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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김포]남효온 묘(남재 5대손, 남간 손자)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2. 6. 21. 10:00

    남효온 묘(남재 5대손, 남간 손자)

     

    남간 묘 입수도두에서 조금 올라가면 산길이 갈라지는데 맥이 나뉜다고 볼수도 있다. 주맥은 남간 묘역으로 흐르지만

    남간 묘역이 오른쪽으로 휘어져있어 우측에 자리를 보호해주는 보호사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숲이 우거져있고 시간이 촉박하여 현무봉까지 간산은 하지 못했지만 외부에서 바라본 현무봉은 기복을 하여 내려오고

    있는데 한 줄기를 남효온 묘로 보내고 있다. 조금 급하게 꺾여 횡룡으로 봐야할 것도 같지만 척봉이나 여타 횡룡에 

    필요한 조건이 없어서 횡룡보다는 분맥으로 보고 판단해야할듯하다.

    입수도두를 커다랗게 인작하고 향을 정했는데 명당이 평탄하고 광활하여 좋아보이지만 조안산이 너무 멀어 힘은 많이

    부족해 보인다. 흔히 금시발복은 안되고 대대로 후손에게 영향은 미칠 것으로 보인다.

    남효온(南孝溫)
    1454년(단종 2)∼1492년(성종 23). 조선 단종 때의 문신으로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백공(伯恭), 호는 추강(秋江)‧행우(杏雨)‧최락당(最樂堂)‧벽사(碧沙). 영의정 남재(南在)의 5대손이고, 생원 남전(南恮)의 아들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과 함께 수학했다.
    1. 성품, 25세에 상소
    인물됨이 영욕을 초탈하고 지향이 고상하여 세상의 사물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김종직이 존경하여 이름을 부르지 않고 반드시 ‘우리 추강’이라 했다. 주계정(朱溪正)‧심원(深源)‧안응세(安應世) 등과 친교를 맺었다.
    1478년(성종 9) 성종이 우토(雨土)의 재난으로 군신(群臣)들의 직언을 구하자, 25세의 나이로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 그 내용은, 첫째 남녀의 혼인을 제때에 치르도록 할 것, 둘째 지방수령을 신중히 선택, 임명하여 민폐의 제거에 힘쓸 것, 셋째 국가의 인재등용을 신중히 하고 산림(山林)의 유일(遺逸)도 등용할 것, 넷째 궁중의 모리기관(謀利機關)인 내수사(內需司)를 혁파할 것, 다섯째 불교와 무당을 배척하여 사회를 정화할 것, 여섯째 학교교육을 진작시킬 것, 일곱째 왕이 몸소 효제(孝悌)에 돈독하고 절검(節儉)하여 풍속을 바로잡을 것, 여덟째 문종의 비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인 소릉(昭陵)을 복위할 것 등이었다.
    소릉복위는 세조 즉위 사실 자체와 그로 인하여 배출된 공신의 명분을 직접 부정한 것으로 당시로서는 매우 모험적인 것이기 때문에 훈구파(勳舊派)의 심한 반발을 사서 도승지 임사홍(任士洪), 영의정 정창손(鄭昌孫) 등은 국문할 것을 주장했다. 이 일로 인하여 정부 당로자(當路者)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고, 세상사람들도 그를 미친 선비로 지목하였다.
    2. 처사(處士)생활
    1480년 어머니의 명령에 따라 마지못하여 생원시에 응시, 합격하였으나 그뒤 다시 과거에 나가지 않았다. 김시습(金時習)이 세상의 도의를 위해 계획을 세우도록 권하였으나, 소릉이 복위된 뒤에 과거를 보러 나갈 것임을 말하였다.
    소릉복위 주장은 세조를 옹립한 정난공신(靖難功臣)들이 당시 집권하고 있었던 시기이기 때문에 용납되지 않았고, 다른 명목으로 박해하려 하였다.
    그뒤 벼슬을 단념하고 세상을 흘겨보면서 가끔 바른말과 과격한 의론으로써 당시의 기휘(忌諱)에 저촉함을 조금도 꺼리지 않았다. 때로는 무악(毋岳)에 올라가 통곡하기도 하고, 남포(南浦)에서 낚시질을 하기도 하며 신영희(辛永禧)‧홍유손(洪裕孫) 등과 죽림거사(竹林居士)로 맺어 술과 시로써 마음속의 울분을 달래었다. 산수를 좋아하여 국내의 명승지에 그의 발자취가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한편으로 “해와 달은 머리 위에 환하게 비치고, 귀신은 내 옆에 내려다본다.”는 경심재명(敬心齋銘)을 지어 스스로 깨우치기도 하였다. 당시의 기휘에 속하였던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 등 6인이 단종을 위하여 사절(死節)한 사실을 《육신전(六臣傳)》이라는 이름으로 저술하였다.
    그의 문인들이 장차 큰 화를 당할까 두려워 말렸지만 죽는 것이 두려워 충신의 명성을 소멸시킬 수 없다 하여 《육신전》을 세상에 펴냈다.
    3. 사후상황 저술
    죽은 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고담궤설(高談詭說)로써 시국을 비방하였다고 그 아들을 국문할 것을 청하였다.
    이듬해에는 윤필상(尹弼商) 등이 김종직을 미워한 나머지 그 문인이라는 이유로 미워하여 시문을 인출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 때에는 소릉복위를 상소한 것을 난신(亂臣)의 예로 규정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당하였다.
    1511년(중종 6) 참찬관(參贊官) 이세인(李世仁)의 건의에 의하여 성현(成俔)‧유효인(兪孝仁)‧김시습 등의 문집과 함께 비로소 간행하도록 허가를 받았다.
    1513년 소릉복위가 실현되자 따라서 신원되어 좌승지에 추증되었고, 1782년(정조 6) 다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세상에서는 원호(元昊)‧이맹전(李孟專)‧김시습‧조려(趙旅)‧성담수(成聃壽) 등과 함께 생육신으로 불렀다. 고양의 문봉서원(文峰書院), 장흥의 예양서원(汭陽書院), 함안의 서산서원(西山書院),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의령의 향사(鄕祠)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추강집》‧《추강냉화(秋江冷話)》‧《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귀신론(鬼神論)》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관리자(연락처) 

       미지정
       남효온 묘(남재 5대손, 남간 손자)
       경기도 김포하성면 후평리 산4
      의령남씨

     

     

     

     

     

     

     

     

      

    ▼ 남효온 묘 전경..  

    ▼ 남효온 묘

    ▼ 남효온 묘비

    ▼ 남효온 구 묘표

    ▼ 남효온 묘 석물

     

     

     

    ▼ 남효온 묘 입수도두

    ▼ 도두를 크고 높게 만들었다.. 묘 앞쪽은 인작이 가능하지만 도두부터는 손대면 안된다.

    ▼ 남효온 묘 청룡쪽 후경

    ▼ 남효온 묘 백호쪽 후경

    ▼ 남효온 묘 후경... 멀리 조산이 보기 좋다.. 그러나 너무 멀어서 영향은 별로 주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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