늘에 비상하는 것 같다. 황금빛과 푸른 색채가 눈부시게 빛나서 반공(半空)에 번쩍인다. 위에는 부처의 사리를 봉안하고 중간에는 《대장경》을 모셨으니, 아래에는 비로자나(毘盧遮那)의 초상을 안치하니, 국가를 복되게 하는데 이바지하고 길이 만세에 이롭게 하려고 한 것이다. 4월에 문수회(文殊會)를 열고 낙성식을 올렸다. 임금이 신(臣) 권근에게 명하여 그 시말을 적으라고 하였다. 신은 요사이 삼가 중의 말을 들이니, 탑을 세우는 것은 공덕을 표시하는 것으로서 그 층(層)의 수(數)가 많고 적음에 따라 공덕의 높고 낮은 것을 밝히는 것인데 5층 이상은 불탑으로 그가 말하는 공덕보응(功德報應)의 설(說)은 지극히 크고 넓다. 그런 까닭에 아육왕(阿育王) 이후로 역대의 임금들이 높이 존숭하여 탑을 끊임없이 세웠다고 하였다. 그러나 양나라 때에 달마(達摩)가 무제(武帝)의 절을 짓고 탑을 짓는 일을 물은 것에 대한 대답에는 한 조각의 공덕도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무제(武帝)가 마음은 닦지 않고 재력(財力)만 소비하였기 때문에 한 발언인 것이다. 지금 연복사의 탑 건립에 재물이 민가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인력은 농민을 번거롭게 한 것이 아니니 그것이 공덕됨을 어찌 쉽게 헤아려 계산할 수 있겠는가. 공덕이 이미 아름다우니 응보는 자연히 드러날 것이다. 인심과 천명이 경사를 함께 하며, 그윽함과 밝음이 함께 힘입어서, 복리와 은택을 영원 무궁하게 미루어 주고 큰 행복을 끝이 없도록 이어서, 나라와 더불어 아름답고 만세에 이르도록 더욱 견고할 것을 진실로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신(臣) 근(近)은 손으로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가사(歌詞)를 올려 말합니다.

    불설이 서역에서 일어나 / 浮屠之說興西域

    온 세상에 흘러 퍼지니 중국말로 번역되었네 / 流傳四海因華譯

    인과응보의 설 몹시 크고 넓으니 / 其言報應甚宏博

    상하의 구별 없이 부지런히 복을 빌지 않는 이가 없네 / 上下靡不勤祈福

    탑과 묘의 건립 어찌 그리 높고 큰가 / 塔廟之設何巍嶪

    천지 사방에 가득하다오 / 彌天之下遍六合

    신라에서 가장 정성스럽게 섬기더니 / 新羅奉事最誠篤

    왕씨도 존중함을 지켜 다시 고치지 않았네 / 王氏遵守更無斁

    연복사는 시가의 곁에 있는데 / 演福寺在闤闠側

    안에는 못 셋과 우물 아홉이 있다오 / 中有三池九井鑿

    남쪽에 5층각 탑이 있더니 / 其南有塔五層閣

    어느 때 무너진 지 알 수 없네 / 不知何代乃頹壓

    여러 대에서 중건을 경영했으나 마침내 이루지 못하였으니 / 累世重營竟不克

    천운과 복조가 쇠함인데 어찌 할 수 있으리 / 運祚將衰焉可得

    우리 성스러운 임금께서 큰 덕이 있어 / 惟我聖君有大德

    천명과 인심이 돌아가니 역수를 받아 들었네 / 天與人歸膺曆服

    만 가지 교화가 모두 새롭고, 온갖 폐단 고치되 / 萬化俱新百弊革

    불교에 이바지하여 나라를 복되게 하시도다 / 亦資佛敎利邦國

    5층탑을 다시 세워 공사를 마치되 / 五層復建畢工役

    농민의 힘을 번거롭게 하지는 않았다네 / 經構不擾農民力

    높다랗고 우뚝함은 송악과 맞먹는데 / 崢嶸突兀配崧嶽

    구름과 놀이 비춰 단청이 눈부시네 / 輝映雲霞燿丹碧

    위에는 사리를 봉안하여 영험이 빛나고 / 上安佛骨厥靈赫

    중간에는 대장경 만 축(軸)을 갖추었으며 / 中庋大藏具萬軸

    아래에는 장엄하게 비로자나 초상을 안치하여 / 下置毗盧備嚴餙

    공덕이 가장 좋으니 복록이 많으리 / 功德最勝甚饒益

    성군이 만년토록 묘사직을 받들고 / 聖君萬年奉宗祏

    천억 대를 면면히 이어 가면서 / 景祚綿延世千億

    널리 모든 생민 복리와 은택에 젖게 하시리 / 普令群生霑利澤

    신에게 명하시어 노래를 지어 돌에 새기라 하시나 / 命臣作詞刻諸石

    신의 가사가 거칠고 졸렬하여 읽을 수 없네 / 臣詞蕪拙不可讀

    다만 이 탑이 스러지지 않아 / 但願此塔無顚覆

    나라와 더불어 튼튼히 무궁하게 이어가기를 바라노라 / 與國鞏固垂罔極.

    <한국고전종합에서 인용>



    ▼ 길 가다가 우연히 눈에 띄어 찾게된 연복사탑중창비.

    ▼ 연복사탑중창비는 철조망 안에 있다.

    ▼ 연복사탑중창비는 이수 부분 우측 아랫족 용의 머리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 연복사탑중창비 이수부분

    ▼ 연복사탑중창비 전경

    ▼ 연복사탑중창비 글자체.. 연복사탑중창지기(演福寺塔重창之記)라고 적혀있다.

     

    ▼ 연복사탑중창비 이수 옆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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